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3.22 14:55

▩ 강도(江都) 강화도(江華島)
강화도는 고려때 몽고의 침략을 피해 개경을 떠난 39년간 (1232~1270년) 임시수도였기에 강도(江都)라고도 부른다.

이때는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있던 무신정권 시대로 최충헌의 아들 최이(최우)가 고종을 압박하여 천도(遷都)를 감행하였는데 이후 계속되는 몽골의 출륙환도(出陸還都) 요구를 무시하고 대몽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말이 좋아 항쟁(抗爭)이지 최씨 무신정권은 자신들 일족의 안위가 더 중요하였고 대를 이어 권력을 승계하였을뿐 강화도를 제외한 고려강토는 아무 저항없이 몽고군에게 도륙되고 있는것이 현실이었다.

다만 그 엄혹한 피란정부하에서도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고 부처의 힘(佛力)을 빌어 외적을 물리치고자 범정부 국가사업으로 '고려대장경(재조대장경)'을 만들게 되었으니 현재 해인사에 보관중인 팔만대장경이 그것이다.

고려대장경 제조
대장경(大藏經)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45년간 설(說)한 내용을 기록한 경장(經藏), 계율 및 그것을 해설한 율장(律藏), 경(經)을 연구해 놓은 논장(論藏)을 집대성한 불교의 최대경전을 말하는데 고려때 만들었기에 고려대장경이라고 한다.

고려때 만든 대장경은 초조대장경, 교장(속장경), 재조대장경 3가지가 있는데 1011년(고려 현종 2년) 시작하여 76년에 걸쳐 만들어진 초조대장경과 문종의 4남 대각국사 의천이 1091년부터 1101년까지 10년에 걸쳐 만든 초조대장경의 주석서(총록)인 교장(敎藏, 일명 속장경), 그리고 강화도로 천도(遷都)후 1236년 시작하여 1251년까지 15년에 걸쳐 완성한 재조대장경이다.

처음 초조대장경은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려는 염원으로 만들었으며, 그 대장경의 장소목록(章疏目錄)을 보완하는 교장(敎藏, 일명 속장경)까지 만들어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하였으나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버리는 참화를 겪었으니 바로 강화도로 천도(遷都)하던 그 해였다.

그리하여 강화도 피난정부에서는 부처님의 힘으로 몽고 군사의 침략을 물리치려는 염원을 담아 대장경을 다시 만들기로 하였으니 바로 '재조대장경', 지금의 '8만대장경'이다.

대장경을 만든다 함은 인쇄를 위한 목각판을 판각(板刻)하는 작업을 말하는데 당시 무인정권의 실세인 최이의 후원과 개태사 승통 수기(守基)대사의 교정을 바탕으로 1236년 시작하여 1251년 완성하였는데 '고종은 백관을 거느리고 성(城)의 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 판당(版堂)에 행차하여 낙성 경찬회를 열었다'(고려사).

임시수도 강도(江都)에서의 재조대장경 제작은 주관하는 기구인 대장도감(강화도)과 남해와 강화의 분사 대장도감에서 진행되었는바 완성후에는 강화도 선원사에서 보관하다가 1398년(조선 태조7) 한양의 지천사를 거쳐 해인사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대몽항쟁이라는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역사를 헤쳐나온 선조들은 '팔만대장경'이라는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겼으니 현재 해인사에 보관중인 8만대장경이 국보 제32호이며 별개의 고려목판이 국보 제206호이고 이들은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諸)경판'으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이들을 보관하는 건물 장경판전이 국보 제52호로 국보 속에 국보를 보관하고 있는 셈인데 이 장경판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 세계유산 2관왕으로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의 보물로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중인 8만대장경. 정확하게는 고려대장경(재조대장경)인데 아쉽게도 일반에게는 개방하지 않아 들어가 볼 수 없다/ 사진출처=문화재청>

팔만대장경 제조, 보관 장소?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후 15년에 걸쳐 대장경을 다시 만들어 '선원사에 보관하다가 1398년(조선 태조7) 한양의 지천사(支天寺)를 거쳐 해인사(海印寺)로 옮겼다'는데(조선왕조실록)

즉, 재조대장경을 만들어(1251년) 옮길 때(1398년)까지 150년 가까이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했다는 것인데 그 선원사는 어디일까?  또한 판각작업을 한 대장도감은 어디였을까? 학자들은 대장도감(大藏都監)이 선원사에 설치되었다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재조대장경은 선원사에서 만들어져 150여년을 보관하고 있다가 해인사로 옮겼다는 얘기가 된다.

팔만대장경의 탄생과 보관에 중요한 역할을 한 선원사는 어디일까?

▩ 강화 선원사 터 (江華 仙源寺址) (사적 제259호)
선원사(仙源寺)
강화도로 천도(遷都)후에도 실권자 최이는 무신정권의 상징 정방(政房)과 서방(書房)을 계속 운영하면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선원사(仙源寺)를 지어 자신의 원찰(願刹)로 삼으니 국찰(國刹)의 격을 갖춘 사찰이었으며 당시 송광사와 더불어 2대 선찰(禪刹)로 손꼽히는 절집이었다.

선원사(仙源寺)는 충렬왕때는 임시 궁궐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 목판을 조각, 봉안한 곳으로 알려졌지만 1398년 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겼다는 기록 이후 잊혀지고 말았으며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선원사 터 발굴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이 강화도 일원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하였다. 발견 당시 이곳에서 몇 개의 주춧돌을 비롯하여 보상화무늬 전돌, 범자(梵字) 새긴 기와, 지붕에 얹었던 잡상들을 확인하고, 선원면(仙源面) 도감마을, 도감산에 있는 사지이므로 학술적·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어 지역의 연원을 기초하여 1977년에 사적 제259호 강화선원사지(江華仙源寺址)로 지정되었다

이후 1996년부터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동국대학교박물관) 결과 건물터, 축대, 배수시설 유구와 연화문 기와, 금동탄생불, 청동나한상, 탄화된 금니사경, 묵서사경 등이 출토되어 절터와 관련된 유적으로 규명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는 고려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선원사(禪源寺)터로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이에 대하여는 장기적인 조사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문화재청 자료)

즉, 1976년 최초 지표조사를 통하여 절터를 확인하였는데 그 지역명칭이 선원면(仙源面) 도감마을이고 근처에 도감산(都監山)이 있으니 선원사(仙源寺)나 대장도감(大藏都監)과 연결되는바 이곳을 '선원사 터'로 특정하고 사적 제259호로 지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도 선원사(仙源寺)라고 새긴 명문(銘文)이나 기와 등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일부 학자들이 여러 이유를 들어 현재의 선원사터는 잘못 선정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강화도 선원사 터 (사적 제259호). 높직한 축대를 올라서면 제법 넓은 터전에 서너단의 축대를 쌓은 절 터가 나타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폐사지처럼 석탑이나 불대좌, 승탑이나 탑비 하나 없이 건물 터만 있어 아쉬우며 일부에서는 대장경을 판각, 보관했던 선원사로 보기에는 절대적으로 좁다는 의견이다.>

현재 선원사터 아래에는 지난 1993년부터 민가 하나를 구입하여 '선원사' 이름을 걸고 조금씩 영역을 확장해온 절집하나가 있는데 작고 부족하지만 '자료전시관'도 운영하면서 선원사 관련 유물과 자료를 제시하는등 나름대로 맥(脈)을 잇기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십여년전까지만해도 목탁소리를 내는 소 3마리가 있어 '우(牛)보살'이라 칭하며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방송을 타기도 하였는데 아쉽게도 지난 2010년에 구제역을 피하지 못하고 살처분되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선원사가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으니 이는 우보살들의 공덕으로 보인다.

<당시 선원사 우보살 방송화면/ 사진출처=불교 TV 방송 BTN 화면캡쳐>

지금 선원사지는 선원사 자리가 아니다????
1977년 사적 제259호로 지정된 선원사지에 대해서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현재의 선원사지는 1976년경 강화도 조약(1876년 체결) 100주년을 맞아 강화도에 여러가지 호국유적을 찾으라는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항몽의 상징 고려대장경과 긴밀한 선원사를 찾다보니 발굴조사도 않고 지표조사 정도만으로 졸속지정 했다는 것이다.

특히 절 근처 산이름이 '도감산'이라 대장경을 만드는 기구인 대장도감이 연결된다는 주장은 틀렸으며 이는 조선시대때 훈련도감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며, 선원사 전시관에 옥등(玉燈)을 전시중인데 '선원사'라고 씌여있지만 이는 여기서 발굴된 것이 아니라 경기도 모 스님이 동국대에 기증한 것을 이곳에 갖다놓아 보는 사람들이 발굴유물로 오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선원사의 위치를 현재의 충렬사(김상용 등을 모신 사당) 자리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는 첫째 고려 고종이 대장경 판당으로 행차할때 (지금자리가 맞는다면 남문이나 동문으로 나와야 하는데) 반대쪽인 서문으로 나갔다는 것이며, 들째 초대 주지 임명장에 화산의 신찰(新刹, 새절)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강화읍내 남산이 화산이라는 것이고, 셋째 선원사지는 조선시대에 폐쇄되고 과수원이 되어 밤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하는데 현재 선원사지 근처는 밤나무 산지로 꼽히지 않고 있으며 강화도 밤나무 3대 군락지로 충렬사 근처가 해당되는 등을 들어 선원사 위치가 잘못 선정되었다는 주장이다.

<강화도 충렬사(忠烈祠)(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1호). 병자호란때 순절한 김상용등 병자호란과 신미양요 때 순국한 29인을 모신 곳으로 이곳이 원래 선원사 터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의 자리에서 나온 여러 유물이나 건물 터 흔적등을 보면 선원사가 아닌 다른 사찰이거나 왕궁터 등으로 보인다는 것이며 발굴된 최대 건물터 길이가 38m에 달할 만큼 큰 규모인것은 고려의 강화 도읍시절 임시궁궐, 즉 가궐(假闕)중 한 곳이라는 주장이다.

만약 이 곳이 절터라면 현존하는 사찰 건물중 최대건물인 구례 화엄사 각황전이 27m인 점을 고려하면 우리나라 불교 건축사를 다시 써야할 것이라고 한다.

▩ 팔만대장경 이운(移運)
팔만대장경을 왜 옮겼나?

1232년 개성에서 강화로 수도를 옮긴후 1236년부터 고려대장경(재조대장경,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1251년에 완성하였으며 대장경 완성 직전인 1249년에 무신정권 실권자 최우가 사망하였고 1259년 고종이 죽고 원종이 즉위하여 1270년에 다시 강화도로 환도(還都)하게 된다.

이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강화도에 계속 보관하고 있던 팔만대장경은 1938년(조선 태조7) 한양의 지천사(支天寺)를 거쳐 해인사(海印寺)로 옮겼다고 하는데 갑자기 왜 옮겼을까? 또 어떤 경로로 옮겨 갔을까?

이에 대하여 명확한 기록이나 근거는 없다. 다만 대장경을 노리는 외적, 즉 왜구(일본)나 북쪽 오랑캐들을 피해 남쪽 깊은 산속으로 옮겼을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인데 한편에서는 유교를 중시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새왕조(조선)가 한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불교지식의 보고를 곁에 두기 불편하여 멀리 보낸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반대이론으로는 강화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史庫)를 지었는데 외적의 침입때문이라는건 맞지않고, 그 대신 "새로 나라를 세운 태조가 고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것을 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벌인 대규모 국가 행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태조가 불교신자라는 점과 태조실록에 나와 있듯이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가는 길에 서울 지천사(支天寺·서울 플라자호텔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절)로 대장경을 잠시 옮긴 것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운(移運) 경로

대장경 목판 1장의 무게는 약 3.5kg으로 총 8만1350장에 이르는 팔만대장경의 전체 무게는 약 285t에 달한다. 조선시대라면 소달구지 400대 이상이 동원돼야 하고 지금도 옮기려면 8t 트럭 36대가 필요한 어마어마한 물량이다.

그런 엄청난 물동량을 한반도 남쪽 해인사까지 옮긴 경로에 대해서는 "당시 대규모 물류 수송은 수로를 이용했다는 점과 해안사 대장경 이운 벽화등을 볼때 충주까지는 남한강 물길을 이용하고 이후는 육로를 이용했을것"이라는 주장과

태조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행사로 기획했다면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물길은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특히 물에 약한 목판을 물길로 옮긴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어서 가능성이 낮다고 반박하며 오히려 군사 2000명을 동원하고 승도들로 하여금 불경을 외우게 하고 의장대는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대장경을 옮기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일부러)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육로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반론이 있다.

아무튼 바닷길로 가거나 내륙으로 가거나 최종에는 고령 개경포에서 내려 해인사까지 성주, 고령, 합천 3개군을 거쳐 간것으로 추정하여 이 구간을 '팔만대장경 이운로'라 명명하고 지금도 해마다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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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선원사(仙源寺). 대한민국 국보 3관왕이자 세계유산 2관왕인 '팔만대장경'을 만들었거나 최소한 150여 년간 보관했던 고려국 피난정부 시절 국찰(國刹)이자 송광사와 더불어 2대 선찰(禪刹)이었다는 그 절집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1970년대에 호국성지 개발 지침에 따라 졸속 발굴되었기에 정확한 자리가 아니라는 반론이 만만치 않은 사적 제259호 선원사 터(仙源寺址), 최초 지정때는 발굴조사도 없이 지표조사만 했다는 것이며 이후 4차례 발굴조사를 했지만 명문(銘文)이 발견되거나 하다못해 사명(寺名)이 새겨진 기와조각 하나 나오지 않은 곳.

그러다보니 폐사지라면 만날 수 있는 석탑이나 불대좌, 승탑이나 탑비 하나 없이 절터다 궁궐터다 의견이 분분한 건물터에 부지 정리만 되어 있을뿐, 사적 지정과 비슷하게 시작한 자그마한 사찰이 선원사라는 현판을 걸고 있을 뿐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대단한 업적을 남겼고 그 규모나 사격(寺格)이 만만치 않았을 선원사 터를 선듯 폐사지 답사 목록으로 추천하기가 망설여진다.

지붕없는 박물관
그러나 사람들이 강화도를 일컬어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섬 여기저기에 역사와 문화가 널려 있다는 말이다. 역시 세계유산에 지정된 고인돌이 많은 곳이며 민족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참성단이 있는 곳이고 전등사와 정수사, 보문사 등 천녀고찰이 자리 잡은 곳이다.

특히 고려왕조 39년간 임시수도였기에 남한에 위치한 고려왕릉 5개중 4개가 강화도에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왕들의 유배지로,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지(史庫地)로, 조선말 개화기에는 숱한 서구세력의 도전과 응전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한 강화도.

비록 정확한 위치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지마는 세계적인 보물 '고려대장경(재조대장경, 팔만대장경)의 뿌리를 찾아 한번은 답사해볼 만한 곳이며, 더불어 섬 이곳저곳에 널려있다시피 많은 문화유산들도 함께 만나보기를 권하는 바이다.

[계 속]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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