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10.30 14:51

여섯 번째 서원,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우리나라 14번째 세계유산 ‘조선의 서원 9곳’ 중 여섯 번째는 안동의 병산서원이다. 전국에서 모두 9개의 서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안동에만 도산과 병산 두 곳이다. 안동사람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며 ‘朝鮮人才(조선인재) 半多嶺南(반다영남) 嶺南人才(영남인재) 半多安東(반다안동)’이란 옛 말이 허언(虛言)은 아닌 듯하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은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모셔진 퇴계 이황의 제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 1542~1607)과 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으로 낙동강이 화산(花山 : 꽃뫼)을 S자로 감돌아 흐르는 안동 하회마을과는 산 너머 반대쪽에 있다.

서애 류성룡은 학봉 김성일과 함께 도산의 양대 제자로 꼽히는데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위패를 모실 때 좌우에 류성룡과 김성일을 함께 모시기로 하면서 누구를 동쪽, 즉 더 상위(上位)에 두느냐를 두고 400년 넘게 갈등을 빚어 병호시비(屛虎是非)의 한 축, 즉 병(屛)이 병산서원(屛山書院)이다.

이 병호시비는 지난 2009년, 나이가 4살 위로 경상관찰사를 지낸 학봉보다 영의정을 한 서애 선생을 서열이 높다고 보고 좌측에 모시기로 양 가문이 합의하므로써 400년 시비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한다. 참으로 양보없이 대립하였던 양반 문화의 한 단면이었다.

원래 풍산현에 풍산 류씨 교육기관인 풍악서당(豊岳書堂)이 있었는데 1572년에 서애 류성룡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겨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병화(兵禍)로 불에 탔으나 류성룡 사후(死後), 1614년 그의 제자 정경세 등이 스승의 업적과 학덕을 기려 사당 존덕사(尊德祀)를 짓고 서애 류성룡을 모시고 향사를 올리니 서원이 되었다.

1629년에는 서애의 셋째아들 수암 류진을 배향하였으며, 그 후 1863년(철종 14)에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액을 받았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철폐에도 폐철되지 않았으며, 이미 소개한 소수서원, 도산서원, 도동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5대서원으로 손꼽히다가 이번에 9곳의 서원으로 세계유산 등재에 포함되었다.

병산서원 전경. 솟을대문 형태의 외삼문인 정문 복례문(復禮門)이 정면에 보이고 그 뒤로 커다란 지붕의 누각 만대루(晩對樓)가 보인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서애 선생이 생전에 배롱나무를 좋아했는지 이곳 병산서원 앞에는 제법 많은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배롱나무는 껍질이 없는지라 나목(裸木)처럼 보이는 까닭에 여인네들이 있는 안채에는 잘 심지 않고 바깥마당에 심어 사내들의 숨김없는 강직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정문 복례문(復禮門). 논어(論語)에 나오는 공자 말씀 ‘인(仁)은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구절에서 따 왔는데 ‘예(禮)를 갖춘다’는 뜻으로 정문을 들어서는 선비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이름으로 보인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 규모의 거대한 누각 만대루(晩對樓)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여기서 만대(晩對)는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에 나오는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즉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에서 빌려 왔다고 하니 이곳에서 달맞이가 제격이라거나 병풍같이 푸른 산기운에 취해 늦도록 편하게 마주 대할만하다고 해석하는데 참으로 멋진 표현이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그러나 얼마 전부터 만대루는 오를 수 없다. 우리나라 서원의 누각 가운데 가장 크다고 알려진 만대루는 그 위에 올라 발아래 그림처럼 펼쳐져 유유히 흘러가는 구비진 낙동강 물줄기와 물에 어리는 건너편 병산(屛山) 산자락의 자태를 감상하는 것이 그렇게 좋다고들 하는데 이젠 아무도 그 위에 올라 싯귀를 읊조리며 풍광을 바라보는건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아쉬운 일이다.


만대루 누하(樓下) 진입으로 계단을 올라서면 정면이 강당 입교당(立敎堂)으로 정면 5칸중 가운데 3칸은 교실 격인 대청마루이며 좌, 우로는 각각 교사와 원장이 기거하던 곳이다. 그 앞으로 마주보는 대칭 건물은 유생들 기숙사 격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이니 이곳이 병산서원의 핵심인 강학(講學)공간이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낮은 누각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서서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서야 비로소 배움터로 들어서는 것이니 몸과 마음을 한번 더 추스르고 들어오라는 의미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가르치는 터로 들어오는 입(入)이 아니라 가르침을 세우는 입(立)이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강당 뒤편으로는 사당 존덕사(尊德祀)를 두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갖추었다. 가파른 계단위로 단청을 칠한 내삼문에는 태극무늬와 함께 기둥초석에는 팔괘가 새겨져 눈길을 끈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제향(祭享)공간인 사당 좌측으로는 각종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향사때 제수를 마련하거나 관련 집기등을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전사청 아래쪽으로는 담 밖으로 서원의 살림집인 고직사(庫直舍)가 있다.


이렇듯 병산서원은 화회마을 너머 반대편, 낙동강을 바라보는 산자락에 자리 잡은채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으로 복잡한 건물구조나 동선을 배제하고 매우 간략하고 기본적인 구조만을 갖춘 모습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만대루를 비롯한 목조건물의 뛰어난 구조와 주위 환경의 빼어남을 칭송하는 곳인데 만대루 출입금지 하나로 모든 것이 생략되었다. 오래된 목조건물의 보존을 위한 조치라고하나 아쉽기만 한데 모름지기 건물은 사람이 사용하면서 꾸준히 손질하고 보수해야 더 오래간다는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내 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