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원주를 거쳐 남한강 수로(水路)를 따라 올라가며 경기도 지역 폐사지를 답사하였습니다. 서해바다 강화도까지 다녀왔습니다. 이제 대관령을 넘어 강원도 영동(嶺東)지역으로 갑니다.
▩ 강릉 굴산사 터(崛山寺址) (사적 제448호)
학산마을 폐사지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대관령을 넘으면 동해바다가 보이면서 급격하게 지세가 낮아지는데 옛 영동고속도로나 대관령 옛길 아흔아홉구비를 돌아 내려가면 이제 평지가 시작되는 곳이 성산면이고 강릉시내로 들어가기 전에 서남쪽으로 위치한 구정면에 학산(鶴山) 마을이 있다.
고려말 이성계에게 쫓겨난 공양왕이 울고 넘었다는 왕고개가 있는 곳인데 학(鶴)이 많아 학마을이라고 했다지만 사실은 왜가리라고 부르는 백로(白鷺)가 군락으로 머물어 솔밭 전체가 하얗게 보이던 그런 곳이었다.
이곳은 기후가 온화하고 너른 들판에 물도 풍부하여 농사도 넉넉하니 벼농사를 지을 때 부르는 노동요(勞動謠)인 '오독떼기(강원도 무형문화재 제5호)'가 구전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오래된 마을인지라 옛부터 살기좋은 곳으로 손꼽혀서 한양을 중심으로는 살아 진천, 죽어 여주라고 하듯이 이곳 강릉지방에서는 生居募鶴山, 死去城山也(생거모학산 사거성산야) 즉, 살아 학산(鶴山), 죽어 성산(城山)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학산마을의 깊은 품속 너른 들판 가운데에 폐사지로 남은 절터가 굴산사 터(崛山寺 址)이니 주변이 농경지로 변하여 정확한 범위를 알기 어려우나 전체 면적을 통칭 15만평이라고 하며 2002년 태풍 ‘루사’의 피해복구를 겸한 긴급발굴조사 결과 사역(寺域)의 크기는 동-서 140m, 남-북 250m의 크기로 확인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당간지주로부터 절터까지의 거리는 500m가 넘으며 그 당간지주는 국내최대 크기라하니 당시 사찰의 규모가 짐작되며, 창건주 범일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승탑과 주변에 몇 개의 불상 등이 남아있다.
지난 2013년 발굴결과, 조사구역 내에서 총 10기의 건물지와 담장지, 계단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됐다. 건물지가 모두 인접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소규모인 것으로 보아 굴산사 스님들이 생활했던 승방지(僧房址)와 기타 생활을 위한 부속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는 것이 발굴단의 평가이며, 그 밖에도 승탑의 부재들이 추가로 발견되어 최소한 2개 이상의 승탑이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구산선문(九山禪門)
불교가 삼국시대에 이 땅에 들어와 어렵사리 공인되고 왕실로부터 점차 귀족, 서민들의 신앙으로 그 범위를 넓혀가던 중 중국에 유학하여 선(禪)을 배운 다수의 유학승들이 일시에 귀국하면서 선종(禪宗)이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았으며
신라 후기에 이르러 불안했던 국내 정세 탓으로 선불교는 급속히 전파되어 지방호족들의 후원을 받았으며 고려에 들어와서는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보다 안정되었을뿐 아니라 지방 세력과 왕족을 연결, 사회적 통합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명망 있는 선사들이 배출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유력한 산문들이 생겨나니 후대에 이를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부르게 되는데 실상산문(실상사), 가지산문(보림사), 희양산문(봉암사), 동리산문(대안사), 봉림산문(봉림사), 성주산문(성주사), 사자산문(흥령선원), 수미산문(광조사)과 함께 사굴산문(굴산사)을 말한다.
실상산문, 가지산문, 희양산문, 동리산문, 사자산문 등 5개 산문은 해당 산문의 종찰(宗刹)들이 지금도 남아 산사(山寺)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사굴산문을 포함한 나머지 4곳은 흔적만 남아 폐사지로 만나게 된다.
사굴산문(闍崛山門) 굴산사(崛山寺)
신라 문성왕 때의 고승 범일(梵日)이 강릉의 굴산사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킴으로써 사굴산파 또는 굴산선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개산조(開山祖)인 범일은 831년(흥덕왕 6) 당나라로 건너가서 마조도일의 제자 제안(齊安)의 선법을 이어받아 847년(문성왕 9) 귀국하였으며, 곧바로 굴산사를 창건하여 40여 년을 살면서 선법을 전파하였다.
특히 그는 스승인 제안으로부터 ‘동방의 보살’이라는 찬탄을 받았고, 특이한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을 주창하였는데 진귀조사설은 선의 원류를 석가모니불에 두지 않고, 진귀조사로부터 석가모니가 선법을 전해 받았다고 주장하는 설이다.
범일의 법맥을 이은 대표적인 제자로는 강릉 보현사 낭일대사 개청(開淸)과 행적(行寂) 등 10대 제자가 있으며 특히 고려 중기에 선을 크게 중흥시킨 보조국사 지눌(知訥)도 사굴산파 출신이다.
굴산사는 고려시대에 지방호족들의 성원으로 번성하였으나 조선 초 이후에는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려말선초(麗末鮮初) 쯤에 폐사된 듯하나 이후 범일국사는 대관령 국사 서낭신으로 모셔져 지금도 해마다 강릉 단오제 주신(主神)으로 만날 수 있다.
대관령 국사 서낭신 범일 국사(梵日 國師)
범일(810~889) 국사, 구산선문 중 사굴산문을 개산(開山)한 선사가 어찌하여 대관령 국사 서낭신이 되어 지역민들로부터 제사를 받는 대관령 주신(主神)이란 말인가? 이는 강릉지방, 특히 이 지역에서 왕족으로 대우받던 강릉 김씨라는 이유와 더불어 제한된 지역 문화의 특이한 점으로 주목된다.
즉, 신라 37대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그 자리를 놓고 상대등 김경신과 즉위 순서는 더 우선인 김주원이 다투었으나 김경신이 38대 원성왕으로 즉위하고 김주원은 힘겨루기에서 밀려난 후 강릉지역인 명주로 내려와 명주군왕으로 추대되어 아들, 손자까지 3대가 왕의 칭호를 받는데 그 김주원이 강릉 김씨의 시조이다.
그런데 범일 국사 역시 강릉 김씨로 속명은 품일(品日)이며, 그의 아버지는 명주도독을 지낸 김술원(金述元)이며, 어머니는 문 씨다.
범일 국사 탄생설화를 보면, 옛날 학산리(鶴山里) 마을에 한 처녀가 굴산사(屈山寺) 앞에 있는 석천(石泉)에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물속에 해가 떠 있어 물을 버리고 다시 떴으나 여전히 해가 있으므로 이상하게 여기면서 물을 마셨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나서 처녀에게 태기가 있어 마침내 아이를 낳았는데 아비 없는 자식이라 하여 마을 뒷산 학바위 밑에 버렸다.
산모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튿날 그곳에 다시 가보니 뜻밖에도 학과 산짐승들이 모여 젖을 먹이고 날개로 가려 따뜻하게 해주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 믿고 아이를 데려와 키웠다. 아이가 자라자 경주로 보내어 공부시켰는데 나중에 국사가 되었다.
해가 뜬 물을 마시고 태어났다고 하여 ‘범일 국사(泛日國師)’라 부르게 되었으며,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굴산사(堀山寺)를 세웠다고 한다. 학이 아이를 기른 바위는 ‘학바위’라 하고 그 마을 학산리(鶴山里)는 지금도 학산마을로 전해진다.
추측건대 신라 왕족으로 왕이 되지 못하고 서라벌에서 먼 강릉 명주까지 밀려난 절치부심과 어쨌든 명주군왕 칭호를 받으면서 지방호족으로 자리 잡고 일문(一門)을 창업한 강릉 김씨의 자부심은 사굴산문을 정신적 지주이자 정치 및 종교적 기반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문에서 존경받는 지역인사를 내세워 그 지역의 정신적 구심점이 됨은 물론 시간이 흘러도 오래도록 받들어야 할 필요성에 따라 대관령 주신으로 모시는 신격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역시 강릉 김씨인 김시습이 범일 국사가 세운 것으로 알려진 부여의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한 것도 무관한 일이 아닌 듯하다.
아무튼, 범일국사가 개창한 구산선문의 사굴산파 굴산사는 이제 폐사지로 남아 그 소중한 흔적만을 남기고 있지만 개산조 범일 국사는 서낭신으로 대관령에 모셔져 해마다 강릉단오제의 주신으로 모심을 받고 있으니 산천은 의구한 데 인걸은 간데없다는 옛말이 무색해지고 산천(옛 절집)은 흔적도 없으나 인걸(개산조 범일)은 산신이 되어 여전히 모셔지고 있는 아주 특이한 경우이다.
굴산사지 승탑 (崛山寺址 僧塔) (보물 제85호)
평범한 듯 보이는 8각 원당형 승탑이지만 부분적으로 변화된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예전 사진을 보면 지대석과 받침대, 상륜부 등이 지금과 많이 달라서 언제 어떻게 다시 올린 것인지 궁금하다.
또한 범일국사의 행적을 새긴 탑비가 발견되지 않아서 이 승탑마저 정확히 누구의 것인지 확실치 않은데 현장 발굴 결과 비석 받침대인 귀부 일부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언젠가 탑비의 조각이라도 나와 이러한 사실들을 뒷받침 해주면 좋겠다.
하대석 아래는 8각이나 위로는 둥근 모습으로 매우 볼륨감 있게 부풀어 보이며 표면 가득 구름무늬를 꽉 차게 조각하였고 윗면에는 마치 물도랑같은 고랑이 파여져 있는데 이러한 수구 수법(水溝 手法)은 고려시대의 석조 유물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8각의 중대석 각 면의 모서리에는 3단의 구름 모양 기둥을 새겼고, 각 면에는 천인(天人)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장구(또는 장고)·훈(塤)·동발(銅발)·비파(琵琶)·소(簫:피리)·생황(笙簧)·공후(하프)·적(笛:대금) 등으로 보인다.
상대석은 우리에게 익숙한 앙련모양의 8각인데 커다란 연꽃 안에 다시 꽃무늬(화문, 花紋)를 새긴 모습이 인상적이다.
뒤로는 대관령을 품은 험준한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친 학산마을, 앞으로는 널찍한 평지에 너른 논들이 시원하게 펼쳐지는데 그 가운데 투박한 돌덩이 두 개가 불쑥 솟아있으니 바로 전국에서 가장 크다는 굴산사지 당간지주이다.
성인이 옆에 서 있어도 작아 보일 만큼 큰 당간지주, 높이가 5m가 넘는 이 돌(石)지주에 꽂아 세운 당간은 얼마나 높을까? 보통 지주의 3배쯤이라고 하니 대략 15m쯤 되는 거대한 당간이 하늘 높이 솟았을 것이며, 또한 그 당간에 매달려 펄럭이는 깃발 당(幢)은 얼마나 화려하고 위풍당당하였을까? 그야말로 상상초월이다. 그만큼 굴산사의 사세(寺勢)가 대단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니 마치 영국의 스톤헨지 돌기둥 두 개가 이곳에 서 있는 것 같다.
이 당간지주는 논 가운데 홀로 우뚝 서 있는데 옛날 굴산사로 들어가는 초입이 여기쯤일 것이었으며, 지금의 마을 민가가 있는 곳은 모두 사찰 경내가 아니었을까 싶다.
굴산사지 석불좌상 (崛山寺址 石佛坐像)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8호)
당간지주 근처에서는 3구의 석불이 발견되었는데 2구는 근처 작은 절집에 모셔놓았고, 훼손이 심한 다른 1구는 보호각을 지어 안치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지권인을 취하고 있으니 비로자나 삼존불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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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 예국(濊國)이었던 강릉 지역은 신라 내물왕때 신라의 영역이 되었고 경덕왕때 명주라 하다가 고려 충렬왕때 강릉부, 공양왕때 대도호부로 원산 이남 울진까지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강원도, 강릉군이 일제 강점기때 강릉읍이 되었다가 해방후 강릉시로 승격되었으며 현재는 명주군과 강릉시가 통합되었다.
강원도가 강릉, 원주를 일컬을만큼 핵심지역으로 임진왜란, 병자호란등 병란(兵亂)을 피해간 덕분에 고유의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고 강릉 김씨의 시조를 명주군왕으로 부를만큼 독특한 역사가 강릉단오제 속에 범일국사가 대관령 주신으로 남아 제사를 모시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굴산사지 근처에는 강릉 김씨 시조묘인 '명주군왕릉'이 있고 그 안쪽으로 범일국사 제자 낭일대사가 세웠다는 보현사와 관음리 사지가 가까이 있으며 대관령을 넘어오기 전에 산신당에 들려 강릉 단오제 이야기를 잠시 떠올려보고 내려오면 괜찮을듯 싶다.
굴산사지 답사를 마치고 강릉 시내로 들어가면 또다른 폐사지인 신복사지와 한송사지가 있어 다음 이야기로 준비하고 있으며 오죽헌, 선교장, 경포대(경포정), 객사문 등은 잘 알려진 문화유적으로 강릉 답사에만 하루 이틀로는 바쁠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