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사찰 회암사의 몰락
고려말 조선초에 걸쳐 전국 사찰의 총본사였으며 국내 최대규모의 사찰이었던 회암사는 지공, 나옹, 무학 등의 고승들이 선맥(禪脈)을 이어 주석하던 최고의 가람이었으며 조선 개국후 태상왕(태조 이성계)이 머물러 조선왕실사찰의 꽃이라 부르는 절집이었다.
조선왕조 200여 년동안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번창하던 회암사는 보우대사를 통한 문정왕후의 지원을 마지막으로 몰락하게 되는데 왕실사찰로 조선시대 최고의 영화를 누린 것이 오히려 유생들이나 반대세력의 표적이 되어 일순간 불태워지고 폐허가 된 듯하다.
조선왕조 실록에도 "개성 사는 유생이 이성계가 살던 양주 회암사를 불태우려는 시도가 적발됐다."(1566년 4월 20일 '명종실록')고 하였으며, 다시 30여 년이 지난 '선조실록'에서는 '회암사 옛터'라고 함으로써 이미 폐사(廢寺)가 된것을 알 수 있다.
지공-나옹-무학 3화상(三和尙) 승탑과 탑비 훼손 사건
하루아침에 불타버리고 잿더미가 된 회암사 터에는 지공, 나옹, 무학 등 3화상의 승탑이나 탑비 같은 석조 유물들만 남아 있었을 것이나 이 승탑과 탑비들마저 훼손되는 일이 생겼으니 광주 사는 유생 이응준이 술사(術士) 조대진의 말을 듣고 폐사가 된 회암사 자리에 선친의 묘를 옮기기 위해 저지른 짓이었다. (순조실록, 1821년)
이렇게 불교탄압에 편승하여 명당이라고 알려진 절터에 조상 묘를 쓰는 것이 당시 지방 유력자들이나 출세한 사대부들간에 심심치 않게 있었는데 이미 폐사지가 된 회암사지를 두번 훼손하는 일이 벌어진것이다.
이 일은 곧 세상에 알려지고 조정까지 보고되어 왕명으로 두 사람은 섬으로 유배 보냈으며 양주 관리들도 문책하고, 훼손된 승탑을 복원하고 탑비는 다시 만들어 세우도록 하였다.(1828년, 순조28) 생각보다 일이 커진 것이었다.
배불(排佛)의 조선 조정이 어찌 이리 과감한 조치를 한 것일까? 그것은 단순한 훼불(毁佛)이나 평범한 비석 파손 사건이 아니라 조선왕조 유일한 왕사 무학대사 열반후 태상왕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아 태종 이방원이 예문관 제학 변계량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게 해 세운 조선의 국보급 비석이었던것이니 국조(國祖)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건이자 왕실모독죄에 해당하는 대역죄였기 때문이다. (지공선사 탑비도 비록 전 왕조이기는 하나 고려 공민왕의 각별한 배려와 지시로 세워진것이다.)
다시 태어난 회암사
그리하여 순조의 왕명으로 삼화상의 승탑과 탑비를 수습하고 파손된 지공선사와 무학대사의 비석은 다시 세우게 되었으며, 이 문제를 경기도내 사찰의 스님들이 모여서 의논한 끝에 폐사지에서 800m쯤 올라간 산 중턱에 흩어진 삼화상의 유물들을 모시고 그 옆에 작은 암자를 지어 상주하면서 관리하고 보호토록 하였다.
그렇게 훼손된 삼화상 승탑과 부도를 다시 세우고 그 옆에 작은 암자를 지어 폐사된 사찰 이름 회암사를 이어받도록 하니 폐사지 윗쪽에 있는 지금의 회암사가 바로 그것이다.
처음 작은 암자였던 회암사는 다시 100여 년이 지난 1922년 봉선사 주지 홍월초화상이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으며, 이후 1977년에 호선대사가 서북쪽에 큰 법당을 짓는 등 중창노력을 기울여 규모를 키웠으니 현재 회암사는 대부분 최근에 새로 지은 건물들이다.
회암사지 발굴
그러나 회암사지가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되고 삼화상 승탑과 탑비들이 보물 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을뿐, 회암사는 대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 넓은 폐사지에도 별반 관심들이 없어 잊혀진채 지나고 있었다.
그러던중 1997년 3월 30일 회암사를 품고있는 천보산에 산불이 났고 절집 근처까지 타 들어온 불길은 왼쪽 능선에 서 있던 나옹선사의 탑비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 비각에 옮겨붙어 몽땅 태워버리고 보물 비석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삼화상 탑비중 지공선사와 무학대사 탑비는 순조때 훼손되어 다시 세웠으며, 잘 남아있던 나옹선사의 탑비마저 20세기말에 산불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으니 삼화상 스님들의 유물 역사가 참으로 고단했던 것이다.
아무튼 산불이 나자 갑자기 세상의 이목이 쏠렸다. 보물 비석이 산불로 산산조각이 났다고 안타까워하며 회암사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고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었음을 개탄하는 여론에 부랴부랴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고 장기간에 걸친 발굴 조사에 착수하였다.
이제 회암사지(사적 제128호)는 국내최대규모의 폐사지로 선종사찰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였다는 평가와 함께 조선왕실사찰의 꽃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많은 탐방객들이 다녀가는 곳이 되었는데 회암사지 박물관에서 시작하여 폐사지를 둘러보고 현 회암사에 있는 삼화상의 승탑과 탑비를 둘러보는 답사코스를 권장한다.
삼화상(三和尙)의 승탑과 탑비
현재 회암사 동쪽 산자락에 위에서부터 나옹, 지공, 무학대사 순으로 승탑과 탑비를 함께 모셔놓았는데 나옹선사 탑비만 반대쪽인 서쪽 능선위에 홀로 세워져 있다. 3화상의 승탑과 탑비를 하나씩 알아보기로 한다.
ㅇ 지공선사(指空禪師) 승탑(僧塔)과 탑비(塔碑)
지공선사(指空禪師)
서천국제납박타존자지공대화상(西天國提納薄陀尊者指空大和尙)이 공식 존칭이며 법명은 제납박타(提納薄陀:禪賢)라고 부르는 인도의 고승이다.
인도 마가다국의 셋째 왕자로 나란타사(那爛陀寺)에서 계를 받았으며 나란타 불교대학이 이슬람의 침입으로 폐교가 되자 나란타 불교대학의 마지막 졸업생이 되어 인도 전역 순례를 마치고 중국 원나라로 건너갔다.
원나라 천자를 만나 불법을 펴고 총애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고승 지공은 1326년(충숙왕 13) 3월 고려에 들어와 1328년 9월까지 2년 반 동안 금강산 법기암, 개경 감로사와 숭수사, 인천 건동선사, 양산 통도사 등 전국 사찰을 방문해 법회를 열고 법을 펼쳤다.
3년이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지만 국왕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지공을 추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국순회법회를 마치던 그 해 지공은 회암사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회암사의 산수형세가 천축국의 나란타사와 같으니, 이곳에서 불법을 펼치면 크게 흥할것이다"라고 하였다.
연경으로 돌아 온 뒤 지공은 고려인이 지은 사찰 법원사(法源寺)에서 머물며 고려에서 건너오는 유학승들을 맞게 되었는데 1348년 유학 온 28세의 나옹을 만나게 되어 3년간을 사제간으로 가르침을 전하였으니 지공의 법맥은 나옹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나옹은 스승이 회암사를 중요하게 생각함을 가슴에 새기게 된다.
1363년 지공선사가 입적했다. 그의 입적이 고려에 알려지고 1370년 사도(司徒) 달예(達叡)가 유골을 받들고 고려에 오자 왕이 직접 지공의 두골을 머리에 이고 궁중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1372년(공민왕 21) 왕명으로 회암사에 사리탑을 세웠는데, 이색이 지은 「서천제납박타존자부도명」이『목은집』에 전한다.
나옹ㆍ백운화상(白雲和尙) 경한(景閑)ㆍ무학 자초(無學 自初)ㆍ대지국사 지천(大智國師 智泉)등이 대표적인 그의 문도이다. 나옹은 왕사(王師)로 책종되었고, 나옹의 문도인 환암 혼수와 무학 자초는 조선개국을 전후하여 가장 영향력이 큰 고승이었으니 지공선사가 이 땅의 불교계에 끼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지공선사(指空禪師) 탑비(塔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5호)
현재의 회암사 절집 마당에서 동쪽 능선으로 올라서면 지공화상 승탑과 탑비가 먼저 나온다. 그 위로 나옹선사의 승탑과 탑비가 있고 아래로 무학대사의 승탑과 탑비가 있으니 3화상중 가장 스승인 지공선사가 중앙에 있는 것이다.
승탑을 모신 석단 앞에 3m가 넘는 큼직한 탑비가 서 있는데 앞뒤로 긴 모양의 직사각형 지대석 위에 받침대와 비신, 가첨석이라고 하는 지붕돌이 얹혀진 온전한 모습이다. 이 탑비가 순조때 조대진의 사주를 받은 이응준이 훼손하여 왕명으로 다시 세운 것으로 탑비에 '崇禎紀元後四戊子五月 日立(숭정기원후사무자오월 일립)'라고 새겨져있어 1828년(순조 28) 5월에 중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래는 1370년 지공선사의 유골이 고려에 들어온 후 공민왕의 지시로 1372년에 승탑이 세워졌고 2년이 지난 1374년에 탑비를 세웠는데 목은 이색이 비문을 짓고 이희현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그 옆에 비신은 없이 남아있는 귀부와 이수(지붕)가 그때 훼손된 원래 지공선사의 탑비 받침대와 지붕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관련이 있는 석재로 보인다.
지공선사(指空禪師) 승탑(僧塔) 및 석등(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석등과 석상, 승탑 모두가 큼직큼직한데 별다른 문양이나 조각은 없어 단조롭고 수수하며 그 기법이 단순하나 보면 볼수록 멋스러운 느낌이다.
앞에 있는 석등은 단순한 사각형의 하대, 중대, 상대석이 듬직하며 화사석(火舍石)도 상대석을 받침삼아 2개의 석재를 좌우로 세워 앞 뒤로 2개의 화사창을 내었으며 별도의 윗돌없이 4각 지붕돌을 덮어 마감하였는데 지붕 위는 네 모서리 선을 굵게 내었을뿐 아무런 장식이 없고 위로는 탑 상륜부처럼 노반, 복발, 보주를 얹었다.
중간의 석상 역시 단순하고 간결하게 세웠는데 지대석 위에 2개의 받침돌을 나란히 세우고 네모난 상석을 얹은 모습이 담백하여 아름답다.
뒤에 있는 승탑은 지공선사를 모신 것인데 지대석과 상중하 받침대, 지붕돌 등이 8각을 기본으로 하나 몸돌은 둥근 모습인데 높이보다 좌우가 넓어 안정감이 들며 승탑 외부에 아무런 조각이나 문양이 없어 역시 담백하고 단순하다.
지대석과 하대석은 정직한 팔각이지만 중대석은 배가 불러 둥글게 보이는 팔각으로 모양을 달리하였으며 상대석도 팔각이지만 윗면이 아랫면보다 넓어서 몸돌을 받치는 역할을 안정감있게 보여주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구성하였다.
팔각 지붕돌은 큼직하고 높아서 경사가 가파른데 윗면의 여덟 모서리선을 두툼하게 새겼을뿐 아무런 장식없이 처마 끝부분을 살짝 들어올렸다. 지붕위에는 노반 역할을 하는 큼직한 8각 부재를 얹은 후 여러개의 보륜과 보주를 올렸다.
*** 회암사지 답사기는 양(量)이 많아 여러 편으로 나누어 싣습니다.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계 속]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