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12.22 11:19

(9회)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속담 같지만, ‘감정을 억누르다’에서 ‘억누르다’라는 말의 어원을 생각해 보면 여자의 한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어르신들의 경우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정도로 습관이 되었지만, ‘억누르다’라는 말에는 ‘생매장하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생매장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라는 속담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집니다.

감정, 특히 억누른 감정의 힘은 셉니다. 우리는 평상시에 자신의 이성으로 감정을 잘 통제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우리의 일상을 보면 이성이 감정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종종 봅니다.

예를 들어 명절 전날이나 부모님 생신 전날 부부가 싸워서 본가에 가지 못했던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왜 못 갔을까요? 감정의 힘이 이성보다 세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성적으로는 부모님을 찾아뵈어야 하지만 배우자와 싸우면서 생긴 감정이 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갈 수가 없었던 거지요.

이런 일들도 종종 벌어집니다. 한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란 친구들이 모임을 만들어서 수십 년 동안 이어갔는데, 60이 넘어 외국 여행을 갔다 온 후 서로 사이가 멀어져서 결국 모임까지 깨져버린 경우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감정의 힘은 세기 때문에 마음이 상하면 몇 십년지기 친구일지라도 단번에(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멀어질 수 있는 겁니다.

임상 장면에서 치매 환자들을 보면 억누른 감정의 위력을 더욱더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어느 치매 어르신은 요양원에서 생활하시는데, 어르신의 딸이 요양원에 다니러 온 날은 꼭 요양원 직원에게 욕설과 폭력을 행사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어르신을 관찰하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어르신의 경우 딸과의 관계에서 풀리지 않은 화를 마음속에 담고 있었는데, 딸이 다녀가기만 하면 그 화를 요양원 직원에게 풀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어르신은 치매로 기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요양원 직원을 딸로 착각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억누른 감정만은 사라지지 않았던 겁니다. 이렇게 치매에 걸렸어도 억누른 감정은 그 힘을 발휘합니다.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데이케어센터에서 실습을 할 때였습니다. 한 할머니께서 그 데이케어센터에서 청일점이었던 할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셨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그 할아버지에게 물도 떠다 주고 옆에서 생선 뼈를 발라드리기도 했지요.

할머니는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하는 데는 사연이 있었어요.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결혼을 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6.25전쟁으로 남편이 전쟁터로 가게 됐고 마침내 그곳에서 전사한 겁니다.

할머니라고 왜 연애 감정이 없었겠어요? 당연히 성적인 욕구도 있었겠지요. 배곯던 시절 시어머니 봉양하며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그런 감정을 표현 한 번 못하고 살아왔는데, 치매에 걸린 후 데이케어센터에서 그 할아버지를 애인 대하듯 하시면서 매사에 극진히 챙겨드리는 겁니다.

이처럼 감정을 억누르면 그것이 훗날 치매에 걸린 후에라도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엄청난 힘을 가진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감정을 억누르고 또 억눌러서 그것이 응어리가 되고 더 나아가 한으로 자리 잡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신중년 신노년의 마음공부' 저자 강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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