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소르(Luxor), 우리나라의 경주(慶州) 같은 고도(古都)라고 하는데 경주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면 룩소르는 '세계 최대의 야외박물관' 또는 '백 개의 문(門)이 있는 도시'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 중왕국의 수도 테베(Thebes)의 일부였는데 BC1500년경에는 인구 1천만 명을 상회하는 최전성기를 누린 것으로 전해지며 호머의 일리아드에도 그 화려한 모습이 언급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그 유명한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 그리고 높이 솟은 오벨리스크 등이 남아있는데 로마 제국 이래 세계 각국이 앞다투어 많은 유물들을 가져갔음에도 불구하고 룩소르는 여전히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죽은 이들을 위한 무덤과 장제전이 모여있는 서안(西岸)을 둘러보고 이제는 살아있는 신(神)들의 동네인 룩소르 동안(東岸)으로 넘어와 카르나크 신전부터 답사해 본다.
ㅇ 카르나크 신전(Karnak Temple)
룩소르에서는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이 대표적인데 카르나크 신전은 룩소르 지방의 3신(身), 수호신 아몬과 아몬의 부인 무트 그리고 전쟁의 신 몬투를 모신 대신전으로 해마다 나일강이 범람하는 시기에 카르나크 신전의 신들을 배에 태워 옮기는 '오페트 축제'가 벌어지며 이때 룩소르 신전은 카르나크 신전의 보조역할이라고 한다. 그래서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은 약 3Km의 거리에 2000여 개의 스핑크스가 늘어선 스핑크스 로드라는 신성한 길로 연결되어있었다는데 현재 복원 중에 있다.
카르나크 신전은 중왕국 12 왕조의 창시자 아메넴헤트 1세의 아들 세누스레트 1세가 건축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룩소르를 수도로 삼았던 중왕국 파라오들은 카르나크 신전에 계속해서 새 건물이나 기념물 건축을 지원하였으며, 제2 중간기를 초래한 힉소스 인들의 침략으로 약탈, 파괴되었으나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등장한 신왕국 시대에는 또다시 대규모 건축이 이어진다.
특히 18 왕조는 해외 원정 전리품과 조공으로 받은 공물 등으로 재정이 넉넉하여 집중적으로 지원, 확장하였으니 앞서 둘러본 장제전의 주인공 하트셉수트 여왕과 이집트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한 것으로 알려진 아멘호테프 3세 때에 카르나크 신전의 대규모 확장공사가 있었으며 투탕카몬과 호렘헤브 때에 거의 완성되었고 19 왕조 람세스 2세에 이르러는 역대급 증축이 이루어진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까지도 계속 증축된 것으로 알려졌으니 약 1500년에 걸쳐서 약 30대의 파라오들이 건축에 참여한 셈이다.
이후 로마 제국 지배기에 기독교화되어 교회로 쓰이기도 하였으며 이슬람 시대에는 신전의 석재들을 마구 가져다 쓰면서 결국 몰락한 카르나크 신전은 19세기까지도 폐허로 남아있다가 1895년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통하여 오늘의 모습으로 재탄생하였으니 아몬 대신전으로도 불리는 카르나크 신전은 현재 남아있는 이집트 신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특히 높이 15m와 23m의 거대한 기둥들 134개가 줄지어 늘어선 대열주(大列柱)와 오벨리스크로 유명한 룩소르의 상징이기도 하다.
카르나크 신전은 동서로 500~600m, 남북으로 2Km의 규모인데 왼쪽(북쪽)에 전쟁의 신 몬투 신전(아래 사진 A)이 중앙의 아몬 신전과 붙어 있으며 아몬의 부인 무트 신전(아래 사진 B)은 동쪽(남쪽)으로 200m 남짓 떨어져 있다. 3개의 신전은 남북으로 배열된 구조이나 아몬 신전은 동서로 배치되어 배를 타고 도착하는 나일강 방향이 입구가 되며 스핑크스가 도열한 입구를 지나 1 탑문부터 6 탑문까지 동쪽으로 직선을 이루고 있다. 7 탑문부터 10 탑문까지는 남북으로 지어져 직각을 이루는데 아직도 복원공사 중인지라 개방하지 않고 있었다.
람세스 2세가 완성한 2 탑문을 들어서면 대열주전(Great Hypostyle Hall)인데 중앙에는 높이 23m의 대형 기둥이 6개씩 2줄로 서 있으며 좌우 바깥쪽으로 높이 15m의 기둥 122개, 모두 134개의 대형 기둥들이 가로 세로 줄 맞추어 서 있다. 중앙 기둥은 아멘호테프 3세가, 나머지 기둥들은 19 왕조 세티 1세가 시작하여 람세스 2세 때까지 부자(父子)가 완성한 것인데 기둥의 높이차를 이용하여 햇살이 들어오는 채광창(clerestory)를 설치했다. 기둥마다에는 여러 신들과 파라오들의 이야기를 조각으로 새겼으며 다양한 문양과 상형문자들이 모두 채색이 되었던 듯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카르나크 신전은 수호신 아몬(Amun)을 모신 대신전답게 거대한 기둥마다 왕관 위에 길쭉한 기둥 모양이 2개 나란히 서 있는 아문왕관을 쓴 아몬신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기둥뿐 아니라 벽화마다 여러 곳에 아몬신을 새겼으며 일부 훼손되기는 했으나 아몬신 석상도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아문신을 모든 신중의 최고 수호신으로 공경한 것이다.
거대한 석조 기둥의 크기와 높이에 감탄하고 134개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에 대한 놀라움으로 대열주전(Great Hypostyle Hall)을 돌아보고 나와서 3 탑문을 향하면 높이 솟아있는 뾰족한 석조물, 오벨리스크 2개가 보인다. 앞쪽은 3 탑문을 지나 있는 투트모세 1세의 것이며, 조금 뒤로 보이는 것은 4 탑문을 지나 있는 하트셉수트의 것으로 부녀(父女)의 것이 각각 하나씩 남아 있다.
오벨리스크(Obelisk)는 태양신을 섬기는 태양 숭배탑인데 일부에서는 남근(男根) 사상과 연결된 거석(巨石) 문화라던가, 끝내 찾지 못한 오시리스의 거시기(?)라는 설이 있는데 원래 1쌍 2개씩 세운 것이지만 이리저리 옮겨지고 훼손되어서 현재 1쌍 2개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4면이 모두 상형문자로 쓰인 오벨리스크는 희랍어로 바늘을 뜻하며 그래서 오벨리스크의 별칭을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래 3 탑문 지나서는 투트모세 1세와 투트모세 3세의 오벨리스크 2개씩 4개가 서 있었고, 4 탑문 지나서는 하트셉수트의 오벨리스크 2개가 서 있었는데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얼마나 멋졌을까?) 현재는 아버지의 것과 딸의 것만 하나씩 남아 있고 그 딸의 양아들 투트모세 3세의 오벨리스크는 찾아볼 수 없다. 일설에는 자신의 양어머니이자 고모이며 장모였던 하트셉수트의 기록을 말살하려던 투트모세 3세가 그녀의 오벨리스크를 없애버리지는 못하고 담을 쌓아 안보이게 했었다고 전하는데 정작 자신의 오벨리스크는 터키의 이스탄불에 가 있다. (답사기 3편, '미완성 오벨리스크'편 참조)
테베(現 룩소르 일대)를 수도로 정한 중왕국 시대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카르나크 신전은 대신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엄청난 규모로 우리가 둘러본 지역은 전체의 1/10도 안된다고 하니 그 실체를 짐작하기도 어려우며, 어느 한 왕조 한 사람의 파라오가 건축한 것이 아니라 1500년 넘게 지나면서 여러 왕조가 바뀌면서도 계속 증축하고 보수하고 추가하면서 지은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는 기독교나 이슬람교 등 이교도들의 성소로 바뀌거나 특정 파라오에 의해 크게 훼손되기도 하였는데 18 왕조 10대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4세(아케나텐으로 개명) 때에는 아몬 신을 최고 수호신으로 모시는 다신교를 부정하고 유일신 아텐 태양신만을 섬기도록 하면서 심지어 멤피스와 룩소르 중간 지점으로 수도를 옮겨버렸다. 다행히 그 뒤를 이은 투탕카몬에 이르러 유일신 아텐 신앙을 부정하고 다시 아몬 신앙으로 복귀하였는데 그래서 투탕카몬 이름이 '아몬의 살아있는 화신', 즉 '투트 앙크 아몬 = 투탕카몬'이라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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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