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2.09 14:54

겨울 같지 않은 바람 꽁무니를 따라 빠르게 걷는 저녁 어스름 휴일 문래공원. 누가 앞뒤 가고 오는지, 나만 가고 있는지, 그저 너나없이 만들어진 길을 걷는 사람들. 이미 정해진 길쭉한 7분짜리 공원 산책길 따라 줄줄이 돌고 도는 사람들. 걷다가 스친 나무 의자. 나도 앉았을 의자, 거기 중절모 남자가 다시 눈에 띄었다. 아직 비스듬히 길게 앉아 있는 중절모를 쓴 남자. 세 바퀴째 돌지만, 그 자세 그대로다.

가짜 꽃. 누가 분명히 꽂아준 것이 분명하다. 색 바랜 중절모 옆, 연두 잎이 달린 꽃. 분홍 꽃봉오리가 사그라질 듯, 사내 고개 따라 제 고개를 땅 쪽으로 누이고 있다. 처음부터 냄새가 없이 만들어진, 차라리 사람 내음이 밴 꽃. 나 때문이었을까? 하필 이때, 내 걷는 소리를 따라 몸을 내 걷는 방향으로 돌려 앉는 남자. 꿈속에서도 우스꽝스러운 내 엉덩이를 보았을까, 웃는지 아픈지 입가 낡은 주름이 떨린다. 굵고 검게 드러나는 입술이 뭐라고 꿈틀거리는 듯.

'오후 내내 웅크리고 있었던 것, 왜? 후, 너네는 모를 것이다. 주름이 거무스레하다거나 내 눈동자 움직거리지 않는다거나, 뭐 그래서 지금 여기 앉은 이유를 모를 거다. 하루를 살고 죽는데, 그러면 또 하루가 생기는데, 내가 쓴 밤색 중절모가 내 나이만큼 숨이 헐떡거리는 걸 알 리 있을까. 나를 보는 사람들아, 그래 너도 지나치는 사람이구나. 그러나, 분명,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인 것을. 너희도 나처럼 웅크릴 것이언만.'

그 남자의 얼굴엔 오랜 시절 웃다 울다 생긴 주름만 보였다. 눈코입귀 주름들도 낡은 중절모 귀퉁이 너덜 헤진 상표처럼 제자리를 헤매고. 나이를 세는 일이 귀찮다는 듯, 씰룩거리는 입술로 새어 나오는 소리들, 시간 가는 소리보다 작은 그 소리들은 땅 어디도 앉지 못하고. 그랬다. 그 소리는, 사시사철 겨울인 그의 가슴에서, 매몰차게 내 목덜미를 시리게 하는 말이 되어 문래공원 길가를 날아다니다, 그렇게 얼다가, 또 숨다가 내 발에 툭툭 차이는 것이었다.

'말을 하건 기침을 하건, 주머니에서 휴지 같은 것을 꺼내 입언저리를 감싸야겠어. 나도 내 안에서 나갈 때가 됐거든. 사람은 언제나 나갈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는 거야. 휴지 같은 것에 싸서 꺼내 보면, 허, 참 내 맘은 아니더라고. 그래도 하루에 세 번 침을, 스스로 삼키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어? 세 번 다 세고 나면, 한꺼번에 힘이 빠진다니까. 그래서 삼키지 않으려 참아. 참으며, 사람이 만든 이 꽃을 모자에 꽂고 있어. 겨울 문래공원 산책 내내 이 꽃을 모자에 달고, 입을 가린 채 고개 기웃 기울이고, 세상을 보는 거지. 어디 한 곳은 뚫어지게. 뚫어진 곳으로 들어가 보게!'

중절모 남자를 뒤로하고, 그가 매단 꽃 모양을 떠올린다. 그래 모자는 짙은 밤색이었고, 그 꽃은 왼쪽에 꽂혀있었다. 그런데, 허 그런데, 웬걸! 그 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쓸데없이 떠오르는 중절모 남자는 모자 속에 가득 자기 말을 가두어 놓은 듯하다. 멀어질수록 내 귓바퀴를 뱅글뱅글 맴도는 중절모 속 말들, 뒤통수 머리카락에 매달려 날 간지럽히는 말들을.

'뭐, 안된 얘기네만 이 꽃은 내가 달았지, 히히! 나를 보는 사람은 내 모자만 보라고 말이야. 가슴속에 단 꽃은 말로 설명하기란 얼마나 힘들다구.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정확한 색과 모양새가 뭔지 모르더라구. 내 입가에 맺힌 마른 잡풀 같은 주름살이 확인하고 또 확인했어. 이 모자 꽃이나 잡풀이나 그들이나 나나 모두 한 번은 같아질 거라는 말 말이야. 물론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다른 사람이 없는 시간에도 모자를 쓰고 있지. 내 꽃이 달랑거리는 중절모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보는 거지. 사람보다 이 중절모를 조금씩 더 사랑하고 싶은 걸 어쩌겠나.'

물론 그랬다. 나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나만의 것을 가지고 있을까? 나를 사랑하려면, 내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중절모 남자의 그 꽃을 한 번 만져보면 어떨까. 그 느낌을 내 주머니에 넣으면 어떨까. 어디에 있든,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마다, 내 것을 무엇으로 할까 생각하게 될 테니. 그렇게 몇 해 지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도 만지고 있을까. 그래, 새끼손가락 몽당연필과 구겨진 종이 쪼가리라며 만지작거리고 있을까. 거기엔 혹시 그도 하고 싶은 이런 말이 쓰여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중절모에 달린 분홍 빨강 꽃 위 먼지만큼 가벼운 시간이 찾아오면, 내게 꽃이 매달려 있는지 아닌지를 잊으려네 그랴. 몸도 슬픔도 내 모자에서 달아날 것 같아서네. 뭐, 세상은 이 꽃을 그냥 두지 않을 거고, 또 그대일지도 모르는 그 누군가가 중절모 쓰고 이 문래공원 어느 즈음에 비스듬히 앉아, 흐르는 세상 풍경을 쳐다보고 있을 테지. 다른 꽃을 꽂고 말이야. 또 다른 누군가는 마음껏 새 바람 새 시간을 자기 심장이나 배꼽에 매달고 그 곁을 지날 것이네. 하, 그래, 그렇군. 이젠 이 모자며 내 꽃도 그냥 가져가시게. 내가 가지고 있는 기쁨 같은 것 모두 주려니.'

네 바퀴째 돌며 다시 다가오는 중절모 남자 의자. 둘 셋, 몇몇 사람이 중절모 꽃향기가 왜 사라졌을까 확인하려는지 멈칫 어른거린다. 왜 그럴까, 점점 다가설수록 가벼워지는 손과 발. 순간, 먼저 눈에 띈 것은 땅을 향한 중절모와 하늘을 가리키려던 그의 손가락이었다. 더는 기울어질 것 없는 옷자락 안에서 살랑이던 그의 숨결이 슬며시 내 주머니로 들어오며 웃는다. 분명, 단 한 번, 즐거운 때가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됐다며, 그래서 지금 웃는다며.

그의 의자를 지나치자, 중절모를 벗어든 남자 그림자가 앞섰다. 흔드는 이내 손끝마다 매달리는 중절모자 그림자가 희다. 그래, 앞사람이 그랬으니, 나도 하얗게 돈다. 하, 그다음 그 뉘도 그 뉘를 따라 돌 것이다. 그것이 문래공원 법칙이다, 맞다. 지구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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