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3.05 18:00

ㅇ 나옹선사(懶翁禪師) 승탑(僧塔)과 탑비(塔碑)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
고려국공민왕사나옹대화상(高麗國恭愍王師懶翁大和尙)이 공식존칭이며 경북 영해(영덕) 출신으로 성은 아씨(牙氏), 속명은 원혜(元惠), 휘는 혜근(慧勤), 나옹(懶翁)과 강월헌(江月軒)은 호이고, 법호는 보제 존자(普濟尊者), 시호는 선각(先覺)이다.

스무살에 친구의 죽음에 무상함을 느껴 출가후 여러 절집을 다니다가 1344년(충혜왕5)에 회암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1347년(충목왕 3)에는 원나라에 가서 연경의 법원사에서 3년간 지공선사에게 수학하는등 11년을 머물면서 임제종의 평산처림(平山處林)과 지공 두 스승으로부터 법(法)을 이어받았으며

연경 광제선사의 주지로 임명되고 금란가사를 하사받는 등 원의 순제(順帝)에게 인정 받았으나 황제의 만류에도 1358년(공민왕 7) 고려로 돌아오니 나옹의 나이 39세였다. 공민왕의 청으로 신광사에 2년여 머물기도 하였으나 전국 산천을 다니며 인연따라 지내다가 말년에 양주 회암사에서 절을 중수하고 교화활동을 펴자 많은 사람들이 본업을 잊고 몰려들어 길이 메워질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나란타사에 버금가는 절을 세우라는 스승 지공선사의 당부에 따라 나옹이 중창불사에 전력을 기울인 4년여, 마침내 불사를 마치고 회향(준공) 법회를 열게 되는 1376년(우왕 2) 갑자기 밀양 영원사로 내려가라는 왕명이 떨어진다.

전국의 백성들, 특히 아녀자들이 일손을 멈추고 몰려들어 농번기에도 불구하고 생업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유였으나 조정에서는 수도 개경에서 멀지않은 양주땅에서 백성들에게 추앙받는 고승을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왕명에 따라 밀양으로 내려가던 나옹은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에 드니 그의 나이 57세로 그래서 나옹선사의 승탑이 신륵사와 회암사 두 곳에 있게 된것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나옹선사

나옹선사(懶翁禪師) 승탑(僧塔) 및 석등(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지공선사 승탑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제자인 나옹선사의 승탑이 있다. 석축을 올리고 석단(石壇)을 쌓아 석등과 석상, 승탑을 모셨는데 단촐해보인다.>
<나옹선사 승탑과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중간에는 석상이 있는데 아래에 있는 스승 지공선사의 석물과 비슷한 느낌이다. 탑비는 이곳에 없고 반대편 (사찰 서쪽)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다.>

스승보다 위에 모셨으니 우리네 장례법으로 보면 역장(逆葬)이 되는 셈인데 3화상의 승탑과 탑비 자리가 본래 이곳이 아니고 산 아래 회암사지 절터에 있는 거대한 승탑 근처였을것으로 보는바 훼손 후 다시 정리할 때 이렇게 자리 잡은 듯 하다.

나옹화상의 석등과 석상, 승탑은 스승 지공선사의 그것과 비슷해 보인다. 역시 모두가 큼직큼직하고 별다른 문양이나 조각 없이 담백하고 수수하며 그 기법이 단순하지만 나름 멋스럽다.

석등은 지공선사 석등과 판박이처럼 닮았다. 다만 사각지붕 처마의 반전이 높아 치켜 올라간 정도가 크고 상륜부가 조금 다를 뿐인데 전체적으로 지공선사 석등이 더 크고 투박한 느낌이다. 그 뒤에 있는 석상도 닮은 꼴인데 지공선사는 받침대 2개를 나란히 세웠으나 나옹화상 석상은 작은 받침돌 3개를 品자 모양으로 받친 점이 다르다.

승탑도 지대석과 하대, 중대, 상대와 몸돌까지는 지공선사 승탑과 비슷하나 조금 작고 슬림해서 날씬해 보일뿐이다. 다만 지붕돌이 더 좁아서 솟아 오른 느낌이며 상륜부는 보륜 4개와 보주를 얹었다.

나옹선사(懶翁禪師) 탑비(塔碑) 선각왕사비(禪覺王師碑) (보물 제387호)

<승탑과는 반대쪽 능선에 위치한 나옹선사 탑비 '선각왕사비(禪覺王師碑)' (보물 제387호). 1977년 산불로 불타서 깨어져버려 모조품을 만들어 세운 것이다. 오른쪽 뒤편으로 원래 탑비의 거북 비좌가 보인다.>
<파손 전 '선각왕사비' 모습. 여기에 보호비각을 지어 건물 안에 탑비가 있는 형태였는데 산불이 나자 비각의 목재부분에 쉽게 불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출처=문화재청>

나옹선사 입적후 시호를 '선각(禪覺)'으로 내리니 그의 탑비가 '선강왕사비(禪覺王師碑)이다. 현재 회암사 서쪽 능선에 서 있는 것은 복제품이며 진품은 1977년 화재로 파손된것을 보존처리하여 되살린후 경기도 박물관을 거쳐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선각왕사비는 거북 비좌에 비신을 세웠는데 별도의 머릿돌 없이 비석 윗부분에 2마리 쌍용을 입체적으로 새기고 그 중앙에 명칭을 쓰는 자리인 제액(題額)에는 전서체로 '禪覺王師之碑(선각왕사지비)'라고 새겼다.

이러한 형태를 당(唐)나라 비석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이라고 하며 비문은 목은 이색이 짓고 권중화가 썼는데 글씨를 예서체로 쓴 흔하지 않은 비석이다.

지대석과 하나의 돌로 된 거북 모양 귀부는 세월 탓인지 그 모습이 또렷하지 않고 많이 퇴색하였으며 풍화에 시달려 조금씩 뭉개지고 지워지는 모습이다.

<산불로 비석이 산산이 부서진 모습/ 사진출처=경인일보>
<부서진 비석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후 경기도 박물관에 위탁보관하였다가 현재는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회암사지 현장에 양주시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이 생겼는데 옮겨지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 사진출처=문화재청>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鍾) (보물 제228호)
<나옹화상 승탑은 여주 신륵사에도 모셔져 있는데 법명을 붙여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鍾)'이라고 한다. (보물 제228호) 회암사 승탑이 1376년에 세워졌고 신륵사 승탑은 3년 뒤인 1379년에 세워졌는데 팔각원당형에서 종형(鐘形)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사진출처=문화재청>

회암사지에서는 나옹선사 승탑이라 하고 (탑비는 선각왕사비) 신륵사에서는 보제존자 석종이라고 한다. 나옹선사나 보제존자나 같은 말이지만 승탑(과거에는 부도)이라 하지 않고 석종(石鐘)이라고 한 것이 특이한데 돌(石)로 만든 종(鐘) 모양으로 생긴 부도라는 뜻인듯 하다.

넓직하고 높게 올린 단(壇)을 쌓고 앞과 옆으로는 계단을 내었으며, 단층 기단(基壇) 위에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가 솟아 있다.

회암사지 승탑 3년후 신륵사 석종이 세워졌는데 팔각원당형 승탑이 종형(鐘形)으로 바뀌는 흐름을 볼 수 있어 참고가 된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普濟尊者石鍾碑) (보물 제229호)

<신륵사 나옹화상 탑비,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鍾碑)'라 한다. (보물 제229호) 승탑(석종비) 옆에 있으며 3단의 받침대 위에 비신(몸돌)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었는데 공력을 많이 들인 모습이다/ 사진출처=문화재청>

넓은 사각 지대석 위에 3단 받침대를 세웠는데 1, 2단은 단순한 사각형이나 3단은 사각형 위에 모루처럼 생긴 모습을 높여서 연꽃잎을 상하 대칭으로 새겼다. 비 몸돌 옆에도 보호 돌기둥을 붙여 세운 것이 특이하다.

지붕돌은 기와지붕을 본떠 올렸는데 전체적으로 탄탄해 보인다. 회암사 탑비와 마찬가지로 목은 이색이 비문을 지었는데 글씨는 서예가 한수가 해서체로 썼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石燈) (보물 제231호)

<보제존자 석종(승탑) 앞에 비석과 함께 서 있는 석등이다. (보물 제231호) 전체적으로는 팔각형을 기본으로 지대석 위에 하대, 중대, 상대의 받침대를 세우고 보기드물게 8각 화사석에 8개의 화사창을 내었으며 8각지붕을 얹었다/ 사진출처=문화재청>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하대, 중대, 상대석이 하나의 돌로 되었는데 하대석에는 커다란 향로의 다리가 연상되는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윗면에는 커다란 연꽃잎을 복련으로 조각하였다.

잘록한 느낌의 중대석은 8면마다 커다란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는 큼직한 당초연화문을 새겼고 8면이 만나는 지점마다 대나무 모양의 기둥을 양각으로 새겼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대칭으로 앙련을 새겼으며 윗부분은 화사석을 받치려고 팔각으로 평평하게 마감하였다.

화사석은 8각의 8면에 8개의 화사창을 냈는데 윗면이 홍예문처럼 둥글게 생겼으며 창문위와 창문 사이에 비천상(飛天像)과 용무늬를 양각으로 새겼는데 그 모습이 매우 또렷하게 역동적이다. 이러한 모습의 화사석은 흔치 않다.

지붕돌 역시 8각으로 하였는데 8면마다 굽어지는 정도가 커서 경쾌한 느낌이며 위로는 원형 노반과 복발, 보주를 얹어 마무리 하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만나는 석등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데 마치 청동으로 만든 8각등을 석조 받침대 위에 얹은것 같은 느낌이었으며 그만큼 세밀하고 전체적으로 작품성이 뛰어난 석등이다.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令傳寺址 普濟尊者塔) (보물 제358호)
나옹선사의 승탑(사리탑)이 회암사와 신륵사 말고도 한 곳 더 있다해서 찾아보니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불탑 2기가 그것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석탑 2기.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令傳寺址 普濟尊者塔)(보물 제358호)이다. 보제존자(普濟尊者), 즉 나옹선사 사리탑이라는 것인데 일반적인 승탑(僧塔)처럼 팔각원당형이나 종형이 아니라 부처님 사리를 모신 불탑(佛塔), 즉 일반적인 석탑의 모습이다.>

나옹선사가 신륵사에서 입적한 후 제자들에 의해 영전사(令傳寺)에도 따로 사리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승려의 묘탑(사리탑)으로 불탑(석탑)을 세운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며 그것도 2기를 세운 것은 더더욱 드문 일이다.

1388년(우왕 14), 회암사 승탑보다는 12년 늦게 세워졌는데 일제강점기인 1915년 일본인에 의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세워졌다고 한다.

영전사(令傳寺)가 아니라 영천사(靈泉寺)?
그런데 강원도 지역 문화계 인사들과 재야(在野)의 고수들 간에 이 탑은 영전사(令傳寺) 탑이 아니라 원주 영천사(靈泉寺) 탑이며 수량도 2기가 아니라 3기라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고 이에 대한 시정요구가 빗발치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영전사(令傳寺)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 당시 기록카드 정리의 오류라는 것이며 (조선고적도보 외에는 영전사라는 절 이름을 찾을 수 없다 함) 현재 원주에 있는 영천사(靈泉寺)가 맞다는 것이다.

게다가 탑도 2기가 아니라 3기라는 것이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2기 외에 나머지 1기는 같은 장소에 다른 절이름 석탑으로 잘못 전시되고 있다는 주장인데 자세한 이론적 논거를 여기에 모두 옮길수는 없고 그 대략만 소개한다.

<일제가 작성한 '조선고적도보'에 나오는 영천사 탑 3기. 이중 왼쪽과 가운데 2기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영전사지 보제존자탑으로 명시하여 전시중이라는 것이며 오른쪽 1기는 역시 같은 장소에 천수사 삼층탑(아래 사진)이라고 명칭을 붙여 잘못된 채 전시중이라는 주장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천수사 3층탑'. 위 조선고적도보 사진에 나오는 오른쪽 탑으로 영천사 탑 3기에 포함되어야하나 천수사 탑으로 잘못 분류, 전시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원주지역을 중심으로 범 강원도 차원으로 진행되는 '영천사명 찾기 운동'에 문화유산 답사의 재야 고수들도 합류한 양상인데 이러한 이론(異論) 주장에 대한 귀추가 주목된다.


*** 회암사지 답사기는 양(量)이 많아 여러 편으로 나누어 싣습니다.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계 속]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조선일보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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