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9.05 13:57

붉은 바위산 골짜기를 굽이굽이 돌아서 신비로운 과거의 길을 달리는 느낌이었다. 룩소르에서 마주한 왕비의 계곡과 왕들의 계곡을 돌아 도착한 장례 신전이었으나 오히려 신비감이 더 가중되었다. 이집트 최초의 여왕인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례 신전이다. 외부에서는 전혀 계곡 안쪽의 느낌을 알 수 없는 신전의 모습이었으나, 그곳에 도착한 후 여성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룩소르 서안에 분묘들이 조성되기 이전 하트셉수트 여왕은 신비로움이 가득한 데이르 엘 바하리 골짜기에 거대 신전을 건축한다. 장례 신전은 룩소르 서안을 둘러싸고 있는 산골짜기 깊은 곳에 자리하여 셔틀을 타고 이동을 하였다. 셔틀로 이동하는 골짜기의 웅장함이 이 세상이 아닌 낯선 시간 속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거친 바위 표면이 그대로 드러난 절벽을 배경으로 3층의 규격을 맞춘 것 같은 테라스가 현대식 건물처럼 세워져 있다. 나일강 유역의 녹지대를 사이에 두고 하안 단구 바위산의 움푹 들어가 있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 주위의 바위산이 가림막이 되어 외부로부터의 시야를 막아주어 장례사원만의 독특한 분위기의 공간을 형성한다. 규격이 잘 짜인 테라스의 거대한 건물은 현대식 건물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모습이다.

바위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천혜의 지형적 특징을 지닌 신비로운 장소이다. 고고학자 요시무라 사쿠자는 보름날 달빛이 내리는 시간에 이곳을 찾으라고 권유한다. 이 특별한 장소에 달빛이 내리면 고대 이집트가 지닌 신비로운 세상을 만나는 환상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여왕의 장례사원은 절벽을 배경으로 최상의 입지 조건을 갖춘 잘 그려진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원이 자리하고 있는 그곳은 달빛이 아닌 태양 빛만으로도 충분히 고대의 어떤 시간 속으로 걸어가는 마음이 되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신전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걸어가는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이집트의 2월은 태양이 수직으로 내리고 있었다. 수천 년 전의 고대 이집트 왕실에서 남성들과 나란히 힘을 겨루었던 여왕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출구를 지나 긴 회랑을 마주한다. 미로처럼 회랑의 끝에 예기치 않은 길들이 이어지는 이집트 건축물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구조다. 열주마다 조각된 그림들에서 여왕이 지니고 있는 힘의 에너지를 만나는 느낌이 되었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강력한 이집트를 꿈꾸었던 여왕의 모습은 신전 곳곳에서 상상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림으로 남겨진 여왕의 모습은 당당한 체격으로 삼각요포를 두르고 가슴에는 폭이 넓은 장식과 가짜수염을 달고 팔짱을 끼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처럼 웅장한 장례사원을 만든 왕은 남성이라고 생각했으나, 히에로글리프를 해독한 샹폴리옹에 의하여 여성임이 밝혀졌다. 장례사원에 새겨진 왕의 카르투슈가 여성형임을 밝혀낸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여성이 왕으로 군림하기 위한 힘의 균형으로 남장이 필요하였던가 라는 생각을 한다.

​여왕의 아버지 투트모시스 1세는 영광의 제 19왕조를 세운 초인적인 힘을 지닌 파라오였다. 고왕조의 거대한 석조건물 시대가 지나고 정치기반이 자리를 잡아가던 중왕조 시기가 지나고 신왕조의 투트모시스 1세가 등극을 한다. 아버지 투트모시스 1세의 강력한 지도력을 잊지 못하던 하트셉수트 여왕은 남편인 투트모시스 2세가 사망하자 6살의 투트모시스 3세를 자신의 딸인 네페르라와 결혼 시켜 왕위를 옹립한다. 6살 어린 왕의 섭정이 되어 투트모시스 3세가 22세가 될 때까지 공동통치자로 강력한 정치력을 행사한 여왕이다.

이 시기 이집트의 왕위 계승권은 왕자가 아닌 제1왕녀에게 있었다. 제1왕녀와 결혼을 하는 왕족이 왕위를 계승하는 특이한 세습제도이다. 제 1왕녀인 하트셉수트는 아버지의 아들과 결혼을 하였다. 강력한 아버지를 보며 성장한 하트셉수트 여왕은 병약한 투트모시스 2세 옆에서 왕권을 보좌하였다. 14년의 재위 기간으로 투트모시스 2세가 사망을 하자 어린 왕의 후견인으로 실질적인 통치를 시작한다.

투트모시스 3세는 제1왕비가 아닌 여성의 이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여왕의 등극처럼 화려하게 떠 오른 것이 아니다. 투트모시스 3세의 후견인으로 섭정의 지위를 차지한 후 서서히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하였다. 무대 뒤에서 떠오른 그녀는 홍해와 지중해를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교역선까지 운행하면서 이집트 경제에 풍요를 부여하는 시기를 열어간다. 여성이 지닌 섬세함과 아버지의 모습에서 이어받은 능력이 화려한 통치권자의 모습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시기였다.

테라스에서 신전 아래 펼쳐진 넓은 계곡의 지형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넓은 평지에도 찬란한 햇빛이 내리고 있었다. 신전 곳곳에는 아버지 투트모시스 1세를 찬양하는 기록들이 남겨져 있었다. 그녀가 아버지의 위대한 모습을 닮고자 노력하였던 흔적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아프리카에 위치하였으나 흑인도, 백인도, 동양인도 아니었던 이집트인들처럼 왕도, 왕비도 아닌 한 사람의 여인으로 스스로 자리매김을 하였던 강력한 여왕으로 남겨진 여성이다.

카르낙 신전에도 여왕의 장례 신전을 건축할 때 건축 자재를 옮기는 내용이 히에르글리프로 남겨져 있다고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투트모시스 3세의 집권 후 22세가 되던 어느 날 무역선을 타고 출항한 이후 여왕에 관한 기록이 남겨지지 않은 채 역사에서 사라졌다 한다. 장례사원 열주에 조각된 여왕의 모습들도 거의 지워져있는데 그녀의 공동통치자였던 투트모시스 3세가 지웠다는 추측이다.

투트모시스 3세는 이집트의 나폴레옹으로 알려질 만큼 그녀 사후에 절대 권력으로 17번이나 대외원정을 해서 이집트 영토를 넓힌 영웅적인 왕이다. 6세에 왕으로 등극한 후 22세가 될 때까지 하트셉수트 여왕이 실질적인 통치를 하고 외부 세력을 향한 견제의 힘은 투트모시스 3세가 지니는 이중의 구조였으나, 성인이 된 투트모시스 3세가 하트셉수트 여왕에게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다고 고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투트모시스 3세가 22세가 되는 시기에는 여왕의 딸인 네페르라도 이미 사망한 시기였다.

신비로운 모습을 지닌 여왕의 장례 신전은 매우 특별한 느낌으로 달빛 내린 사원의 모습과 함께 그녀를 향한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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