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우리나라가 신청한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을 등재 확정함으로써 우리나라는 모두 14개의 세계유산을 갖게 되었다. 5천 년 역사에 빛나는 문화강국으로서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중종 38년(1543)에 건립한 조선 첫 서원인 경북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해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대구 달성 도동서원, 경남 함양 남계서원, 전남 장성 필암서원, 전북 정읍 무성서원, 충남 논산 돈암서원 등 9곳이다.
주세붕, 최초의 서원을 건립하다
서원은 공립학교인 향교와 달리 향촌 사회에서 자체적으로 설립한 사설 학교로 지역의 사대부가 후학을 양성하고 선배 유학자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서원이라는 이름은 세종 때에도 있었으나 선현을 제사 모시고 성리학을 강론하는 두 기능을 결합한 서원은 1543년(중종 38)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최초다.
명종 임금의 친필 현판. 명종이 16세 때 쓴 해서체 글씨로 우측에 明廟御筆(명묘어필) 즉, 명종 친필이라는 뜻이며 좌측에는 嘉靖二十九年(1550년) 四月 日 宣賜(선사) (임금이 하사하다)라고 씌어 있다. 액자는 청색 바탕 테에 분홍 연꽃과 초록 잎이 그려진 화려한 모습이며 검은 바탕에 양각된 글씨에는 금칠을 하였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0호)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은 1542년에 고려말 주자학을 들여온 안향 선생의 연고지인 이곳에 사당인 회헌사를 설립한다. 이듬해인 1543년에는 안향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묘(祠廟)를 세우고, 학사(學舍)를 건립하여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하니 이는 주자의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을 본떠 세운 조선 최초의 서원이다.
조선에 서원이 세워진 1543년에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철포(조총)를 들여와 국산화하였고 조선에서 배운 은 제련법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하였다. 이에 500년 내내 성리학의 명분에 사로잡혀 숭명사상(崇明思想)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선과 일본의 운명이 이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고 보는 안타까운 역사적 시점이기도 하다.
명종 임금이 친필 현판을 내려 준 사액서원
소수서원 입구에 남아있는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 그 밖에도 서원 여기저기에는 다수의 불교 흔적인 석물이나 불상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1950년대에는 손바닥만 한 금동불 수십 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주세붕이 서원을 세운 당시 풍기지역 사족들은 처음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 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국가에 서원의 공인을 요청하여 ‘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는 명종 임금의 어필(御筆) 현판과 함께 서적과 토지, 노비를 하사받는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으며 비로소 지역 사족들도 서원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550년, 명종 5년)
이때부터 뒤를 이어 생기는 각지의 서원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인지 여부와 특히 임금의 친필 현판을 받은 것이 대단한 영광이자 그 서원의 위상을 결정짓는 기준이 되었다. 대원군 때에 전국의 서원을 철훼하고 47개만 남기게 되자 그때 훼철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이 또한 큰 자랑이었다.
소수서원의 배치. 입구(화살표)에서 보면 강학 공간(청색 큰 원)이 동쪽, 제향 공간(적색 작은 원)이 서쪽이다. 그러나 일직선이 아닐 뿐이지 사당이 대략 뒤에 있고 강당이 앞에 있어 전학후묘에 크게 다르지 않다거나 그 옛날 서원의 입구가 동쪽에 있어서 정확하게 전학후묘였다는 주장도 있어 흥미롭다.
사액서원(賜額書院)은 임금이 이름을 내려준 서원이라는 뜻이다. 즉, 임금이 이름을 지어주고 현판을 내려주었다는 뜻이지만 모든 사액서원의 현판을 임금이 친필로 써 주었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당대의 명필에게 써서 주도록 하기도 하였으니 같은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임금의 친필 현판이 내려왔다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원의 이름 소수(紹修)는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는 뜻의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에서 따왔다고 한다.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7년 뒤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으로 바뀐 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절터에 세워진 서원
서원의 입구. 다른 서원처럼 큼직한 삼문이나 높다란 누각은 없다. 여염집 대문처럼 평범한 문에는 지도문(志道門) 현판이 달려있고, 홍살을 세워 신성함을 알린다. 오른쪽 정자는 주세붕이 세원 정자 경렴정(景濂亭)이며 그 뒤로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 있다. 왼쪽 화단같이 보이는 곳은 제물을 검사하던 성생단(省牲壇)이다. 정문 앞 돌난간이 고풍스러움을 거슬리며 다소 생뚱맞다.
원래 소수서원 자리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러나 세조 3년 단종 복위 운동의 발각으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살해되는 참변으로 순흥도호부가 폐부 될 때 인근 승림사와 함께 소실, 폐사되었다고 한다.
즉, 세조의 즉위에 반대한 순흥지역 일대가 폐허가 되다시피 한 후에 80년이나 지나 폐사된 절터 위에 서원을 세운 것이니 억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를 밀어내고 유학의 서원을 세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최초의 서원이 절터에 들어섰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동학서묘(東學西廟)의 소수서원 (사적 제55호)
정문 지도문(志道門)을 들어서면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강학당(講學堂)(보물 제1403호)이다. 통상 가로 건물과는 달리 세로로 있어 좁은 면이 정면인데 밖에는 백운동서원 현판이, 안에는 소수서원 현판이 붙어 있다.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세로형 건물로 사방에 툇마루를 둘렀으며 넓은 대청마루에 온돌방이 끝에 있는 전청후실(前廳後室) 구조이다.
대부분의 서원은 공부하는 영역을 앞에(前學), 제향을 올리는 영역은 뒤에(後廟) 배치하는데 소수서원은 강당을 동쪽에, 사당을 서쪽에 배치한 동학서묘(東學西廟)로 지어졌다. 서원의 배치 규칙이 정해지기 전에 지어진 최초의 서원이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소수서원 측에서는 전학후묘(前學後廟)는 중국식이며, 우리나라는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 전통 위차법(位次法)'에 따라 동학서묘(東學西廟)로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다른 서원은 모두 중국식이란 말인지 궁금하다.
서원의 동편은 이렇게 유생들을 가르치는 강학 공간이며, 서쪽으로는 별도로 담을 둘러 사당을 짓고 회헌(晦軒) 안향(安珦) 선생을 모셨다. 문성공묘(文成公廟 : 안향의 시호)라는 현판을 달았는데 주자의 후손인 중국의 명필 주지번이 사신으로 왔다가 참배 후 쓴 글씨이다.
세로형 건물인 강학당 뒤로는 스승들이 기거하는 건물이 가로로 놓여있다. 좌우대칭형으로 왼쪽 직방재(直方齋)는 원장이, 오른쪽 일신재(日新齋)는 일반 교수가 기거한 것으로 보이며, 스승을 뵙고 뒷걸음으로 나오는 제자를 위해 툇마루를 달았다.
사당 뒤편으로는 제향에 쓰는 집기 등을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그 옆으로 안향 선생을 비롯한 여섯 분의 초상을 모신 영정각(影幀閣)이 있다. 영정각 앞으로는 많은 책을 보관하는 장서각(藏書閣)이 있는데 책을 으뜸 자리에 둔다고 하여 스승 숙소 오른쪽에 지었다고 하며 그 앞에는 막대기를 끼워 그림자로 시간을 재던 해시계 일영대(日影臺)가 남아있다.
장서각 앞마당은 사당의 측문이 있어 제향 때 필요한 불을 밝히는 정료대(庭燎臺), 제관들이 손을 씻는 물그릇을 얹었던 관세대(盥洗臺)가 있다. 사당 앞으로는 과거 숙수사지의 목탑 흔적으로 보이는 석재가 남아있다.
서원 뒤로는 관리인이 기거하는 고직사와 사료관이 있고 그 너머로 관리사무소와 충효교육관이 있다. 밖으로 나가 서원을 감아 도는 죽계천을 건너면 소수박물관과 선비촌 마을, 수련원이 연결되는 대단위 문화마을이다.
유생들의 공간은 2채의 건물이 직각의 형태로 놓여 있다. 지락재(至樂齋)는 단칸방에 마루 2칸으로 단출하며, 학구재(學求齋)는 방 2개에 마루 하나로 스승들이 기거하는 건물보다 뒤로 두 칸 물려 지었는데 팔작지붕인 스승들 건물에 비해 맞배지붕으로 소박하다.
소수박물관에는 안향의 초상(국보 제111호), 주세붕 초상(보물 제717호), 명종 친필 현판(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30호) 등이 있고 영남지역 학파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서원 밖에는 유성룡의 형님 유운룡이 풍기군수 때 팠다는 연못 탁청지(濯淸池)가 있고 계류를 건너 하류로 내려오면 물가 바위에 주세붕이 새겼다는 백운동(白雲洞)과 경(敬)자 바위가 있는데 건너기 전에 서원 쪽에서 바라보아야 잘 보인다. 그 아래로는 퇴계 이황이 지었다는 정자 취한대(翠寒臺)가 있어 한가롭게 걸어볼 만하다.
최초로 설립된 서원이자 1호 사액서원이며 임금의 친필 현판을 받은 소수서원은 처음 3명의 유생 입학을 시작으로 1888년까지 모두 4,300여 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사당(보물 제1402호)은 맞배지붕으로 간결한 모습이지만 임금이나 제후를 뜻하는 묘(廟)라 하여 격을 높였으며, 출입문을 삼문(三門)으로 하지 않고 외문으로 세웠다. 안향 선생 외에 안보, 안축, 주세붕을 함께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9월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전국의 서원 중 드물게 입장료를 징수하는데 박물관, 선비촌 등을 묶어 3,000원을 받는다. 영주 시민은 50% 할인해주는데 재미있는 것은 동주 도시민들에게도 할인을 해주는 것이다. 동주(同州)란 영주(榮州)처럼 주(州)가 들어가는 도시, 즉 경기도의 광주, 양주, 여주, 파주가 해당하며 그밖에 원주, 청주, 충주, 공주, 전주, 나주, 경주, 상주, 진주, 제주가 해당한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은 무료입장이다.
가까이에는 세조에게 저항하며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치다 희생된 금성대군 신단이 있으며, 주변에 있었던 위리안치지는 관리상 문제인지 고증의 문제인지 철거되어 볼 수 없다. 또 작년에 13번째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산사 7곳 중 하나인 부석사가 근처에 있다.
Tip [순흥 먹거리]
왼쪽이 전통 묵밥, 오른쪽이 기지 떡. 순흥의 별미다.
순흥 지방에는 전통 묵집과 기지 떡이 유명하며 소수서원 가까이에 있다. 묵밥은 우리가 흔히 보는 까만색의 도토리묵이 아니라 미색의 메밀묵이다. 도토리묵처럼 낭창거리거나 잘 끊어지지 않는다. 한 끼 배를 채우기에는 다소 부족할 수 있어 조밥 한 공기를 말아먹는데 식감이 아주 좋다.
기지 떡은 우리가 말하는 술빵, 술떡인데 기제사 때 많이 쓴다 해서 기지 떡이라고 부른다는 설명이다. 아마도 더운 날씨에 쉬 상하지 않고 제사를 치른 후까지 먹을 수 있어 술떡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인절미도 함께 파는데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