‘미치겠네’ ‘왜요?’ ‘아~ 이 잡풀 좀 뽑아내면 어디가 덧난대요?’ ‘아저씨가 자연주의라 모두 함께 살자 해서 그래요.’ ‘내가 이래서 이곳에 안 올라오는 건데, 전 보기 싫거든요.’ ‘그래도 심은 녀석들은 빼놓지 않고 물주시고 출근하시던데….’ ‘물만 주면 다냐고요? 잡풀들도 좀 뽑아 주어야지. 어휴~ 속 터져’
입으로는 상대도 없는 잔소리를 하고, 손으로는 부지런히 상자텃밭 속 잡풀을 뽑는다. 속 터진다는 분은 오백일호 아줌마다. 대화는 어쩌다 올라온 오백일호 아줌마와 오늘 아침에 아파트 옥상 텃밭에서 나눈 대화이다. 오백일호 아저씨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박애주의자다. 웬만한 풀들은 그냥 놔둔다. 그러니 객이 전도 되어 주인 행세를 한다. 그 덕에 여러 잡풀이 채소와 함께 자라고 꽃을 피운다. 민들레가 그랬고 냉이꽃이 그랬다. 올해는 애기똥풀도 들어와 눈부시게 노란 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 반면에 나는 심은 채소가 아니라면 가차 없이 뽑아 버린다. 감히 네가 어디 스리슬쩍 발을 걸치려 드느냐고 호통을 치며 쫓아버린다. 그 잡풀 중에서도 괭이밥이 으뜸이다. 괭이밥은 눈만 돌리면 이미 들어와 터를 잡고 산다. 분명 괭이밥의 잎은 푸른 녹색이고 노란꽃을 피운다. 하지만 처음 내 땅에 들어와 터를 잡는 괭이밥은 짙은 자주색이다. 상자텃밭의 흙빛깔이다. 눈에 뜨이지 않으려 변색도 서슴지 않는다.
독한 나도 가끔은 잡풀에게 박애주의자로 변신할 때가 있다. 요즘이 그렇다. 내가 심은 채소들에게 방해만 되지 않으면 나도 한껏 아량을 베풀며 산다. 요즘 한창 꽃을 피우고 있는 씀바귀가 그렇다. 사실 씀바귀라 칭하지만, 씀바귀인지 아니면 고들빼기인지 잘 모른다. 그 둘의 차이를 이 나이까지 모르며 사는 탓이다. 어느 날, 물 빠짐이 좋아지라고 커다란 화분 옆구리에 못으로 구멍을 뚫어 놓았다. 그 틈을 비집고 싹 하나가 움텄다.
물론 뽑으려고 했다. 한데 선뜻 손을 내밀어 뽑아지지 않았다. 그 작은 틈에 찾아들어 싹을 틔우고 자라는데. 내가 심은 채소에 방해가 되진 않는데. 조금 아주 조금 채소에게 돌아갈 양분이면 충분한데. 그것까지 막으면 너무 잔인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래 나도 이 정도는 봐 줄 수 있어.’ ‘물은 공짜니까 충분히 줄 테니 살다가 떠나렴.’ 그렇게 놓아두었더니 요즘 한창 노란 꽃을 피우고 있다. 볼 때마다 행복하다. 이 정도면 세입자 자격은 충분하다. 살게 해준 대가로 꽃을 피워 행복하게 해 주었으니 집세는 톡톡히 지불한 셈이다.
나도 한때는 씀바귀처럼 세입자로 살았다. 살기로 한 기한이 다가오면 두려웠다. 또 얼마나 올려 달라 할까 봐 가슴이 콩닥거렸다. 혹시나 나가라고 하지는 않을까? 주인 눈에 뜨이지 않으려 피해 다녔다. 아이들에게는 뛰지 말고 조용조용 살아야 한다고도 했다. 주인집 방에 연탄불이 꺼졌다고 한밤중에 몰래 우리 방 연탄아궁이에서 연탄불을 꺼내 바꾸어 놓아도 제대로 항의 한 번 못하고 살았다.
남의집살이가 얼마나 고달픈지 알기에 씀바귀를 그냥 놓아두기로 했던 거였는데 참 잘했지 싶다. 세입자의 어려움을 세입자를 거쳐 온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누가 이해할 것인가.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얼마라도 좋다. 나도 너희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거기다 나도 어차피 이 세상 한 귀퉁이를 빌려 살다 가는 사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