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3.10 15:27

이집트 문화유산 답사 두 번째 순서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신혼여행지였다는 필레 신전(Philae Temple)이다.

아스완으로부터 290Km 상류에 있는 아부심벨 신전이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통째로 옮긴 것처럼 필레신전은 아스완 근처의 필레섬에 있었는데, 1898~1912년 아스완 로우 댐 건설로 1년에 몇 달은 신전 기둥까지 물에 잠긴 채 상부만 보이는 채로 방치되다가 1960년대에 기존의 로우 댐보다 훨씬 더 큰 하이 댐이 건설되려 하자 인류의 문화유적이 사라질 것을 염려한 범국제적 노력으로 근처의 조금 더 높은 바위섬을 깎고 파낸 후 필레섬에 있던 신전을 통째로 옮겨 1980년에 준공한 것이며 명칭은 그대로 필레 신전으로 부르고 있다.

필레신전은 아스완 로우 댐과 하이 댐 중간의 필레섬에 있었는데, 먼저 건설된 로우 댐의 영향으로 일부가 물에 잠기게 되었으며 이후 다시 하이 댐 건설로 아예 사라지게 되자 가까운 북쪽의 아길키아 섬으로 옮겨 지었다

ㅇ 필레 신전(Philae Temple)

필레 신전은 오시리스의 부인이자 호루스의 어머니 이시스를 모신 신전으로 후기 왕조인 30 왕조를 시작한 넥타네보 1세(BC 380~BC362 재위)가 세운 고대 이집트 왕조시대 마지막 신전이다. 이곳에는 BC394년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마지막으로 쓰인 비석이 남아 있는데 왕조 멸망 후 이집트를 통치한 로마제국의 기독교화로 이집트 신전의 명맥이 끊어지게 된다.

그 옛날에는 나일강에 댐이 없었으니 카이사르와 연인이 된 클레오파트라(7세)가 카이로에서 이곳 필레 섬까지 배를 타고 신혼여행을 왔다고 전해지는데 그만큼 이 섬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나일강의 진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아스완 로우 댐에서 작은 배를 타고 10여분 들어가면 필레신전을 옮겨놓은 아길키아 섬에 내려 신전을 둘러볼 수 있다.

아스완 로우 댐에서 작은 배를 타고 십 분쯤 들어가니 필레 신전이 보인다/ 사진 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필레 신전 전경. 오른쪽 1 탑문과 왼쪽 2 탑문 사이의 건물은 이시스가 호루스를 낳은 곳으로 전해지는 마미시(mamissi)이다. 앞으로는 나일강으로 내려오는 계단이 보이는데 수위(水位)를 측정하는 표식(nilometer)이 있다고 한다/ 사진 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배에서 내려 신전으로 다가가면 기둥이 길게 늘어선 열주(列柱)가 좌우로 서있는데 지형상 문제인지 정확하게 중앙에서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지는 않았다. 오른쪽 사진은 탑문 앞에서 뒤돌아본 열주(列柱)의 모습으로 장엄하다/ 사진 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신전 입구 좌, 우로 늘어선 열주는 왼쪽보다 오른쪽이 짧아서 미완성인 듯 보이며 연꽃 문양을 기둥머리로 하고 기둥들 중간 아래가 거뭇거뭇한 것은 옮기기 전 물에 잠겨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진 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필레 신전의 1 탑문.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형 구도이며 중앙 입구 외에 왼쪽 벽면 중앙에는 마미시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있다. 탑문의 외벽에 새겨진 조각들은 대부분 이시스와 호루스인데, 특히 왼쪽은 대부분 그림이 정으로 쪼아 훼손되었으며 입구 좌우로 놓인 석수(石獸) 2마리도 얼굴이 훼손되었는데 로마제국 하 기독교인들이었던 콥트교도들의 소행이라고 한다/ 사진 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이시스가 호루스를 낳았다는 마미시 내부. 벽면은 부분적으로 훼손되기는 했지만 이시스와 호루스 이야기를 그린 벽화가 가득하다/ 사진 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파피루스에 숨은 호루스/ 사진 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호루스를 무릎에 안고 젖을 먹이는 이시스. 아기 예수를 안고 젖을 먹이는 마리아 상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사진 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1 탑문을 들어서면 2 탑문이 보이고 그 사이 공간은 개방된 형태이나 좌우로는 거대한 기둥을 세웠다. 왼쪽의 7개 기둥머리에는 연꽃문양 받침 위에 하토르 여신의 얼굴을 새겼는데 대부분 훼손되었다. 기둥 7개는 호루스가 칠삭둥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진 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2 탑문을 들어서면 이시스 신전이다. 신전 입구 지붕을 받치는 기둥들은 연꽃과 파피루스 문양을 기둥머리로 하고 있는데 이곳은 생각보다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었다/ 사진 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2 탑문 안으로 들어가 몇 개의 공간을 지나면 가장 안쪽에는 이시스 신전의 성소(聖所)가 있다. 벽면은 이시스와 호루스 관련 벽화가 가득하며 중앙에는 받침대로 보이는 돌이 남아있는데 그 위에 배 모양의 가마와 이시스 신상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 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성소 벽면의 큰 벽화는 파라오의 공물을 받는 남편 오시리스를 이시스가 날개로 감싸 보호하고 있는 장면이다/ 사진 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이시스가 선채로 아들 호루스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모습인데, 얼굴이 훼손되었다. 호루스가 들고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 부활을 상징하는 열쇠 '앙크(Ankh)'인데 기독교의 십자가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사진 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이시스 신전은 이집트 왕국 멸망 후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고,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인정하게 되면서 한때 교회로 바뀌게 되는데, 550년 동로마제국의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신전을 폐쇄하고 신관을 고문하였으며 이때 교회로 썼던 흔적, 콥트교의 둥근 십자가 표시가 신전 곳곳에 새겨져 있다. (사진의 붉은 원 표시)/ 사진 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세워진 필레신전은 이집트 고대 왕조시대 마지막 신전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거쳐 로마시대로 건너가면서 훼손되거나 기독교 등 이교도들에 의해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로마 제국 필요에 의하여 별도 상륙 시설과 건물들이 지어지고 황제들을 위한 신전도 짓게 된다.

필레 신전 주변에는 신전을 처음 지은 넥타네보의 키오스크(kiosk, 정자)는 물론, 신전을 폐쇄한 동로마 제국 트라야누스 황제의 키오스크(Trajan's Kiosk), 아우구스투스 신전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쪽 해안가에 단독 건물처럼 남아있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키오스크만이 남아 '황제의 정자'로 불리며 답방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로마 제국 트라야누스 황제 키오스크(Trajan's Kiosk, 정자). 건물은 기둥만 남았지만 균형감이 뛰어나고 위엄이 있는 모습이다. 전망이 빼어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 사진을 찍는다/ 사진 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ㅇ 클레오파트라(Cleopatra Ⅶ)와 로마 황제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이 '그녀의 코가 1cm만 낮았어도 세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녀가 바로 클레오파트라(정확히는 클레오파트라 7세, BC69~BC30년)이다. 그녀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점령하였으나 얼마 후 급사하자 그의 휘하 장수들이 점령지를 나누어 갖게 되어 이집트에 왕조를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8대손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약 290년간 지속되었는데 송덕비 로제타 스톤을 세웠던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딸과 결혼 동맹을 맺으니 그녀가 클레오파트라 1세이며, 근친결혼과 배신, 가족들 간 권력투쟁 등 복잡한 승계를 거쳐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여동생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혼인하여 공동 왕위를 갖추었다가 서로 반목하여 대결하게 되자 로마의 카이사르가 이들을 소환하여 클레오파트라 7세의 왕위를 인정하면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7세는 연인이 된다. 이때 두 사람이 배를 타고 필레섬에 왔다는 것이다.

로마에 반발하던 오빠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죽고 어린 동생인 14세와 공동 왕위를 갖춘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으니 카이사리온이다. 당시 20세의 클레오파트라는 정권과 국가를 지키려고 53세의 노회 한 카이사르의 아들을 낳고 후계자 인정을 요구하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로마는 혼돈에 빠지게 되고 이집트로 돌아온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자신과 아들의 안위를 위해 남편이자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죽인다.

카이사르 후계로 믿었던 안토니우스는 18살 애송이 옥타비아누스가 지명된 것을 알고 일단 레피두스를 포함한 3두 정치체제를 받아들이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는 다시 안토니우스에게 접근하여 관계를 맺으니 아들, 딸 쌍둥이를 낳게 되며, 안토니우스는 아내 옥타비아(옥타비아누스 여동생)와 이혼하고 이집트로 건너가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한 뒤 아들 하나를 더 낳는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와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삼아 자신과 공동 왕위를 만드는데 5년 후 남편 안토니우스는 그리스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여 자결하고 만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옥타비아누스에게 접근하지만 이미 42세로 나이가 지났으니 거절당하고 말며 결국 코브라 바구니에 손을 넣어 자결하고 만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와의 아들 카이사리온, 즉 프톨레마이오스 15세를 죽이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며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2명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아마도 죽였을 것으로 본다.

미색(美色)으로 남자들을 홀리는 치명적인 팜므파탈로 영웅들을 현혹하고 세계 역사를 뒤흔든 것으로 인식되는 클레오파트라 7세는 로마의 두 영웅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사랑하고 결국 비극적 종말을 맞았지만, 사실은 이집트 여왕으로서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정권을 안위를 위하여 고심하던 정치가이자 지략가였던 것이다.

[계속]

내 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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