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2.28 11:10

이집트를 다녀왔다.
살아생전 죽기 전에 가봐야겠다고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았던 이집트, 최소한 인류의 4대 문명지는 직접 가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긴 목마름 끝에 '코로나 19' 감염병이 조금씩 늘어나던 2월 초에 이집트로 떠났다. 비용절감을 위해 직항이 아닌 터키 이스탄불 경유 7박 9일 일정으로 다녀왔는데 덕분에 이스탄불 하루 투어는 보너스였으니 여행은 즐기기 나름인 듯. 다만 밤 비행기, 새벽 비행기로 이어지는 일정에 몸이 고된 건 부득이한 일이었다.

ㅇ 이집트(EGYPT)
이집트는 아프리카 북단에 위치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문명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북쪽으로는 지중해를 사이로 그리스, 터키와 마주하며 이탈리아 등 유럽과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홍해를 사이로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 등 중동국가들이 인접하며 나머지 서쪽과 남쪽은 리비아, 알제리, 수단,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과 이웃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이집트 아랍 공화국(Arab Republic of Egypt)'이며 면적은 남한의 10배쯤, 인구는 최근 공식 인구 1억을 넘었다고 하는데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인지라 나일강 줄기와 하류 삼각주를 이루는 지역에 모여 살고 있다. 국민소득은 3천 불 조금 넘는 수준인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지녔던 나라 치고는 작금의 현실 경제가 매우 빈곤한 실정이다.

한자로는 애급(埃及)이라고 하는데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이집트를 떠나는 과정을 기록한 '출애급기(出埃及記)'에서 애급이 이집트를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출애굽기'라고 한다.)

ㅇ 이집트 역사
이집트를 답사하기 위해서는 이집트 역사와 문화를 알면 유익한데 BC4000년 남짓부터 통칭 육천 년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하여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최소한의 이해를 위한 필요한 정도만 정리해본다.

이집트 내륙을 관통하는 6437Km의 나일강은 이집트 문명의 젖줄이다.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시작하는 백나일과 에티오피아 타나 호수에서 시작하는 청나일이 수단의 하르튬에서 만나 북반부에서는 드물게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나일강은 상류에서의 폭우를 가득 담아 하류까지 내려오면서 해마다 9~10월이면 범람하지만 물이 빠지고 나면 상류에서 가져온 기름진 황토가 남아 농사짓기에 최적의 조건이 된다.

나일강의 홍수가 이집트에게는 축복인 셈이며, 일찍이 BC5000~BC3500년 즈음에 정착 농경문화를 누리게 된 것도 이러한 자연환경에 따른 것이다. BC3000년경 상, 하 이집트를 통일한 나르메르 왕의 초기 왕조부터 BC30년 멸망할 때까지의 이집트역 사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존재했던 왕국시대와 왕의 힘이 약해지는 중간기가 번갈아 나타나게 되니 아래 도표와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선왕조 시대에 해당하는 BC3300년경에는 이미 상형문자를 발명하였으며,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나르메르 왕의 초기 왕조시대를 거쳐 고왕국 시대에는 조세르 왕이 수도 멤피스에서 멀지 않은 사카라에 왕릉 격인 피라미드를 처음 짓게 되니 계단식 피라미드가 그것으로 피라미드의 효시라 부른다.  이어서 피라미드는 상부가 한번 꺾여 굽어지는 굴절 피라미드를 거쳐 대피라미드로 부르는 기자 지구 쿠푸왕 피라미드까지 이어진다.

고왕국시대에 해당하는 BC2500년경에 이집트는 이미 수학, 기하학, 천문학이 발달하고 지금 우리가 쓰는 달력과 비슷하게 1년을 365일로 하는 달력을 발명하였으니 이후 로마의 카이사르가 만든 율리우스력을 거쳐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정교하게 정리한 지금의 달력 시스템이 된 것이다.

이후 1중간기라 부르는 대혼란과 파괴의 시기를 거쳐 중왕국시대에 이르러서 이집트는 파피루스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수도를 나일강 중류인 테베(룩소르)로 이동하게 되고, 고왕국시대의 피라미드 대신 거대한 신전(무덤)들을 짓게 되는데 우리가 열주(列柱)라고 부르는 줄지어 늘어선 거대한 기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태양 숭배의 상징으로 태양탑이라고 하는 오벨리스크가 나타난 것도 이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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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왕국의 부흥은 외국인 왕조인 힉소스가 나타나면서 다시 혼란기로 빠져드는데 철제 무기와 말, 전차를 앞세운 힉소스인들은 이집트를 정복하지만 문화적으로는 결국 이집트에 동화되었으며 끝내 그들을 몰아내고 신왕국 시대를 맞은 이집트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무덤과 제사를 행하는 장제전을 분리하여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을 만들었으며, 중왕국 들어 시작된 대신전들을 많이 짓게 되니 신왕국시대를 대신전 시대라고도 부른다. 특히 람세스 2세는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아부심벨 등 대신전들이 이때에 지어진 것들이다.

그 옛날에도 왕들의 무덤에 대한 도굴 문제가 심각했는지 대부분의 계곡 무덤들은 이미 다 도굴이 되었으며 이를 걱정하여 20왕조 람세스 9세는 파라오들 무덤에 대한 실태조사를 벌여 남아있는 파라오들 미라를 다시 손질한 후 몰래 숨기게 된다. 이후 몇 곳에서 이들이 재발굴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1922년에는 훼손되지 않은 소년 파라오 투탕카몬의 무덤이 발굴되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왕국 시대는 람세스 2세의 아들 메르넵타 이후 불과 27년간 5명의 파라오가 즉위하며 혼란과 퇴락을 이어가다가 뒤를 이어 나타난 세트나크테가 20왕조를 열었고 그의 아들 람세스 3세가 비교적 안정된 통치를 보였으나 람세스 4세 ~ 람세스 11세 이후 급격하게 약해지면서 국운이 기울어 20왕조를 끝으로 상, 하로 분열되었고 급기야는 흑인 왕조가 들어서 흑인 파라오가 나타났으며 페르시아의 침공을 받아 속국이 되거나 독립을 시도하는 반독립국가 형태가 난립한 27~31왕조를 거쳐 BC332년을 이집트 왕국의 멸망으로 기록한다.

BC332년,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점령하에 있던 이집트를 손쉽게 접수한다. 그러나 BC323년 알렉산더가 급사하자 그의 장군들이 점령지를 나눠 갖게 되는데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파라오가 되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열었으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클레오파트라(7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8대손이자 왕조의 거의 마지막 여왕으로 로마 황제들과 사랑의 줄타기 외교를 벌이던 그녀를 마지막으로 이집트를 이어오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막을 내리고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알렉산더 점령 이후 신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동방이 가미된 그리스 문명이 이집트 문화와 만나 꽃을 피운 이 시기를 헬레니즘 시대라고 하며 이후 로마 제국의 지배로 이어지게 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집트 왕국의 왕비(여왕)들은 사실 검은 머리 여자들이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후부터 금발머리 여자들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스스로를 이집트 파라오라 부르며 통치하였으나 로마 지배시대에 이집트는 식민지에 불과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에 따라 이집트의 기독교화가 이루어진다. 모세가 십계를 받은 시나이산이 이집트 영토 시나이 반도 남쪽에 있음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슬람 국가가 된 이집트에 지금도 남아있는 기독교는 콥트교로 불리고 있다.

콥트교를 중심으로 기독교화된 이집트에 640년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이슬람교 아랍인이 몰려온다. 동, 서로마로 나뉜 동로마 제국의 총독이 지키던 이집트는 손쉽게 무너지는데 동로마에 반발하던 콥트교(기독교)의 이슬람 지원이 일조한 결과이다.

이집트를 차지한 아랍인들은 수도를 알렉산드리아에서 푸스타트(구 카이로)로 옮기고 부족 간 왕조를 놓고 경쟁하는 가운데 십자군 전쟁과 몽골의 침략 등을 겪다가 오스만 터키의 투르크족에게 정복당하게 된다. 이후 1799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하여 접수하자 영국이 개입하여 저지되고 오스만 투르크 출신이 다시 이집트 왕국을 장악한다.

이즈음에 수에즈 운하가 건설(1869년)되었고 영국령 이집트 왕국으로 이어지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령을 벗어나 독립(1922년) 왕국이 되었지만 1952년 나세르가 쿠테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선포하였으니 따지고 보면 무려 2300여 년 만에 이집트 출신 국가지도자가 재탄생한 것이다.

나세르는 이후 친소련 정책을 견지하면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소련의 지원하 아스완 하이 댐의 건설, 세 차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벌이면서 중동을 화약고로 부르게 만들었으며 이후 권력은 사다트에게 넘어가 친미정책으로 전환하고 이스라엘과 평화정책을 맺었으나 그는 반대세력에 암살을 당하게 된다.

이후 권력을 장악한 무바라크는 30년 독재 끝에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재스민 혁명으로 촉발된 이집트 민주화 혁명으로 쫓겨났으며(2020년 2월 25일, 92세로 사망) 민선 대통령 재임 이후 혼란기를 거치던 중 2013년 다시 군부가 쿠테타를 일으켜 현재는 엘시시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다.

ㅇ 이집트 신화
이탈리아나 그리스를 여행하려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알고 가면 유익하듯이 이집트 역시 복잡하고 유구한 신화가 있으며 그 간략한 줄거리를 이해하면 이집트 답사여행이 한층 흥미롭고 유적들의 설명에 대한 이해가 쉬워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 된다.

이집트 신화는 오시리스와 이시스 신화가 중심이다. 즉, 창조신 아툼의 자녀 게브와 누트가 네 자녀를 두었는데 오시리스(남), 이시스(여), 세트(남), 네프티스(여)였다. 이들은 각각 결혼하여 짝이 되었는데 왕과 왕비가 된 오시리스와 이시스는 백성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게 되지만 이를 시기한 동생 세트는 형을 살해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 부인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시신을 찾아내어 마법으로 살려낸 후 자식을 갖게 되니 그가 호루스이다.

일설에는 조각내어 버린 오시리스 시신을 찾았으나 남성의 거시기는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하니 이들의 잉태 설화 역시 성령으로 잉태하였다는 말인지? 아무튼 그렇게 태어난 아들 호루스는 삼촌 세트를 살해하여 아버지 원수를 갚고 왕이 된다. 이시스는 오시리스를 위하여 신전을 지었으며 오시리스는 지하세계의 왕이 되어 죽은 자 들을 심판하게 된다.

이집트 파라오들은 호루스의 화신, 즉 '살아있는 호루스'로 숭배되었으며 부인 이시스는 그리스 최고의 여신 헤라 또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대지의 여신 테메테르와 동일시하고 있으며 최고의 미녀로, 현모양처로 이시스를 섬기고 있다. 또한 호루스의 아내 하토르는 사랑의 여신으로 숭배되는데 때로는 하토르와 이시스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동일체로 혼동되기도 한다. 즉, 하토르가 이시스이며 이시스가 하토르이기도 하다.

이집트 신의 계보. 국립중앙박물관 3층 '세계문화관 이집트실'/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이집트인들은 세상의 초자연적인 힘을 신으로 숭배하였는데 둘 이상의 신을 합쳐 하나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 예로 상이집트의 신들의 왕 아문(Amun)이 하이집트의 태양신 레(Re)와 결합하여 전체를 지배하는 '아문-레(Amun-Re)'가 탄생했다. 처음에는 동물 이미지로 신들을 표현하다가 이후 남성이나 여성의 형태로 나타내었으며, 나중에는 남성이나 여성의 몸에 동물의 머리를 한 형태가 되기도 하였다.

이집트 신화는 이 이시스와 오시리스, 호루스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밖에도 다양하고 많은 신들의 이름과 그 생긴 모양이 복잡하지만 나중에 필요할 때 하나씩 설명하기로 한다.

죽어서 저승을 다스리게 된 오시리스. 왼손의 갈고리 모양 지팡이는 죽음을, 오른손 도리깨는 생산을 의미한다. 국립중앙박물관 3층 '세계문화관 이집트실'/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호루스를 안고 있는 이시스. 죽은 오시리스를 살려내 아들 호루스를 얻었다. 현모양처의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 3층 '세계문화관 이집트실'/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하토르가 있는 거울. 손잡이에 미의 여신 하토르를 새겼다. 국립중앙박물관 3층 '세계문화관 이집트실'/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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