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2관왕
조선의 서원 9곳 중 네 번째 답사는 경주의 옥산서원이다. 사적 154호로 지정된 옥산서원은 이언적(李彦迪)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하였으며 1574년 사액 서원이 되었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세계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중 하나이다.
사실 옥산서원은 이번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뿐 아니라 이미 2010년에 ‘한국의 역사마을’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는바, ‘한국의 역사마을’은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그리고 양동마을과 동강서원, 옥산서원과 독락당이 포함되어 있으니 명실공히 세계유산 2관왕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회재 이언적(1491~1553년)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며 동방오현(東方五賢 :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으로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었고 종묘에는 명종의 공신으로 모셔졌다.
경북 경주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이적(李迪)이었는데, 중종의 명령으로 '언(彦)'자를 덧붙여 '언적(彦迪)'이 되었으며,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이며, 성리학자로 이황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531년(중종 26) 김안로 일파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세자의 사부라서 유배되지 않고, 파직만 당하였다. 이후 한양을 떠나 고향인 경주에 낙향하여 1532년 자옥산에 서실(書室)인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집중하였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종직과 이황 사이를 잇는 중요한 인물로 추대되었는데 이황은 이언적의 학통을 직접 계승하지는 않았지만, 이언적은 김종직의 적통으로 학문을 계승하였으므로 자신의 학문적 연원을 이언적에 연결시켰다.
기본에 충실하게 지어진 옥산 서원
옥산서원은 서원의 이론에 맞게 강학 공간을 앞에 두고 제향 공간을 뒤에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으로 단순 명료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기본에 충실하게 지어졌다.
서원 앞을 흐르는 자계천(紫溪川 : 아름다운 자줏빛 시내)은 지금도 숲이 깊고 흐르는 물이 넘치며 너럭바위를 휘감는데 무심한 듯 개울 뒤로 자리 잡은 옥산서원은 500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