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두 번째 서원
풍기군수 주세붕이 1543년(중종 38) 세운 백운동 서원이 조선 최초의 서원이다. 백운동 서원은 7년 뒤인 1550년(명종 5) ‘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명종 임금의 친필(御筆, 어필) 현판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 뒤를 이어 1552년(명종 7) 두 번째 서원이 건립되니 경남 함양의 남계서원(蘫溪書院)이다.
이 지역 유학자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개암 강익이 주동하여 유림과 당시 군수 윤확시가 세웠으며 1566년(명종 21) 사액 받아 조선에 두 번째 세워진 사원이자 두 번째 사액서원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1603년 나촌(羅村)으로 옮겨 복원했다가, 1612년 옛터인 현재의 자리에 복원하였으며 숙종 때 강익(姜翼)과 정온(鄭蘊)을 추가 배향하였다. 별사에는 유호인(兪好仁)·정홍서(鄭弘緖)를 배향했다가 1868년(고종 5)에 별사를 없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속한 47개 서원중 하나이며, 1974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사적 제499호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9곳 서원중 하나이다.
두 번째 서원의 진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의 두 번째 서원은 해주 문헌서원(文憲書員)이다. 풍기군수를 마친 주세붕이 잠시 내직을 거쳐 1549년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이때 해동공자로 불리던 유학자 최충을 기려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세웠으며 이듬해에는 문헌서원(文憲書員)으로 사액을 받으니 소수서원에 이어 주세붕이 세운 사실상 조선의 두 번째 서원이다.
문헌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해방 후 남북 분단으로 현재 상태는 알 수 없다. 다만 해주 최씨 문중에서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1991년에 오산시에 문헌서원을 복설(復設)하고 최중과 아들 최유선, 최유길을 배향하여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남계 서원에 모셔진 정여창 선생은 동국 18현이며 조선조 5현으로서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234개 향교와 9개의 서원에서 받들어 모시고 있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이다.
8세 때 의주 판관 아버지(정육을)를 수행하니 명나라 사신 장녕(張寧)이 그의 비범함을 보고 ‘집안을 창성하게 할 인물’이라 칭송하며 이름 백욱(伯勗)을 여창(汝昌)으로 바꿔지어 주었다.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 문하에서 수학,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에서 아버지가 전사하자 한 달간 전쟁터를 뒤져 시신을 찾아 예장하였으며, 세조의 특명으로 부친 벼슬인 의주 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 김굉필, 김일손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490년(성종 20년) 학행으로 관직에 나갔으며 그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한때 연산군 스승이었으나 무오사화(김일손 사초/김종직 조의제문) 때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어 54세로 유배지에서 사망하자 두 달에 걸쳐 함양으로 옮겨와 장사 지냈다. 갑자사화로 김굉필이 사사될 때 부관참시되었으며,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다.
남계서원(蘫溪書院)
사액으로 받은 이름 ‘남계(蘫溪)’는 서원 앞을 흐르는 시내 이름이다. 현재는 남강으로 부르는데 안의에서 흘러내려온 남강 줄기는 서원 앞을 지나 산청, 진주로 내려가며 낭만적인 이름과는 달리 서원과 하천 사이로 3번 국도가 놓이고 서원 바로 앞으로는 지방도로가 하나 더 지나가니 사실상 서원 앞 풍광은 다소 삭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