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은 그 구조가 지극히 단순 명료하여 서원의 핵심인 강학 공간을 보면 무변루 누각을 지나 약간 높은 단을 올라 네모진 마당에 ㄷ자 형태로 정면에 강당,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배치된 모습이며 강당 뒤로 높지는 않으나 몇 단의 돌을 쌓아 높인 뒤 사당을 앉혔다. 그렇게 전학후묘를 갖춘 것이다.
무변루를 지나면 강학 공간이 한눈에 펼쳐지는데 정면은 강당 구인당(求仁堂)이며 좌우로는 유생들의 기숙사격인 동재, 서재가 대칭으로 바라보며 서 있다. 서원의 핵심 강학 공간이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구인당 바깥쪽에는 옥산서원(玉山書院) 현판이, 마루 안쪽에는 강당명 구인당(求仁堂) 현판이 걸려 있다. 옥산서원 현판의 왼쪽 여백에 쓰인 액찬(額贊)을 보면 萬曆甲戌 賜額後二百六十六年 己亥失火改書 宣賜(만력 갑술년 사액 후 266년이 되는 기해년 헌종 5년(1839년) 화재로 소실되고 다시 고쳐 써서 베풀어줌)”라 적혀 있는데 구인당이 화재로 다시 지으니 만력 갑술년, 즉 선조 7년(1574년)에 현판을 다시 써주었다는 것으로 추사 김정희 글씨이며 안쪽 구인당 현판은 한석봉 글씨이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그런데 강당 마루 안쪽으로 또 하나의 옥산서원 현판이 걸려있다. 2개의 현판이 있는 셈인데 안쪽의 현판은 구인당이 화재로 소실되어 사액 당시 받았던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글씨를 다시 되살려 모각하였다는 것으로 현판 왼쪽 여백에 ‘옛 글씨를 베껴 써서 만들어 걸었다’고 舊額摹揭(구액모게)라 써 놓았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구인당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면 좌우로 동재, 서재가 있고 맞은편에 누각 무변루가 있어 네모꼴 마당에 한 치의 여유나 낭비가 없어 보인다. 가운데에는 야간에 불을 밝히는 정료대가 서 있다. 누각에 올라 창틀을 활짝 열어젖히고 펼쳐지는 풍광을 보았으면 좋겠는데 올라갈 수 없어 아쉽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강당 뒤편에는 다시 몇 단의 축대를 올려 높인 지형에 사당 체인묘(體仁廟)가 있다. 사방에 담을 두르고 앞쪽에 내삼문을 달았으며 사당 옆으로는 제기 등을 보관하는 전사청이 있으며, 사당의 왼쪽 담 밖으로는 이언재 신도비, 오른쪽으로는 각종 어필이나 어서, 내사본 등을 보관하고 있는 경각(經閣)이 있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사당 담 밖 왼쪽에 있는 이언적 신도비각. 기대승의 글을 1577년(선조 10년)에 영의정 이산해 글씨로 써서 비석에 새겨 넣었으나 후에 망실되었기에 1586년(선조 19년)에 손엽이 다시 신도비를 쓴 것이 현재까지 전한다. 한번 망실된 터라 훼손을 막으려고 서원 안으로 옮겼다고 한다. 3m가 넘는 큰 비석인데 그때는 비석에도 색깔을 입혔는지 이수(머릿돌) 부분에 채색이 아직 뚜렷하게 남아 있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이언적의 적자와 서자, 양동파와 옥산파 이언적의 후사는 양자로 들인 이응인이 대(代)를 이은 양동파가 양동마을 본가 무첨당(無添堂)에서 계승하고 있으며 옥산서원도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언적을 유배지에서 7년간 시봉(侍奉)하고 그곳에서 숨을 거두자 고향까지 성심으로 운구하였으며, 부친의 관작 회복을 상소하거나 유문(遺文)을 정리하는 등 뛰어난 효심과 학행을 펼친 서자 이전인의 후손은 옥산파로 불리며 독락당(獨樂堂)에서 회재 이언적을 계승하며 유훈을 받들고 있다.
지난 세월 동안 서자의 적서차별에 따른 갈등과 크고 작은 충돌이 옥산서원에서도 있었다고 하며 1884년 비로소 옥산서원에서 서얼소통이 이루어져 점차 영남지역, 아니 전국의 서원들로 번져나갔다고 한다.
세계유산 2관왕이 된 옥산서원을 찾은 문화유산 답사회. 한국의 14번째 세계유산이 발표된 이래 9곳 서원을 찾는 크고 작은 답사 모임이 부쩍 늘었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옥산서원을 답사하고자 한다면 시간을 내어 양동마을의 무첨당과 옥산서원 앞 독락당도 돌아보면서 회재 이언적의 후손들이 유교국가 조선에서 강고하게 묶여 지냈던 적서차별의 뒷이야기에도 관심을 가져보면 좋을 듯하다.
그리하여 옥산파와 양동파의 이야기도 들어보면 비록 서얼소통은 하였으나 어쩌면 지금도 보이지 않는 거리감과 현실 인식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다. 뿐만 아니라 옥산서원 역사자료관과 독락당 유물관에서 각각 보존하고 있는 방대한 유물 자료들도 살펴보기를 권해드린다. 역사는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현재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