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피라미드(Pyramid)
이집트 하면 피라미드(Pyramid)와 스핑크스(Sphinx)다.
그중 피라미드는 지금으로부터 약 4600년 전쯤 이집트의 고왕국 시대 3 왕조의 2대 파라오 조세르(Djoser)가 친구이자 재상이며 뛰어난 건축가인 임호텝(Imhotep)에게 사카라에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들게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조세르의 뒤를 이은 세켐케트(Sekhemkhet) - 카바(Khaba) - 후니(Huni) 順으로 이어지면서 후임자들도 피라미드를 짓고자 하였으나 모두 미완성이거나 무너진 피라미드가 되었으며, 이중 조세르의 아들 세켐케트(Sekhemkhet)의 피라미드는 지상 위는 완전히 무너져서 자연 언덕인줄 알았다가 1951년 지하 무덤이 온전히 발굴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3 왕조에서 시작은 하였으나 미완성으로 넘어가니 후니의 후궁 아들이자 정실부인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이면서 이복남매 부부가 된 스네프루(Snefru)가 막을 연 4 왕조에서도 피라미드를 계속 짓게 되는데 스네프루는 무려 3개의 피라미드를 지었다고 한다.
처음 시도한 메이둠에는 매끈한 외벽의 피라미드를 짓다가 무너지고 말았으며 두 번째는 다흐슈르에 지은 굴절 피라미드(Bent Pyramid)로 처음에 45도 급경사로 짓다가 기술적으로 어려워지자 43도로 줄인 것이다. 그는 다시 피라미드 건축을 시도하여 경사각 45도로 온전한 피라미드를 완성하니 굴절 피라미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붉은 피라미드(Red Pyramid)로 스네프루는 세 번째 피라미드에 묻힌 것으로 알려졌지만 미라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렇게 계단식 피라미드에서 굴절 피라미드를 거쳐 붉은 피라미드(붉은색의 돌로 쌓아서 전체적으로 붉게 보여 그렇게 부른다)로 진화하면서 모양을 완성한 피라미드 건축은 스네프루의 아들인 쿠푸(Khufu)왕에 이르러 기자 지구에 대(大)피라미드(Great Pyramid)를 세움으로써 정점에 달한다.
4왕조 2대 파라오 쿠푸(Khufu)는 이복남매 부부인 스네프루와 헤테페레스의 소생으로 각기 배다른 아들 제데프레와 카프레가 왕위를 잇는다. 3대 파라오 제데프레의 생모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신분이 낮았는지 정비 소생 딸과 결혼(이복남매 부부)하였으며 자신의 피라미드는 기자에서 조금 더 북쪽에 지었다. 그래서 기자 지구에는 쿠푸왕과 제데프레 뒤에 왕에 오른 배다른 아들 4대 카프레, 손자 멘카우레 3대의 피라미드가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 기자 피라미드는 이 세사람의 피라미드를 말하며 이중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7대 불가사의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하나로 손꼽힌다.
대피라미드의 정방형 밑변은 가로, 세로가 230m로 각변의 길이 오차가 4.4cm, 높낮이 오차가 2.1cm에 불과하며 네 귀퉁이가 가리키는 동서남북 방향오차는 0.3도 이내라고 한다. 빗면의 기울기는 51도 5분으로 아버지의 붉은 피라미드 43도보다 8도이상 가파르며 사용된 석재는 평균 2.5톤짜리 230만개가 들어갔는데 바닥쪽의 석재들은 10톤이 넘는 거석들이고 특히 현실(玄室) 천장 위에는 40톤쯤 되는 거대한 돌을 얹었으니 지금도 피라미드의 건축 방식에 대하여는 현대적 공법으로도 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BC 5세기에 이집트를 방문했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트스에 따르면 쿠푸 피라미드는 10만명이 20년동안 3개월씩 교대로 일했다는것인데 그들은 전쟁포로나 노예들이 아니라 이집트 농민들이나 전문 건축인력들로 정당한 임금과 물자 지원을 받고 일을 했다는 것이며 이를 언급한 흔적(낙서 등)이나 관련 기록들이 발견되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거대한 구조물에 대한 도전, 즉 도굴과 침입에 대한 기록인데 이미 BC 2184년 이전(고왕국 시대가 끝나기 이전)에 도굴되었을것으로 추측되며 지금 관람객들이 내부로 들어가는 구멍은 820년 이슬람 7대 칼리프인 알 마문이 뚫은 것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입구의 약 10m 위쪽에 정식 입구가 발견되었지만 지금은 폐쇄하였고 알 마문이 뚫은 구멍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데 쿠푸왕 피라미드 내부를 들어가려면 별도의 요금을 내야한다.
원래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 메르(Mer)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의 관광객들이 본국에 돌아가 피라미드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먹는 삼각형 모양의 과자인 피라미스와 비교했기 때문에 피라미드라고 굳어졌다는 것인데 명칭보다 더 관심 있는 것은 건축 방식과 방위각 설정 등 설계와 시공의 정밀함에 대한 경탄인데 그래서 외계인이 지었다거나 고대 초특급 문명이 존재했었다는 주장 등이 있기도 한다.
더구나 내부에 미라는커녕 유물 한 점 없는 것 등으로 보아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이 아니라는 주장도 힘을 받고 있어서 '7대 불가사의'이면서 의문투성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집트뿐 아니라 멀리 중남미나 아시아 각국에도 고대 피라미드 유사한 유적들이 존재하고 있어 흥미를 더 하고 있다.
기자의 쿠푸 대피라미드에서 정점을 찍은 이집트 피라미드는 카프레를 거쳐 손자 멘카우레의 피라미드에 이르러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3개의 피라미드에서 인골이나 동물의 뼈가 발견되기도 했으나 모두 주인공의 것은 아니고 도굴 이후 혼란한 물증으로 보이며, 심지어 멘카우레의 석관은 영국으로 옮기다가 침몰하여 수장(水葬)되고 말았다.
이후 이집트 왕조에서의 피라미드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5 왕조로 넘어가서도 피라미드는 계속되었지만 무너지고 실패하게 되는데 사카라의 우나스 피라미드 안에서 발견된 벽화에서 보듯이 대기근이 덮치고 굶어 죽는 백성이 속출하게 되니 그리된 듯하다. 그래서 5 왕조 마지막 파라오 우나스와 6 왕조 첫 파라오 테티의 무너진 피라미드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추가적인 발견을 기대해 본다.
[계속]
내 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