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1.08 16:30 | 수정 : 2021.01.08 16:36

▩ 남한강변 폐사지 (청룡사터, 거돈사터, 법천사터, 흥법사터, 고달사터)

남한강변 폐사지 답사를
충주 청룡사 터에서 시작하여
원주시 부론면 거돈사 터와 법천사 터를 거쳐
네번 째는 흥법사 터(興法寺 址)를 찾아가 본다.

법천사(法泉寺)가 '부처님 말씀, 즉 법(法)이 샘(泉)처럼 솟아나는 절'이라면 흥법사(興法寺)는 '법(法)이 번성(興)하는 절'이라는 이름이니 크게 다를바가 없는 듯 하다.

▩ 원주 흥법사 터(興法寺 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5호)

횡성-원주-문막을 지나 흘러온 섬강이 (법천사 근처) 흥원창이 있던 지점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데 그 섬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문막 건너편에 흥법사 터가 있다.

흥법사 터 조금 위로는 간헌관광지와 최근 출렁다리 개통으로 유명해진 소금산이 있으며 흥법사터 아래로 섬강 건너편은 후삼국시절 견훤과 쟁패를 다투던 왕건이 올랐다해서 이름붙인 건등산이 있다.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

그만큼 이지역은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남한강 수로 장악에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에 주변에 큰 절집들이 많이 들어선 듯하다.

흥법사터는 먼저 둘러본 거돈사 터나 법천사 터가 오랜기간 발굴작업을 마치고 부지정리까지 깔끔하게 마무리 지은데 비하여 민가 옆 경작지 한쪽에 삼층석탑과 비신은 없어진 탑비 하나가 남아있는 다소 옹색한 모습이다.
흥법사 터 전경. 비신이 없어진 탑비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고 멀지 않은곳에 삼층석탑 1기가 남아 있을뿐 잘 정리된 금당터나 절집 흔적은 찾기 어렵고 주변은 민가 몇 채와 경작지 등 사유지와 맞물려 있다. 그래서인지 거돈사 터나 법천사 터처럼 사적지로 지정되지 않고 흥법사 터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5호로 되어있다.

원주시와 지역향토 사학자들은 원주시 3대 폐사지(거돈사지, 법천사지, 흥법사지)중 유일하게 사적지 지정이 안된 흥법사지에 대하여 국가사적지로 지정해줄것을 건의했으나 올해에도 또 다시 유보됨으로써 '남한강 유역 폐사지''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에도 빨간불이 켜졌다며 불만스러워 하는 입장이다.

흥법사(興法寺)
원주시 지정면 영봉산(靈鳳山)의 아랫자락에 있는 흥법사가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연국사(寂然國師) 영준(英俊)이 932년(태조 15)에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이곳에 있었던 진공대사 탑비에서 진공대사가 940년(태조 23)에 이곳에서 돌아가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신라말에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다고 보이며

고려 태조가 흥법선원(興法禪院)을 만들어 진공대사에게 교화를 맡기자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기록과 진공대사가 구산선문의 봉림산문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 인근의 거돈사, 고달사 등과 더불어 고려 전반기의 선종계 사찰로 생각된다.

이 흥법사가 폐사된 것은 명확한 자료가 없어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전기까지 절과 진공대사 탑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1693년(숙종 19) 이곳에 도천서원(陶川書院)을 건립하였다가 1871년에 폐지하였다.

지난 2018년 흥법사 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금당지와 회랑으로 추정되는 건물지 3동과 석축 등이 확인되었으며 탑비로 추정되는 유구 두 곳이 발견돼 흥법사가 쌍탑을 가진 사찰로 짐작하고 있으며

9세기경 통일신라때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금동여래입상이 회랑으로 추정되는 건물지에서 발견되었는데 높이 약 7㎝ 크기 소형으로 대좌 위에 놓여진 불상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양식으로 보존처리후 추가 분석 예정이다.

3층 석탑  (보물 제464호)

흥법사 터 삼층석탑 (보물 제464호). 네모난 지대석 위에 이중 기단을 세우고 삼층을 올린 신라석탑 형식을 따른 고려 석탑으로 상륜부에는 노반과 (최근에 올린 것으로 보이는) 보주가 하나 얹혀있다.

아래층 기단은 모서리(우주)나 중앙(탱주)에 기둥모양은 없이 각 면마다 3개의 안상(眼象)과 그 안에 꽃모양이 피어나는 모습을 새겼으며 상층 기단은 유난히 크고 높아서 비례가 적절치 않아 보이는데 여러개의 돌을 판막이식으로 이어붙여 모서리 기둥(우주)을 의도한것인지 알기 어렵다.

또한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의 갑석(덮개돌)을 지붕돌처럼 경사가 급하게 만든것이 특징이며 상층기단에는 몸돌을 받치는 괴임을 3단으로 만들었다.

탑신은 기단보다 너무 작아서 비례미가 부족하고 기단부에는 보이지 않던 모서리 기둥을 각 층 몸돌에 새겼으며 특히 1층 몸돌에는 네모꼴 문비를 새기고 그 안에 문고리 장식을 넣었으나 마모가 심하여 아쉽다.

지붕돌 처마부분들은 훼손이 심한데 전체적으로 경사가 급하나 끝에서는 살짝 위로 치켜올렸으며 각 층급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진공대사 승탑 (보물 제365호)과 탑비 (보물 제463호)

ㅇ 진공대사(眞空大師) 충담(忠湛) (869~940)
신라 경문왕때부터 고려 태조때까지 나말여초(羅末麗初)를 살다간 승려.
속성이 김씨로 선대(先代)가 경주 계림(鷄林)의 대족(大族)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신라 귀족출신인 것으로 보이나 확실치 않음.

888년(진성왕 2) 20세에 부모가 사망하여 절로 보내졌으며 선사(禪師)로서는 드물게 법상종의 교리와 율장(律藏)을 연구하였다. 후삼국시대의 전운이 감돌고 흉년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당(唐)으로 건너가 운개사(雲蓋寺) 정원대사(淨圓大師)를 친견하고 자악선원(紫嶽禪院)에 들어가 성전(聖典)을 연구하다가 918년(경명왕 3) 귀국하자 태조 왕건은 충담을 왕사로 임명하고 흥법사를 중건하여 주석케 하니 이후 흥법선원(興法禪院)이 됨.

충담이 이곳 흥법사에서 940년(태조 23) 71세로 열반에 드니 태조는 시호를 진공(眞空)으로 내리고 승탑과 탑비를 세웠는데 태조 왕건이 손수 비문을 짓고 당 태종 이세민의 글씨를 모아 비석을 새겼다고 한다.

ㅇ 진공대사(眞空大師) 승탑(僧塔) (보물 제365호)
거돈사의 원공국사, 법천사의 지광국사가 그렇듯이 흥법사의 진공대사 역시 승탑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고 현장에는 탑비만 남아 있다.

진공대사 승탑과 석관 (보물 제365호).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데 승탑과 함께 석관(石棺)이 발견되어 그 당시 고승의 시신을 화장 뿐 아니라 매장(埋葬)도 했음을 알 수 있는 드문 경우이다.
진공대사 승탑 역시 8각원당형인데 기단의 중대석은 원통형으로 구름과 용을 새긴 운용문(雲龍文)을 화려하게 양각하여 이채로우며 귀꽃을 새긴 8각 지붕위에 8각의 보개를 얹어 많은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승탑의 기단부. 여러개의 돌을 이어붙인 사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기단을 올렸는데 하대석은 복련을, 상대석은 앙련을 새긴 대칭형이며 중대석은 원통형에 구름과 용무늬를 화려하게 새겼다.

하대석은 8각의 이중형태로 두툼한 모양인데 8면에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꽃무늬를 넣었으며, 윗 부분에는 큼직한 연꽃잎을 거꾸로 새긴 복련 무늬를 조각하여 연화대석을 만들었는데 8각 모서리마다 귀꽃을 새겨 장식하였다.

중대석은 하대석 위에 2단의 뚜렷한 굄을 올린후 둥근 원통형 모양에 양각으로 구름과 용무늬를 새겼는데 그 구조가 복잡하고 매우 사실적이다.

상대석은 귀꽃이 없는 등 하대석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단순하며 앙련 겹꽃잎을 큼직하게 새긴후 윗면에는 2단의 받침돌이 몸체를 받치고 있다.

승탑의 몸돌. 8각형 몸돌의 남쪽면에는 네모형 문비를 새겼으며 각 모서리는 기둥 모양을 새긴데다가 꽃무늬를 더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다만 각 면에 천인상이나 사천왕상 등의 조각이 없이 비어있어 아쉽다.
승탑의 지붕돌. 8각의 옥개석은 높이 들린 모습으로 겹처마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모서리 끝에는 크고 높은 귀꽃을 새겨 화려하다. 기와골 모양도 상세하게 묘사하였으며 막새기와까지 정밀하게 표현하였다. 위로는 역시 8각의 보개를 씌웠는데 그 위로 세밀한 상륜부는 보이지 않는다.
승탑의 옆에는 석관(石棺)이 놓여 있다. 아랫부분에는 안상을 새긴후 띠를 둘렀으며 각이 진 뚜껑까지 덮인 아담한 크기이다. 화장하는 불교식 장례법과 달리 매장도 했었다는 증거라고 하나 일부에서는 경문(經文)등 그와 관련된 유물을 담았던 돌상자, 즉 석함(石函)이라는 의견도 있어 분분하다.
ㅇ 진공대사(眞空大師) 탑비(塔碑) (보물 제463호)
원주 흥법사 터의 진공대사 탑비(보물 제463호). 비신은 깨어져 없어진채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으나 다행이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그 크기가 우람하고 화려하여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사각의 지대석과 받침돌인 귀부의 거북이가 한 돌로 되어 있으며, 용머리에 여의주를 물고 큼직한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내딛는 모습이다. 목은 짧고 등껍질 무늬는 두겹의 육각형 무늬 안에 만(卍)자 무늬와 연꽃을 새겼는데 왕사였음에도 王(왕)자는 보이지 않는다.

이수(지붕돌) 중앙 제액(題額)은 4각으로 眞空大師(진공대사)라고 전서(篆書)체로 새겼으며 그 주위로는 구름속에 2마리의 용이 마주보고 다투는듯한 모습이며 옆면에는 또 다른 2마리가 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는데 뒷면에도 대칭되는 4마리 용을 새겼다.

진공대사 탑비의 깨어진 비신 조각과 탁본. 비석은 깨어져 전체를 볼수는 없지만 그 내용은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니 다행이다. 임진왜란때 폐사될 즈음에 왜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보는데 글씨가 당태종 글씨라니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탁본하러 덤비다가 깨뜨린건 아닌지 의심도 된다. 뒷면에는 진공대사의 글을 새겼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진)

진공대사 탑비는 유일하게 고려 태조 왕건이 지었으며, 글자는 당 태종 이세민의 글씨를 모아 만든 집자비(集字碑)인데 글씨는 2-4cm의 행서로 신라 말엽에 이미 당(唐) 태종의 글씨가 전래되었음을 말해준다.

얼마전 진공대사 탑비의 탁본첩(28면)이 옥션 경매에 나와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소백산 비로사(毘盧寺) 진공대사 보법탑비(眞空大師普法塔碑) (경북 유형문화재 제4호)

경북 영주 소백산 비로사에도 진공대사 탑비가 있어 흥미롭다.
생몰이 비슷한데다가 고려 태조 왕건이 진공이라는 시호를 내리는 등 국왕과의 관계도 돈독한듯하며 어찌 동시대에 같은 시호를 받은 스님이 계셨는지 궁금하다.

영주 비로사 진공대사 탑비. (불교신문 사진)

염거화상(廉居和尙) 승탑 (국보 제104호)이 흥법사에 있었나?
우리나라 승탑의 효시이자 현존하는 승탑중 가장 오랜 승탑은 가지산문의 2대조 염거화상(廉居和尙) 승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승탑의 정확한 명칭은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傳 原州 興法寺址 廉居和尙塔)', 즉 '원주 흥법사 터에 있었다고 전(傳)하는 염거화상탑'인데 일제 강점기때 승탑을 취급하던 일본관리들이 원주시 지정면 흥법사 터에 있었다고 기록해 놓았기에 그렇게 부를뿐 원주 흥법사와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다고 한다.

따라서 흥법사를 설명하면서 염거화상이나 그 승탑을 연결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이는데 가지산문 개산조이자 조계종의 종조(宗祖)인 도의국사는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수도하였고, 그 제자이자 가지산문 2대조가 되는 염거화상은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서 머물었다고 하는데 現 양양 선림원지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승탑의 효시이자 가장 오래된 승탑인 염거화상 승탑 (국보 제104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야외전시중이며 정확한 명칭은 '傳 原州 興法寺址 廉居和尙塔'(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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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흥법사지는 문막에서 간헌관광지 방향으로 섬강 건너편 산자락 조금 높직한 지형에 민가 사유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네비게이션에 '흥법사지'를 입력하면 안내한다.

한동안은 주차하기도 마땅하지 않고 민가주택이나 농사짓는 밭가운데 있어 불편하였으나 2018년 발굴 조사후 나름대로 (사유지를 어쩌지 못해 비좁지만) 부지정리도 되어있고 약간의 주차공간과 간이식 화장실도 설치하였다.

원주시민들 바램대로 국가사적지로 승격, 지정되어야 할 듯하다.

비두리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0호)
남한강변을 나란히 달리는 531번 지방도로를 따라 거돈사 터와 법천사 터를 돌아본 후 문막으로 가다가 산 뒷쪽에서 평행하게 달리는 404번 도로를 타고 귀래면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비두 초등학교 아래 비두리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볼 수 있다.

지방도로 길 옆에 한 칸짜리 보호각 안에 있어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데 네비에서 검색 가능하다.

비두리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0호). 거북모양 비 받침인 귀부(龜趺)와 머릿돌만 있고 비신은 없는 상태인데 언제 누구의 비를 세우려고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며 본래 있던 위치도 알 수 없다고 한다. 거북이 머리를 돌려 뒤를 보는 모습이 특이하다.

180도 뒤틀린 거북의 목덜미가 선명하게 조각되었으며 돌려진 얼굴 모습은 오히려 단순한데 두 눈을 크게 뜨고 내 등에 무엇이 얹혔는지 보려는 듯하다. 거북 등의 귀갑무늬는 아무 장식없이 담백하게 육각형만 새겨졌는데 미완성으로 보인다.

귀부에 얹혀진 이수는 생각보다 크고 둔중한 모습이며 사방에 새겨진 용트림하는 운용문이 매우 생생하여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이수 윗면은 물이 고이는지 용 조각 사이로 물빠지는 구멍을 뚫어 놓았다.

전하기로는 구암 한백겸 선생의 신도비를 만들려고 했던것이라고 한다.
현재 한백겸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는 경기도 여주에 있는데 신도비의 경우 비두리 귀부와 흡사하다.

한백겸 신도비 (경기도 기념물 제165호). 경기도 여주에 있는데 비두리 귀부와 흡사하게 거북이가 뒤로 돌아다보는 모습이며 이수의 용트림도 비슷하다. (여주시청 사진)

김제남 신도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1호)
광해군에 의해 폐비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대비로 복위된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 연안 김씨 김제남 묘소와 사당, 신도비가 흥법사 가까이 있다.

김제남은 광해군에 의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역모로 몰려 아들 3형제와 함께 사약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일곱살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보내 방에 가두고 불을 때 죽이는 증살(蒸殺)에 처하였으나 인목대비는 차마 선왕의 부인임에 죽이지 못하고 폐비시켜 덕수궁에 유폐하였던 것이니

나중에 김제남은 다시 묘소에서 파내어 시신을 처형하는 부관참시에 처해졌는데 사돈 달성 서씨 서동주가 몰래 묻어 두었다가 인수대비 복위 후 이곳으로 이장하였으며 묘역 초입 삼거리에 신도비를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 신도비가 비두리 귀부처럼 거북이가 뒤로 머리를 돌린 모습이라 흥미로운데 마침 흥법사 가까이 있으니 한번 찾아 볼 일이다. 의민공(懿愍公) 김제남의 사당과 묘소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김제남 신도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1호). 인조반정 후 인목대비를 복위시키고 인조 명에 의하여 신도비를 세웠다. 비두리 귀부처럼 거북이가 뒤를 보고 있는 모습으로 (비두리 귀부는 왼쪽인데) 오른쪽으로 돌아보고 있다. 현재는 신도비에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원주 근처에서 뒤를 돌아보는 거북머리 귀부를 볼 수 있다는게 흥미로우며 비두리 귀부의 원래 주인이라는 한백겸 신도비가 멀지않은 여주에 있어 고달사 폐사지로 올라가는 길에 한번 찾아보면 좋을 듯하다.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계 속]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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