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중에 이런 말들이 오갈 때가 있습니다. “아니, 205호 있잖아. 시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며느리라는 사람은 한 번도 찾아가지를 않았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우리 사돈은 요즘이 조선시대인 줄 아나봐. 명절이면 아이들을 꼭 이틀씩이나 붙잡아놓으려고 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언제 적 친군데, 안면몰수를 할 수 있는지 정말 기가 막혀.” 혹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러면 돼. 사랑은 말이 아니라 몸소 행하는 거잖아.”, “앞으로 살날이 더 많이 남은 젊은이가 이해해.”, “그래도 널 낳아준 부모잖아. 용서해야지.”, “괜찮아.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니까.”라고 하지요.
얼핏 보기에 모두 맞는 말이고 또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감정과 관련하여 한 가지 기억해야할 것이 있는데, 뭐냐면 감정은 지문처럼 각 개인만의 고유함을 나타내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상황, 똑같은 경험을 하면서도 서로 느끼는 감정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수술이 잘되어 회복중인 지인을 만나기 위해 병원을 갔을 때 지인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덩달아 기쁠 수도 있지만, 예전에 부모님이 암으로 고생하셨거나 돌아가신 경험이 떠오르면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이 두 사람은 똑같이 병문안을 갔는데 느끼는 감정은 서로 정반대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심리적 현실을 고려해보면,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모두 진실입니다.
문제는 관계 속에서 도덕적 윤리적인 기준 혹은 종교생활의 지침이라 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를 들이대며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인 ‘상대적 진리’를 부정하고 나아가 충고나 조언, 혹은 평가나 판단, 그리고 추측까지 서슴없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어떻게 며느리가 감히~’, ‘시어머니라는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 ‘부부는~’이런 표현들이 바로 절대적 진리를 무기삼아 상대적 진리인 개인의 감정을 묵사발 시키는 예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입원중인 시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은 것은 시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괘씸한 일이지만 며느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특별히 감정에 있어서는, 절대적 진리를 내세우기에 앞서 상대적 진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예컨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문상을 온 누군가가 “이 세상보다 더 좋은 곳에 가셨는데 왜 그렇게 질질 짜. 그만 울어.”라고 했다면 이것은 절대적 진리를 들이대며 상대적 진리를 무시한 처사입니다. 그 이유는 부모님이 아무리 좋은 곳에 가셨어도 부모님이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슬플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식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하다고 하지만 실제 우리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서로 다른 모습들을 다르게 보려고 하기보다, 나보다 못하다싶으면 정성껏 존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각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이든 그것을 존중하려고 하기보다는, 내가 느끼는 감정과 다르면 그 감정을 나만의 잣대로 판단해서 쉽게 평가해버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관계 속에서 개개인이 느끼는 감정인 ‘상대적 진리’를 꼭 염두에 두고 나 자신과 타인을 좀 더 세심하게 배려해야겠습니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부부관계의 어려움이나 부모-자녀관계의 어려움 혹은 직장상사나 여타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에 대해 조언을 구하면, 절대적 진리를 내세우며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는 식으로 상대방의 입장이 아닌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한 것들을 제시하면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먼저 상대방이 겪은 어려움으로 인해 생긴 현재의 감정이 어떤지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즉 상대방이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충분히 표현해서 꺼내놓을 수 있도록 잘 듣고 공감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억눌렸던 감정이 어느 정도 빠져나가면 들어주는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아도 본인 스스로가 상황을 제대로 판단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중년 신노년의 마음공부' 저자 강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