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8.07 17:51

평생 몇 번 써보았던 마스크, 그러나 올해 들어 매일 쓰기 시작했다. 추워서가 아닌, 꽃가루 때문도 아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쓰는 것이 더욱 아닌, 너도, 나도 쓰니 그냥 써야 하는 마스크다. 생명을 담보로 세상이 변하고 있으니, 나도 바뀔 수밖에. 이 변화에 비하면, 4차 산업혁명이니 블록체인이니 하는 명분 살리기로 외출하는 일은 그저 장난인 듯하다. 마스크를 소중히 간직하다가, 외출할 때마다 습관처럼 챙기는 마스크, 이젠 방에서부터 쓰고 외출하는 일이 자연스럽다.

집 근처 전철역, 전철을 기다리며 이어폰을 익숙하게 낀다. 스마트폰 음악 앱을 열고, 오랜만에 드보르자크 신세계교향곡을 듣는 것은 그냥 우연이다. 카세트테이프 녹음기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참 신세계다. 맞아, 신세계. 하, 새로운 세계를 보며, 다시 새롭게 들으며, 좀 다른 맛을 느끼고 싶은 공기, 하, 새삼 향기롭다. 어쩌면 모두가 마스크를 썼으니, 서로서로 못 알아보니, 나 혼자 거니는 것 같은 착각, 세상 공기도 나 혼자 마시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키니 향긋할 수밖에.

세상에 나 홀로 있다는 잠깐 착각이 별별 생각 꼬리를 만든다. 이 세상은 점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면, 맞을까? 점과 점이 모여져 나를 이루었다고 하면, 정말 맞을까? 맞을 것 같다. 그 점이 무한대 가까이, 더 나눌 수 없는 무한대 점이라면, 그래서 시간이라면,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 점들이 점점 모여 내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세상은, 그 점들은 내 것과 아닌 것이 나뉘는 시점부터 어쩌면 다툼과 전쟁은 시작되었을 것.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 욕심 때문에.

나를 지키려는 본능처럼, 전철을 타고 있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서로 떨어져 있으려 하는 것 같다. 오래 기록으로 남을 호흡기 전염병이 가져온 세계적 현상이다. 그 세상을 뚫고 가는 이 전철은 ‘그도, 나 같은 새로움을 느끼면 어떨까?’ 하는 남풍 바람과 함께 가고 있다. 인공지능이니 빅데이터니, 사물인터넷이니 하는 용어가 남의 이야기로만 어렴풋이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은 ‘팥도 콩이 될 수 있다’라는 상상의 벽을 감히 혹은 애써 넘으려 하지 않는다. 물론 나 또한, 그 벽과 그다음 가시밭에서 자주 넘어지곤 했지만. 그러나, 새로운 용어를 내 일부로 만들기 바라는 내 즐거움이 전철 안을 환하게 만드는 것을 어찌하랴. 이도 내 욕심이지만.

예정된 것이든 그저 지금 우연이었든, 몇 년 전, 다국적 기업 면모를 준비하는 블록체인플랫폼 전문회사로부터 독립한 블록체인 작업증명회사와 인연이 되었고, 또 그 인연의 고리를 연결해준 정보 덕분에 이 새로운 신세계를 보여주러 가는 전철, 하하, 이 전철이 갑자기 ‘은하철도 999’가 된 듯하다. 아마도 그 누구라도 함께 새로운 그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로 공감대를 넓히는 일을 위해 간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그러하리라. 그렇다, 그 무엇 때문이다.

지금 전철에 탄 사람뿐만 아니라, 숨 쉬는 많은 사람은 대부분은 ‘지금 좋거나 아닌 것’ 때문에 나처럼 자신만의 문제를 내고 스스로 풀이를 한다. 그것도 가장 어렵게 푼다. 이로 인해 나 자신이 알게 모르게 어떤 모습으로든 변해 간다. 그것도 그 끝을 모르게 달라져 간다, 오른손이 알고 있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경우처럼. 마치 왼손잡이가 환경의 요구에 의해서든, 스스로 원해서든,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양손잡이가 되는 것과 유사하다. 그냥 그렇게 살아져 간다. 그런데, 그런데도 뭔가 못마땅하다. 대부분 못마땅해하며 다른 것을 기웃거린다.

갑자기 숨쉬기가 좀 불편해졌다. 서로 마스크로 가린 얼굴이 똑같아 보여, 불편하다. 나도 똑같이 저들과 같다고 생각하니 숨쉬기가 불편하다. 나 먼저 마스크를 벗을까. 나는 이런 사람이요 하고 외칠까. 내가 먼저 ‘나도 진실한 사람이고 싶다’라고 외칠까. 그러면 저들도 ‘나도 그래’하고 마스크를 벗을까. 숨을 크게 들이쉬고 멈춘다. 10초 15초.... 휴, 천천히 숨을 내쉬며 보는 전철 세상은 조금씩 넓어 보인다. 역시 나도 이들과 함께 있구나! 하, 그래, 마스크를 벗지 않아도 돼. 변한 것이 없으니까. 그냥 있는 것이 안전하니까. 전철 안에선 다 그런 거야. 아니 ‘세상은 뭐 그런 거야’ 하며, 눈을 감으며 슬쩍 웃어 본다. 이렇게 나는 조금 다른 내가 되어 가는 것인가. 아닐 수도 있는데,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가. 그러다 내 시간은 전철처럼 멈추다 가다 멈추는가.

속웃음을 멈추고 눈을 뜨면, 보이는 이 전철 안, 그래 현재다. 눈 감고 웃으며 보았던 세상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허상? 꿈? 허, 이럴 땐, 인간은 대부분, ‘누구나 이중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라고 우겨야 한다. 눈 감으면 믿고 싶은 진리,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진리 앞에선, 서로의 문제가 다르더라도, 이상적으로 어울려 잘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눈 부라리며 내 시간 가치를 논하는 현실 앞에서는, 네 사정이 어떻든 간에, 본능적으로 내 것부터 챙기는 게 법. 왜? 현실이란 나만의 법이 있어야 힘이 생겨나니까. 내 현실이 내 법이니까.  

국가도 마찬가지다. 표현과 복잡도만 다를 뿐이다. 세계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 초반전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국 처지에서 보면, 중국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미국보다 더 이중적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 미국 힘이 더 강하니까. 그러니, 중국을 이러니저러니 뭐라 나무랄 수 없다. 미국이 페이스북이라는 거대기업을 통해 민간 중심의 세계디지털화폐를 만든다고 하니까, 중국은 중국 중앙은행디지털화폐 발행으로 맞서고 있다. 블록체인인 척, 암호화폐인 척, 이렇게라도 이중에 삼중인 모습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중국이다. 특히나, 중국이 한국, 일본, 홍콩, 중국 등의 법정디지털화폐가 통용되는 동북아용 스테블코인을 암호화폐로 공동 발행하자는 제안을 하는 바, 중국 입장을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미국도 알아서 대처하고 있을 것이니.

미국과 중국이 그러할진대, 우리 한국은? 물론, 중국보다 더 현실적이어야 한다. 더욱 이중적인 길을 뚜렷이 해야 한다. 왜? 미국과 중국보다 약하니까. 이쪽저쪽 편 가르기만 하고 있으니까. 지금도 이스라엘 유대상인과 중국 화교상인 간의 세계 경제 패권 싸움터에 끼어 있는 것 같아, 갑자기 전철 가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안타까운 것은 유대인 측 자본가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선도하고 있다고 하는 블록체인 이론조차 자유와 평등으로 포장되어 있다 하니, 전철 소리는 이제 천둥소리로 들린다.

엄청난 이 이중구조의 포장은 내 마스크를 전철에서 열 번 갈아 쓰고 또 쓴다고 해도, 갈아 쓰려고 벗을 때마다 외쳐도, 나 또한 그때마다 다른 크기의 목소리일 것 같다. 소리칠 때마다 스치는 생각이 조금씩 다를 것이니 말이다. 인간이란,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마스크를 쓰고 또 벗는 이중구조체이니 말이다. 이러저러한 상상을 거듭하는 전철에선, 이 짧은 시간임에도, 내 상상은 먼저 내 것을 먼저 취하려는 본능으로 인해 여전히 미국과 중국 중 어느 쪽 편을 들지, 갈팡질팡, 제멋대로다. 참 우습다.

코로나19로 쓰기 시작한 마스크, 전철 탈 때부터 서서 몇 번이고 다시 고쳐 쓰고 써도, 과연 지구 전체가 계속 변형시키고 있는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된 것이 혹시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으로 생긴 미필적(未必的) 고의(故意)에 의한 결론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의 꼬리가 끊어지지 않는다. 흔들리는 전철 바닥에서 그 꼬리의 근원을 찾으려 눈을 부릅떠본다. 돌고 돌아 결국 되돌아오는 내 발 앞이다. 나 같은 혹자에 의하면, 향후 5~10년이면 생체통제시스템이 생겨나기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왜 생길까? 그래, 인간의 생체 변화를 미리 감지함으로써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으리라는 명분, 참 좋다. 또 사전에 발생 가능한 질병을 제거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생체통제 법안이 우후죽순 나타나고 있는 것, 이도 참 좋다. 

그러나, 생체통제시스템은 자칫 일부 빅브라더스의 위험천만한 장난감이 될 수도 있다는 말, 그 말들이 잠시 전철 바닥을 떼구루루 굴러다닌다. 그래, 밟아 없애야 해! 왜? 개인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못 하게 할 것 같으니. 세계 어디라도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자유, 당신은 틀렸다고 말하는 자유 등이 금지될 수도 있으니. 그러니 나부터라도 먼저 거부해야 해. 아니, 아니야, 그러면, 나는 먼저 저쪽 신세계 곳곳에 도착한 자본가 그들 발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그래, 그래 맞다. 물론, 그들 말대로 생체칩을 몸에 넣고 다니는 이들은 무사통과할 것. 그들 생각과 같아지면서, 그들 심부름을 하면서, 그래, 그렇게 그들 밑으로 들어갈 것이다. 과연 나는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이 전철 안에서는 스스로 대답할 수 없어, 전철 천정을 보며 눈을 껌뻑거려 본다. 아, 눈이 뻑뻑하다.

어쩌면, 공산/사회주의를 표방한 독재 정부의 몇몇에 의해 통제된 사회로 가는 것이나, 자본/민주주의 삼삼오오 정권에 의한 몇몇을 위해 다수가 통제되어야 하는 사회로 가는 것이나 뭐 마찬가지일 거다. 또 어쩌면, 빅데이터를 활용해 인공지능이 인간을 먼저 통제하는 사회로 갈 수도 있겠다. 앞으로의 세상이 어떤 모양새가 되던, 인간의 모든 행동이 어느 힘으로 통제되는 시대로 가게 될 것은 자명할 듯하다. 참 신기하다, 흔들거리는 전철에서 넘어지지 않고 서 있다니 신기할 뿐. 누가 나를 잡고 있단 말인가. 그들이 나를 잡아주고 있는 것인가? 아닐 텐데, 아닐 텐데! 그런데, 신기하다. 언제나 동전의 앞뒤 같은 통제와 자유는, 어디든 존재해 나를 조정하고 있는 이 이중적 모순은, 그래 지금은 참으로 영원한 진리인 듯하니, 참으로 신기하다.

서울 외곽을 향하는 전철, 계속 누군가를 만나 새로운 세상은 반드시 생기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 가는 길. 이 전철이 도착하기 전에, 나는 언제 즈음 어떤 방법으로 생체칩을 몸에 넣게 될까 상상해 두어야 한다. 어차피 받아들여야 할 테니. 120년 전 드보르자크처럼, ‘여기보다 멋질 수도 있다’라는 신세계에 먼저 도착해 있고 싶으니까. 그래서, 만나는 이들에게 내가 결정하고 싶은 생체칩은 이러저러하다고, 먼저 받아들이면 무척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그렇게 되면, 서로 행복과는 상관없지만, 세상의 변혁 과정의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독백하듯 말해야 하니까. 그래 이미, 우리는 통제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집을 나설 때, 마스크를, 오래된 습관인 양, 자연스레 쓰는 것처럼.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들 때까지, 아니 잠들어서도, 나는 얼마나 많이 감시카메라를 통해 녹화되고 있을까. 카드나 핸드폰으로 결재하는 곳이거나, 이 전철은 어디서 언제 타고 내렸는지, 누구와 문자를 하거나 통화했는지, SNS에 기록한 내 생각이라든지, 내 것이란 온통 노출되어 빅데이터로 꼬박꼬박 그 많은 곳에 쌓이게 된다. 아니, 나는 내 스마트폰을 통해 나를 그냥 상납하듯 그 정보들을 넘긴다. 내 편리를 위해 인간이 만든 스마트폰은 이제 내 자유를 통제하는 기계가 된 것.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새로 만들어지는 즐거움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자유롭게 공개해야 한다. 이 전철 안 CCTV에 찍힌 내 모습은 마스크를 써도 웃고 있어야 한다. 아, 그래 훗날을 위해. 그래야 조금은 좋은 밥상이 보장되니까. 이 욕심을 우리는 서로 보아가며, 또 슬쩍 감추기도 하면서 말이다.

하하, 별나라 같은 별별 상상의 꼬리 밟기가 멈추지 않는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래, 세계열강은 지구에 제 영역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지구 나누어 갖기 다툼은 제국주의 시대의 무력전쟁, 또 두 차례에 걸친 세계 전쟁, 사회주의와 개인주의이란 이념전쟁,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재산전쟁, UN이란 기구의 정치전쟁, 자국민 배불리 먹이기의 무역전쟁, 누가 먼저 많이 빨리 아느냐 하는 인터넷전쟁, 내 것이 더 멋지다 우기는 문화전쟁, 인공지능 먼저 생체칩 먼저 하는 기술전쟁 등등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렵다. 이 전쟁터에 넘쳐나는 것은 화폐다. 이제 국가마다 너나없이 마구 찍어내는 법정화폐. 이는, 결국, 화폐개혁이란 전통적인 방법 대신 정부나 민간기업에서 발행하는 디지털화폐 형태로 한꺼번에 진화할 것이다. 이는 개혁을 넘어 혁명이라 해야 옳을 듯하다.

피부나 뇌 속에 생체칩에 들어가 개인을 통제하는 시대에 유통되는 암호화폐 등장은 이젠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 생체칩이 개인의 자유의지를, 개인의 신용을, 그 가치를 암호화폐로 환산해 교환하게 될 것 또한 신기한 문장이 아니다. 그렇다, 미래의 돈은, 가치교환 수단은, 신용카드가 아니다, 생체칩 결재도 이미 예견된 수순이다. 신용카드는 40년 가까이 화폐 사용의 최고 수단 지위를 생체칩에 물려주게 될 것. 결국 부피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무게 없는 암호화폐가, 의미결재라는 모습으로, 우리들 눈과 귀와 느낌으로 오고가고 할 것임이 분명하다. 설상가상, ‘생체칩’보다 오감을 넘은 육감이나 뇌파 또는 ‘생각’만으로 결재할 날도 머지않을 것.

이러한 세계를 누가 원하는가? 몇 거대 자본가 세력들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는 말도 있지만, 뭐 그들이 움직이는 미국 혹은 중국에 의해서든 상관없지만,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따라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누군가는 먼저 도착할 것은 분명하다. 나도 그 누군가가 되어야 하지 않은가? 그것이 덜 통제받고 그래서 조금이나마 나만의 자유를 누릴 것 아닌가? 나는 그 세력들을 모른다. 모르기에, 어느 누굴 믿을 수 없기에 먼저 알아야 하고, 아는 만큼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 확신은 곧 자신의 에너지를 투자하게 한다. 투자는 제로섬게임이기에 소수 먼저 도착한 이들만이, 결국 그 속에 내가 있다면, 나는 내가 행복이라고 믿는 답을 몇 개 가지는 것. 먼저 움직이는 자들만의 유유상종이 이루어지는 것. 내 꿈이 더 중요하기에, 내 욕심이 더 중요하기에, 내 생명이, 내 가족이 더 중요하기에 더욱 그렇다.

아마 세계 주인이 되고 싶은 그들은 ‘은하철도 999’ 뿐만 아닌 ‘서울지하철 999’ 같은 것도 만들고 있을 것. 만들면서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동시에 같이 타면 ‘999’호는 침몰하니, 그들은 ‘서울전철 999’ 같은 것에 승차할 사람들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던 모양. 그래서, 2008년 금융위기를 만들었고, ‘블록체인’ 이론을 만들어 준비하면서, 그 선택할 위기를 더욱 만들기 위해 2020년 코로나 전염병이란 방아쇠를 당긴 것은 아닐까 하는, 쓸데없을 듯한, 별별 상상을 해본다. 그 세력들은 선택 여지를 2개밖에 주지 않는다. 시키는 대로 해 함께 올라탈 것이냐, 아니면 이것일까 저것일까 망설이다가 흐지부지 ‘신세계가 아닌 노예세계’로 사라질 것이냐 하는 선택. 참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의 장난이다. 그런데도, 선뜩 나부터 선택해 폴짝 올라타고 싶은 것은 어인 일인가.

2020년 5월 12일은 블록체인이론 첫 플랫폼에서 나오는 ‘암호 맞추기 10분간의 수고 보상’이 6.25 BTC의 날이다. 바로 비트코인 1개 가치의 세 번째 반감기에 의해서다. 우리 한국에선 외우기도 쉽다. 그야말로 역사적 날이기 때문이다. 이 숫자를 중심으로 몇 년간은 암호화폐 가격이 요동치리라. 세계 국가마다 동전과 지폐가 사라지는 화폐개혁의 파고로 지구 곳곳 지각변동도 일어나리라. 변하지 않는 기록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동안, 화폐개혁의 고삐를 쥔 세력들은 자신들만의 즐거움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어쩔 것인가, 아름다움과 슬픔의 적절한 비율을 맞추어 가며 보는 그들의 대상, 서로서로 경쟁하듯 구석구석 몰려 벌이는 우리들만의 리그, 지금처럼 그냥 살아지게 될 그 세상이 너나없이 예고되어 있으니, 내가 지독한 욕심쟁이임을 느끼지만, 어쩔 것인가. 그들의 눈에 먼저 들어야 하니, 어쩔 것인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혹자는 ‘나는 욕심쟁이가 아니다’라고 말할 거다. 태어난 사람은 모두 어떤 방법이든 지금 일을 하는 만큼 살아가게 되어있으니, 새로운 것에 노예가 될 필요가 있겠느냐고. 돈과 상관없이 행복한 일이 수없이 많은데, 지식보다 삶의 지혜로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데, 뭐 그리 아웅다웅 거리며 자본가니, 화폐개혁이니 암호화폐니 하는 것에 미래를 빼앗기며 살 이유가 있겠느냐는 것. 당연히 맞는 말이다. 이미 삶의 전쟁이란 전쟁은 다 겪어 봤으니, 아끼면서 있는 것 가지고 쓰다 나누어 주다 세상 마감하면 될 것 아니겠느냐고. 이도 참 좋은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전철을 타고 있는 것일까. 이 전철은 그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전철을 타고 팔짱을 풀며, 몸 구석을 만져본다. 팔 몇 번 주무르다가, 아 맞아, 내 몸이구나, 조금 더 세게 만진다. 몸 곳곳 저마다 응응 소리를 내며 웃는 듯하다. 나는 잠을 자지도 않고 꿈을 꾸었나 보다. 허, 그것참! 순간, 전철소리 따라 달아나며 낄낄거리는 꿈 조각들. 잠시, 스치는 쓴 내 맛 같은 것이 전철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팔딱거리며 웃는다. ‘그래,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런 거지 뭐’ 하는 맛. 그 많은 사람이 모두 느끼는 그 맛. 그냥 나 자신만 느끼다가 즐기다가 어디든 내려놓는 거라는 맛.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가 생기는 오늘은, 하하, 무엇을 해도 괜찮은 날인 듯하다. 그래 지금은.

마스크를 다시 슬쩍 벗었다 다시 쓴다. 고개 비스듬히 바라보는 전철 창 너머 신도시 변두리, 처음이라 보이니, 거참, 멋지다. 맞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아 그래, ‘행복이란 지금’이다 외쳐야 한다. 하하하, 마음속에다 대고 외쳐댄다. 고개를 휘휘 몇 번 돌리며, 자랑스럽게 마스크 속, 여러 모양 웃음을 지어본다. 그러다, 이도 싫증이 날 즈음, 이어폰을 타고 오는 신세계교향곡도 끝날 즈음, 나는 오늘의 아름다운 ‘세상역’에서 전철을 내렸다. 이제 버스로 바꾸어 타고 가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하겠지만, 이젠, 누굴 만나도 상관없다. 이 얼마나 기쁜가! 이 기쁨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 옳게 사는 진리의 하나다. 마스크를 쓰든 안 쓰든, 이렇게 존재해야 하는 진리. 진리도 변할 수 있으니, 오늘은 분명 진리다.

졸린 듯, 눈 몇 번 길게 감고 뜨다가 버스를 내렸다. 참 낯선 곳, 이곳은 나에겐 ‘신세계역’이다. 오늘 만날 곳으로 스마트폰 앱 지도를 보다가, 길거리와 간판을 보며 천천히 걷는다. 문득 손 가까이 작은 동산이 다가온다. 동산 위 구름이 눈부시다. 아, 저것도 내 것! 먼저 보고 손들었으니 내 것. 하하, 그래, 이도 욕심이다. 역시 내 욕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음을 느꼈다. 아, 그렇지 않으면 어쩌랴. 살아있다는 사실이 그냥 욕심인 것을. 틀릴까? 틀렸으면 좋겠다. 오가는 사람이 안 보인다. 마스크를 벗었다. 내 구름이 틀리다고 속삭인다. 욕심이 아니라, 그냥 ‘너’라고. ‘그’도 ‘너’로 사는 거라고. 그러니, 사용하는 말 수를 줄이라고. 줄이고 줄이다 보면, ‘너’와 같은 말밖에 남지 않을 거라고. 마지막엔 ‘너’가 남을 거라고.

그래, 이제 지금 누구든 만나면, 세상이니 평등이니 자유니 블록체인이니 인공지능이니 사랑이니 눈물이니, 그래서 뭐가 어떠니 줄줄 늘어놓다가, 기왕이면 나와 더불어 밥상 차리기를 하든지 말든지, 뭐 나중에 다시 생각하든지 말든지, 하하하 그게 뭐냐며, 남은 날 멋지게 사는 거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며 웃어야 하리. 그저 사는 욕심이란 정말 재미없다며, 쑥쑥 줄여 말하다가, 그냥 ‘너와 나만 있네’ 하고 웃어야 하리. 하하, ‘그래, 그래, 여기가 신세계네!’ 하며, 그냥 웃고 놀다가, 마스크 얼굴도 내 얼굴이라며 만지기도 하다가, 내 맘 내 몸 휘 섞어야 하리. 그렇게 살아져야 하리. 참 쓸데없는 내 마스크와 욕심과 꿈들 하나 될 때까지 휘휘. ‘그’나 ‘너’나 ‘나’나 ‘구름’이나, 뭐 그냥 휘휘휘! 분명, 이도 내 욕심이다.

    얼굴 주름 깊숙허니
    휘 쓰다듬과라

    꿈결인가 삶결인가
    휘 거칠하구나

    오늘도 울다 더 웃다
    휘 지나가나니

    이 마음도 내 몸이라
    휘 내려놓아라

    삶이란 서로 같다고
    휘 손짓하고서

    어디라 보이지 않게
    휘 살아질라니

    <拙詩, 生存法 9條 25項 -얼굴을 만지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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