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란 단어가 알려지기 시작한 지 70년이 지나고 있다. 1950년대 초반 진공관시대에 정부 기관 중심으로 먼저 사용되더니, 1980년대 중반부터 집적회로 반도체 중심의 개인용 컴퓨터로 사회 전반에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양자역학 큐비트 반도체의 컴퓨터통신시대를 앞둔 바, 너나없이 들고 다니는 컴퓨터인 스마트폰은 우리 생활 자체를 크게 바꾸고 있다. 바로 문화가 바뀌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스마트폰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행동해왔던 방식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컴퓨터에 이은 새 문화 아이콘으로서 일상생활의 정점에 있는 만큼, 한시라도 팔길이 밖에 있으면 무엇인가 허전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아니, 24시간 마음 한쪽에 깊숙이 스마트폰의 여러 모양 프로그램 로고들을 품고 생활해 간다.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자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스마트폰이 통화 목적보다 카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SNS 사용에 몇 배의 시간을 소비하는 요즘이다. 전철, 버스, 카페, 도서관 등 어디서나 이어폰을 끼고 조용히 스마트폰 화면을 누르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새로운 문화의 한 장면들이다. 여기에 스마트폰으로 찍는 사진이나 동영상은 가히 자신만의 정체성 확인 수단으로 애용되고 있다. 웬만하면, 너도나도 1인 방송사를 만들고 출연하고 마음껏 자신의 장점을 뽐내고 있다. 이쯤 되면, 모두 현대 사회를 대변하는 문화 전도사가 된 셈이다.
이도 모자라, 일부 섣부른 사람들은 사이버란 용어를 뭐 이웃집 강아지 부르듯 쉽게 사용하고 있다. 내용보다는 새로운 단어 맛에 취해 인공지능, 빅데이터, 블록체인 등 신기술을 빨리 섭렵하는 것이 현대인의 의무라고 여기려는 듯하다. 사이버라는 또 다른 상상의 세계에 내 깃발을 먼저 꽂으려는 경쟁을 다투어 하고 있다. 심지어, 나도 깃발이라도 잡지 않으면, 뭐가 좀 불안한 듯한 느낌인 FOMO 증상까지 생기는 희한한 문화현상을 접하곤 한다.
그렇다면, 컴퓨터, 스마트폰, SNS 등을 이끄는 사이버 문화란 과연 무엇일까? 분명, 새천년을 지나오면서 떠오른 단어로서, 사이버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받아들이기 애매하다. 너무 짧은 시기에 형성된 문화 개념이기에, 또한 적용되는 분야가 매우 빠르게 넓혀졌기에, 특히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서 ‘바로 이것이다’라고 할 만큼 정형화될 수 없다. 그렇기에, 일반인은 막연하게 ‘누가 그렇다’라고 하면 그저 따라 할 수밖에 없는 문화의 어정쩡한 극치를 나타내고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이버’란 의미를 더 명확히 해보자. 보통 ‘사이버’란 가상 혹은 공상이란 의미로서 ‘컴퓨터나 인터넷 안에 있음’을 지칭한다. 사이버스페이스 즉 가상공간과 함께 많이 쓰이는데, 데이터가 어떤 가치로 존재하는 공간을 말한다. 물리적으로 보면, 매 순간 기억장치에 기록 중이거나 통신장치에 이동하고 있는 ‘데이터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는 통신이 연결된 의미로서 ‘온라인’ 상태에서의 사이버통신, 사이버게임, 사이버머니, 사이버문화 등의 다양한 용도별로 불리기도 한다. 현대 과학기술이 컴퓨터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사이버란 말을 붙이면, 현대인 모두 통용되는 만능의 문화 화두가 되어 있다.
문화란 오랜 기간을 거쳐 수많은 사람이 경험한 결과물들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첨단 문화 현상을 지켜볼 때, 이 사이버문화의 실체를 내 것으로 만들고, 그 즐거움을 만끽하기에는 너무 많은 대상이 널려져 있다. 어떤 것부터 먼저 맛보고 또 알리고 함께 즐겨야 할지 좀체 그 뚜렷함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세계 각국에서 일분일초가 멀다고 발표하는 신기술들 사이에서, 현재 한국 문화라는, 또 지역문화라는 의미를 즐기는 방법을 매년 다르게 개발해야 함은 남의 일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세계 각국의 각 지역에서도 ‘우리도 있다’ ‘우리 즐거움은 이렇다’라며 자신들만의 것을 가지고 즐겁게 살아간다. 굳이 컴퓨터가 없어도 사이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 즐거움의 정도에는 어떠한 상관은 없다. 그러나, 지구가 일일생활권 또 일초 통신권역에서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문화’가 곧 큰 소득을 가져다줄 문화산업임을 간과할 수 없지 않은가.
어느 시기든, 당시 기술의 발전을 체감해 자신의 경제 가치로 전환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 특히 인공지능은 더욱 그렇다. 바둑 한 수를 고민하기 위해 고수 수십 명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도 결국 이기지 못한다. 이렇듯, 전 인류의 지성과 지혜를 하나로 뭉친 것보다 더 뛰어난 인공지능 출현은 누구라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쯤일까? 일부 학자들은 2040년대 중반에 올 것이라 하는데, 그 시기를 인공지능 분야의 전문가이자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은 기술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이라고 부르고 있다. 기술이 기술을, 기계가 기계를 알아서 만드는 시기이다. 이는 농업혁명에 이른 산업혁명 결과 현재 시작하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을 넘어, 제5차 산업혁명기를 예고하고 있다.
한편, 정치 권력 다툼으로 일어난 생사의 갈림길에선 항상 큰 주먹이 앞섰다. 권모술수와 힘의 논리만이 모든 결과를 낳았기에 혁명이란 말이 먼저 사용되었다. 정치가 정치로써 해결되지 않을 때, 즉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4.19혁명처럼 국민이 더 이상 현재 정치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한다. 이렇듯, 더 이상 견디지 못하기에 일어나는 혁명을 정치적 특이점이라 비유해볼 수도 있으리라. 섣부른 특이점의 파편이라 보는 것에 불과하지만, 역사의 굴곡마다 혁명이 있었던 것을 정치적 특이점과 유사한 모양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역사의 장면들이었겠지만, 인류 존속을 위해 발생한, 자연스러운 필요악일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위 특이점 사례를 길게 엿본 것은 문화적 특이점(Cultural singularity)이란 무엇일지 상상해보기 위해서다. 앞서 사이버문화의 빠른 적응이 문화산업의 도약을 선도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국가마다 간직해온 기존 고유문화의 텃밭들에 사이버문화란 토양이 생기게 된 것은 불과 반세기밖에 안 된다. 문제는 이 짧은 시기를 두고 어떻게 문화가 특이점을 맞이할 만큼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된 모습은 무엇이고, 또한 우리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야 뒤처지지 않는 문화로 이을 것이냐는 점이다.
문화적 특이점의 조심스러운 접근은 우선 인간의 육체적 노동 감소에서 시작해야 할 듯하다. 노동의 감소가 자칫 생존에 대한 욕구가 줄어드는 일로 변질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는 매우 심각한 변화다. 인공지능 로봇이나 아바타의 역할 증대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렇듯, 할 일이 없어질 수도 있는 시점에서는 기존 문화 정체성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줄어든 육체적 노동 대신, 늘어나는 정신적 노동은 인간 삶 자체를 바뀌게 할 것은 뻔한 이치다.
인간이 그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기계와 기계들이 서로 알아서 일함으로써 인간에게 기본급여를 주는 시기는 올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반복될수록 인간 스스로 가꾸어왔던 존재감 느끼기도 변화가 생길 것. 미래의 꿈을 키우는 일이 바뀌고, 그 일에 대한 성취감도 또한 바뀌고, 그래서 삼삼오오 서로 만나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는 방법도 바뀔 것. 그래서, 함께 노는 방법도 바뀌고, 눈에 보이든 아니든, 어떤 대상 있든 없든, 너무 빨리 또 갑자기 바뀔 수도 있는 문화 존재감의 변화는 가히 변혁적이라 할 만큼 그 우려가 크다.
그러나, 첨단과학으로 현실이 아무리 바뀐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이 문화적 특이점을 거론하는 일은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데 동의한다. 인간은 항상 무엇인가 할 일을 계속 찾아왔다. 그 결과 그 모든 문화는 저마다 잘 길러졌다. 그 문화에 대한 만족도가 높으냐 낮으냐는 중요하지 않다. 서로 비교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그곳에서 잘 적응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존재하는 한, 계속 싸우기도 놀기도 웃기도 하며 자신들만의 살아가는 모습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것이 어떤 수식어가 필요 없는, 그냥 문화임은 분명하다.
어쩌면, 문화적 특이점이란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개념으로 남았으면 하는 소원이다. 다만, 세계 다른 국가의 누구와 경쟁하기 위해 문화적 특이점을 가상으로 설정해 본 것이다. 이는 우리가 먼저 우리 문화를 첨단 과학의 힘을 이용해 세계에 실시간으로 알리기 위해 ‘첨단산업문화’라는 이름으로 힘을 모았으면 하는 기대 때문이리라. 하나 예를 들면, 누군가가 주관해 세계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실시간 문화현장 즐기기’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면 하는 것. 물론 24시간 한국어로 진행하는 것, 각국이 알아듣든 말든 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어를 사용할 테니. 한국문화가 곧 세계문화가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