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문화유산 답사 두 번째 순서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신혼여행지였다는 필레 신전(Philae Temple)이다.
아스완으로부터 290Km 상류에 있는 아부심벨 신전이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통째로 옮긴 것처럼 필레신전은 아스완 근처의 필레섬에 있었는데, 1898~1912년 아스완 로우 댐 건설로 1년에 몇 달은 신전 기둥까지 물에 잠긴 채 상부만 보이는 채로 방치되다가 1960년대에 기존의 로우 댐보다 훨씬 더 큰 하이 댐이 건설되려 하자 인류의 문화유적이 사라질 것을 염려한 범국제적 노력으로 근처의 조금 더 높은 바위섬을 깎고 파낸 후 필레섬에 있던 신전을 통째로 옮겨 1980년에 준공한 것이며 명칭은 그대로 필레 신전으로 부르고 있다.
ㅇ 필레 신전(Philae Temple)
필레 신전은 오시리스의 부인이자 호루스의 어머니 이시스를 모신 신전으로 후기 왕조인 30 왕조를 시작한 넥타네보 1세(BC 380~BC362 재위)가 세운 고대 이집트 왕조시대 마지막 신전이다. 이곳에는 BC394년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마지막으로 쓰인 비석이 남아 있는데 왕조 멸망 후 이집트를 통치한 로마제국의 기독교화로 이집트 신전의 명맥이 끊어지게 된다.
그 옛날에는 나일강에 댐이 없었으니 카이사르와 연인이 된 클레오파트라(7세)가 카이로에서 이곳 필레 섬까지 배를 타고 신혼여행을 왔다고 전해지는데 그만큼 이 섬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나일강의 진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아스완 로우 댐에서 작은 배를 타고 10여분 들어가면 필레신전을 옮겨놓은 아길키아 섬에 내려 신전을 둘러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세워진 필레신전은 이집트 고대 왕조시대 마지막 신전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거쳐 로마시대로 건너가면서 훼손되거나 기독교 등 이교도들에 의해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로마 제국 필요에 의하여 별도 상륙 시설과 건물들이 지어지고 황제들을 위한 신전도 짓게 된다.
필레 신전 주변에는 신전을 처음 지은 넥타네보의 키오스크(kiosk, 정자)는 물론, 신전을 폐쇄한 동로마 제국 트라야누스 황제의 키오스크(Trajan's Kiosk), 아우구스투스 신전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쪽 해안가에 단독 건물처럼 남아있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키오스크만이 남아 '황제의 정자'로 불리며 답방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ㅇ 클레오파트라(Cleopatra Ⅶ)와 로마 황제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이 '그녀의 코가 1cm만 낮았어도 세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녀가 바로 클레오파트라(정확히는 클레오파트라 7세, BC69~BC30년)이다. 그녀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점령하였으나 얼마 후 급사하자 그의 휘하 장수들이 점령지를 나누어 갖게 되어 이집트에 왕조를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8대손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약 290년간 지속되었는데 송덕비 로제타 스톤을 세웠던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딸과 결혼 동맹을 맺으니 그녀가 클레오파트라 1세이며, 근친결혼과 배신, 가족들 간 권력투쟁 등 복잡한 승계를 거쳐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여동생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혼인하여 공동 왕위를 갖추었다가 서로 반목하여 대결하게 되자 로마의 카이사르가 이들을 소환하여 클레오파트라 7세의 왕위를 인정하면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7세는 연인이 된다. 이때 두 사람이 배를 타고 필레섬에 왔다는 것이다.
로마에 반발하던 오빠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죽고 어린 동생인 14세와 공동 왕위를 갖춘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으니 카이사리온이다. 당시 20세의 클레오파트라는 정권과 국가를 지키려고 53세의 노회 한 카이사르의 아들을 낳고 후계자 인정을 요구하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로마는 혼돈에 빠지게 되고 이집트로 돌아온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자신과 아들의 안위를 위해 남편이자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죽인다.
카이사르 후계로 믿었던 안토니우스는 18살 애송이 옥타비아누스가 지명된 것을 알고 일단 레피두스를 포함한 3두 정치체제를 받아들이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는 다시 안토니우스에게 접근하여 관계를 맺으니 아들, 딸 쌍둥이를 낳게 되며, 안토니우스는 아내 옥타비아(옥타비아누스 여동생)와 이혼하고 이집트로 건너가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한 뒤 아들 하나를 더 낳는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와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삼아 자신과 공동 왕위를 만드는데 5년 후 남편 안토니우스는 그리스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여 자결하고 만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옥타비아누스에게 접근하지만 이미 42세로 나이가 지났으니 거절당하고 말며 결국 코브라 바구니에 손을 넣어 자결하고 만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와의 아들 카이사리온, 즉 프톨레마이오스 15세를 죽이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며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2명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아마도 죽였을 것으로 본다.
미색(美色)으로 남자들을 홀리는 치명적인 팜므파탈로 영웅들을 현혹하고 세계 역사를 뒤흔든 것으로 인식되는 클레오파트라 7세는 로마의 두 영웅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사랑하고 결국 비극적 종말을 맞았지만, 사실은 이집트 여왕으로서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정권을 안위를 위하여 고심하던 정치가이자 지략가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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