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에서 북쪽 서울로 흐르는 남한강을 따라가며 찾아본 폐사지 답사
고려때는 남경이었으며 조선에서는 수도 서울인 한양을 연결하는 국토 대동맥 남한강 수로(水路)는 당시 물류 수송의 고속도로이며 더불어 많은 사람이 모이고 흩어지는 중요 혈맥(血脈)이었다.
그런 요로를 따라 형성된 마을과 인접한 큰 사찰이 생긴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흥망성쇠를 피하지 못하고 폐사가 되어버렸으니 수로(水路)는 육로(陸路)나 철로(鐵路)로 바뀌고 생활거점도 달라져 잊혀져간 흔적들중 하나가 바로 폐사지가 아닌가 싶다.
그래도 이 골짜기 저 들판에 남아있는 폐사지를 찾아가노라면 잊혀진 역사와 문화, 인물들의 이야기가 고물고물 되살아나는 재미에 폐사지 답사는 계속된다.
일곱번째 폐사지 답사는 하남시(河南市) 동사(桐寺) 터
한동안 '춘궁리 절터'로 부르던 곳인데 백제의 초기 수도중 하나인 '하남 위례성' 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며 따라서 주변에 유물, 유적도 많은 곳이다.
▩ 하남 동사(桐寺) 터
하남시(河南市)
한강 남쪽, 서울의 동쪽으로 남한산성 아래 자리잡은 하남시는 과거 광주군 동부면 지역으로 서울의 팽창과 인구 증가, 중부고속도로 개통 등으로 1989년 시(市)로 승격되었는데
미사동 일대에서 구석기. 신석기 유물이 많이 발굴되었으며 이성산성 일대는 백제의 위례성이었다는 주장이 몽촌토성, 풍납토성과 함께 유력한 것으로 지목되고 있으나 그중 가장 희박하다는 것이 중론(衆論)인 듯하다.
ㅇ 동사(桐寺) 터 (춘궁리 절터) (사적 제352호)
하남시 춘궁동(시 승격 이전에는 춘궁리) 지역은 절 터가 여러 곳 발굴되었는데 멀리는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언급되고 있으나 남아있는 흔적이 열악하여 아쉽다.
그중 중부고속도로를 연결하는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외곽순환고속도로) 광암터널 못미처 고골 낚시터 아래에 있는 절터는 그동안 '춘궁리 절터'라고 불렀으나 1988년경 발굴 당시 桐寺(동사)라고 적힌 명문(銘文)기와가 발견되면서 '동사 터'로 부르게 되었으며 그 일대를 1991년에 사적 제352호로 지정하였다.
발굴시 금당터 등 4곳의 건물터가 발견되었으며 불상을 모시던 8각대좌와 여러 주춧돌들이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연결하기는 미흡한 실정이지만 커다란 5층탑(보물 제12호)과 3층탑(보물 제23호)이 남매탑처럼 남아있어 많은 답사꾼들이 들리는 곳이다.
현재 동사(桐寺) 터에는 근래에 지은 자그마한 신흥사찰이 하나 있는데 그동안 대원사 등으로 부르다가 최근 '천년고찰 동사(桐寺)'라고 바꾸어 그 뿌리를 이어가려는 의도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특별한 장식이나 조각없이 담백하며 규모가 큰 석탑으로 상층기단이 큰 편이며 특히 1층 몸돌이 2단으로 아랫단을 4개의 돌을 쌓고 그 위에 1장의 큰 돌을 얹어놓았다. 이러한 방식은 고려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이라고 한다.
기단부에는 모서리 기둥(우주)과 가운데 기둥(탱주)을,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을 새겼는데 얕아서 잘 식별되지 않으며 두겹으로 된 1층 몸돌 아래외에 1~5층 모든 몸돌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지붕돌은 1∼3층은 4장, 4층은 2장, 5층은 1장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 아래 층급받침은 1층은 5단, 2∼4층은 4단, 5층은 3단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돌 추녀는 큰 반전없이 수평으로 되어 있다.
하남 동사지(河南 桐寺址) 삼층석탑 (보물13호)
여러개의 돌로 이루어진 아래층 기단은 안상을 새겼으나 마모되어 희미하며 상층기단은 우주와 탱주, 각 몸돌에는 우주를 새겼으나 전체적으로 좁아 보인다.
1층 몸돌은 큰데 비하여 2, 3층은 급격히 작아져서 안정된 느낌을 주며, 지붕돌은 1, 2층은 5단, 3층은 4단의 층급받침을 두었고 처마 끝은 치켜올려져 경쾌하다.
5층탑과 함께 서 있어 남매탑처럼 잘 어울리며 1966년 보수공사를 실시할 때 탑 안에서 곱돌로 만든 소탑(小塔)들이 발견되었다.
남한산성 아래 자리한 동사(桐寺) 터는 건너편으로 이성산성이 바라보이는 하남 위례성 지역이라는 고골(古谷, 옛 광주유수부의 중심지, 古邑이 있던 동네라는 뜻)에 있는데 발굴후 정리된 식별된 부지는 없으나 5층과 3층 석탑이 남아있어 한번쯤 둘러볼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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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동사지'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하면 안내한다.
고골 낚시터를 치고 가도 곳곳에 안내간판이 잘 되어 있다.
주변에 이성산성과 광주향교, 약사마애여래좌상(보물 제981호) 등이 있어 하루쯤 시간내어 천천히 둘러보면 좋다.
이성산성(二聖山城) (사적 제422호)
해발 209m의 이성산(二聖山)은 백제의 왕자 2명이 머물었다는 전설이 있어 붙인 이름이라고 하며 남한산성에서 금암산을 따라 이어진 줄기에 속하는데 배후(남쪽)의 평야지역을 방어하고 한강유역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다.
총길이 1,925m인 이성산성은 한때 백제의 수도 하남 위례성이라거나 고구려 축조설이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십여차례 발굴조사 결과 신라 유물들이 대다수 출토되고 있어서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6세기 중반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여전히 하남 위례성을 주장)
상중하 교량모양의 받침대위 연꽃이 가득핀 연화대좌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부처님은 질병에서 구해준다는 약사불인지라 왼손에 약합을 들고 오른손은 들어올려 시무외인(두려워하지 말라는)을 취하고 있는데 뒤로는 신광과 두광이 두 세겹으로 또렷하다.
왼쪽 여백에 세로 3줄로 글씨가 새겨졌는데
太平二年丁丑七月二十九日 古石佛在如賜乙 重脩爲今上 皇帝萬歲願
(태평이년정축칠월이십구일 고석불재여사을 중수위금상 황제만세원)
태평2년, 즉 고려 경종2년(977)에 이미 있던 고석불(古石佛)을 중수하였다는 것이며 황제의 만세를 기원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직접 읽어보면 몇 글자가 달리 읽히는데 확실치 않은 점도 있어서 무어라 반론을 제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鐵造釋迦如來坐像) (보물 제918호)
하사창리(시 승격후 하사창동)에 절터가 있었는데 지금은 찾기 힘들다고 하며 이곳에서 발견된 철불(鐵佛)이 국내최대크기라고 하는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폐사지 답사기 6편 (고달사지 2부)에서 원종대사 찬유가 머물렀다던 천왕사(天王寺)가 이곳으로 짐작된다고 하였는데 '하사창리 절터'라고 부르던 이곳에서 천왕사(天王寺)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는 특별한 흔적이 없으니 답사차 찾아가 볼 것이 없어서 아쉽다.
이렇듯 서울에서 가까운 하남시 권역에 제법 둘러볼 곳이 많다.
그밖에도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이 멀지 않으니 전체를 묶어서 가벼운 산행 겸 답사로 다녀오기에 좋은 곳이다. 머잖아 추위가 물러가고 새봄이 와서 이 힘들고 지겨운 코로나도 잠잠해지면 가볍게 돌아보기를 권해본다.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계 속]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