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4.22 14:11

사람은 누구나 일한다. 일한 몫만큼 돈 벌며 살아간다. 물론, 일하지 못할 때를 위해 조금씩 남기기도 하며. 그런데, 사람마다 그 남긴 돈의 차이가 생기고, 시간이 쌓일수록 그 차이는 점점 벌어져 왔다. 인구가 늘어난 만큼, 지구촌 지역마다 한 쪽으로 몇몇 사람이 가진 돈 숫자가 커지더니, 최근 그 대자본가 몇몇이 세계의 남은 돈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아니, 나의 남은 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그 돈이라 해도 뭐라 말대꾸를 못 할 것. 하, 그냥 몇몇들만의.

아무리 일을 해도 남은 내 돈이 줄어가는 사람들. 아니 빚이 늘어나는 사람들. 이제 그나마 일할 기회도 사람처럼 생긴 기계에게 빼앗겨가는 우려로 좌충우돌 살아가는 때가 느는 우리네다. 그저, 세상 남은 돈을 모두 가진 몇몇에게 내 모든 자료 제공의 대가로 내 생명을 부지하게 될 뿐. 가히, 그들이 준 숫자 크기로 내 위치가 매겨진다는 뉴스가 많아지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이즘에선, 우리네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닌, 시간에 의해 그저 살아져 가는 것’이란 말이 더 어울릴 듯. 그렇다면, 우습게도 그 몇몇은 그냥 사람이 아니다. 그 몇몇이야말로 사람 위의 사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냥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일 듯.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지니, 더 심해지기 전에 그 몇몇들과 나를 구분하고, 그 차이를 만지작거리는 나를 0.001초 만이라도 사랑해 보고 싶은 건 웬일일까? 하찮은 변명을 ‘뭐 그리 길게 늘어놓으려 하느냐?’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세계 700곳에 그 몇몇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곳의 각 1명을 중심으로 세상을 향해 10명 정도 움직인다고 하면, 7000명. 또 이들 1명을 중심으로 100명이 그들만의 세상을 움직이면, 70만 명이다. 지구 인구가 70억 명이라면, 그들은 0.001%의 또 그 몇몇 사람이다. 아마도 순금의 99.99% 순도 미만 극소수 사람들만이 금보다 번쩍번쩍 사는 사람들이다. 숫자 0의 개수와 상관없이, 나에겐 그 몇몇이란 표현만이 적합하다.

물론, 우리네나 그 몇몇이나 ‘그냥 사람’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좋거나 어려운 시기를 되풀이하며 살지만, 그 몇몇은 그 표현의 다양함에 있어 서로 비교하길 거부한다. 어느 시기나 지역이든 그 희로애락의 굴곡이 생겨나겠지만, 그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이 계속 다가오겠지만, 보이지 않는 그들의 힘에 의한 그 파고를 어찌 상상할 수 있을까. 문제는 그 시간과 파고를 그 몇몇이 조정하리라는, 어쩌면 참 미련한 우려다.

먹고 남은 돈을 가지고 씨름하는 일은 언제라도 일어나지만, 산업이 발달할수록 그 씨름판 생로병사의 방아쇠가 갑자기 당겨지는 일이 종종 생기고 있다. 당연지사, 그 방아쇠는 그 몇몇만이 가지고 있다. 그들 방아쇠가 움직일 때마다 크고 작은 다양한 세계경제공황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그 큰 굴곡을 몇 개 살펴보자.

1772년 신용위기. 영국은행의 한 파트너가 빚 부담을 피해 프랑스로 도피하는 사건은 당시 채권자들이 은행으로 몰리는 위기가 생겼다고 하는데, 결국 동유럽 경제 위기로 이어지고, 급기야는 미국이 독립하는 사건에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위기를 만드는 돈이 돈을 굴리는 자연스러운(?) 사회 현상은 그야말로 자연의 한 부분처럼 받아들여지게 된다.

1929년은 미국 발 경제 대공황이란 이름이 만들어졌고, 1973년 미국 오일달러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유가상승 경제 위기도 있었으며, 1997년도 닷컴 버블 시대의 아시아 금융 위기도 있었다. 21C를 전후해, 거대 자본가로 성장한 몇몇 그들만의 경제식민지 건설이란 태풍이 약소국 곳곳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쉽게도 한국도 세계 강국 틈에 끼어 피해가 컸다.

2007년 금융 위기라고 불리는 미국 주택시장 거품 붕괴가 일자, 미국이 곧 거대 자본가 몇몇이 만든 나라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해주었다. 이를 계기로, 그 몇몇이 건설하려는 유토피아 모습에 대한 소문도 음모론이라며 나돌기 시작했다. 그 하나 예로서, 초연결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2008년의 비트코인과 그 이하 디지털 화폐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급기야, 2020년을 지나면서, 화폐개혁이란 용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저 황당하고 신기할 따름이다.

세상에 나도는 80% 돈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며 서로서로 사용하기에 다 공개된 수치다. 반대로, 지하경제에 감춰져 있는, 표현을 꺼리는 돈은 20% 정도 된다고 한다. 이 숨겨진 돈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혼자만 사용하고 싶어 남겨 놓는 돈이라 할 수 있다. 그 남은 돈은 결국 몇몇 자본가들의 돈이 된 것. 첨단 문명을 먼저 사는 그 몇몇 사람들은 이 남은 돈을 디지털 화폐로 전환하면서 끝을 모르게 부풀리려 하고 있다. 이젠 돈 만드는 일이 당연한 권리라도 된 듯.

몇몇 사람들 전용물이 되어가기 시작한 디지털 화폐의 사회 현상을 보는 나머지 많은 사람은 참 착하기도(?) 하다. 그 몇몇은 수많은 거짓 뉴스를 조작해 양산함으로써, 하루 일해 하루 먹는, 아니 주는 대로 먹고사는, 나머지 모두를 순한 양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렇듯, 진행되는 화폐개혁은 우리네 지구촌을 새로운 형태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이제 막 태어나고 있는 디지털 화폐로 부동산, 금, 주식 등의 자산이 이동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 나 할 것 없이, 긴가민가하며 ‘눈 뜨고, 코 베어 가도’ 모르는 듯, 이 과정을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이미, 그들 몇몇은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을 디지털 화폐로 환산하는 일에 뛰어들고 있는바, 세상의 남은 돈을 먼저 내 숫자로 순식간에 만들려는 선두 다툼에 앞서려 하는데도 말이다. 디지털 화폐란 컴퓨터 숫자로만 존재하기에, 그들 입장에서 보면, 내 것으로 만드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다. 그것도 눈 깜빡할 사이에.

다 알다시피, 21세기에 들어 미국의 연방준비은행 및 각국 중앙은행은 화폐를 계속 팽창시키더니, 최근 무한대의 돈을 찍어내고 있다. 갑자기 시중에 풀린 돈은 본능처럼 주식과 부동산 그리고 디지털 화폐 등의 자산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니, 보이는 가치는 그대로 있는데, 가격만 부풀려져 올라간 상태가 심화되고 있는 것. 이러한 가격 상승의 착시나 환상은 일부 우리로 하여금 현실 감각을 잃게 한다. 점점, 거대 자본가의 금융 위기 방아쇠가 언제라도 당겨지리라 느끼지만, 애써 서로서로 외면하면서 말이다.

최근, 세계 각국 정부는 자국민에게 돈을 무한대 급으로 찍어 기본소득이란 이름으로 나누어주고 있다. 과연 그 돈들은 그 액수만큼 직접 찍었을까 하는 궁금증까지 생길 정도다. 아무튼, 이 돈을 나누어줄 때, 지폐보다는 개인 은행 계좌로 수치화해서 편리하게 입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사용도 내 숫자가 다른 사람에게 이동될 뿐이다. 비싼 돈 들여 돈을 찍느니, 그냥 숫자로 입력해 주고 사용하게 하면 더욱 좋을 것. ‘다른 나라에 뒤처지지는 않을까’ 하며, 각국이 앞다투어 돈을 디지털 화폐로 전환하려는 이유, 즉, CDBC다.

2020년도 디지털 화폐가 새 유행어가 되면서 COVID-19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겠지만,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몇몇을 위한 몇몇에 의한 GREAT RESET’이란 유행어가 등장했다. 바로 세계경제포럼에서 시작한 이 말은 아마도 ‘냉전시대’란 말처럼 역사에 각인되리라는 추측이다. 컴퓨터가 몸에 들어왔으니, 이제 세상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는 줄임말이다. ‘그 언제의 처음으로 시작’ 혹은 ‘무엇인가 뒤집혀야 한다’라는 명제다. 인구 폭등으로 생긴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해, 또 나쁘게 사용되는 돈의 투명성을 위해, 이런 등등의 말은 이미 식상하다. ‘돈의 필요성을 가진 사람과 아예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을 위해라는 말이 적합할 듯.

RESET, ‘다시 새로움’, 이 명제가 잘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의도되고 있겠거니와, 이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지금 생존해야 할 인간의 당연한 의무인지도 모른다. 한 번 쥔 돈 흐름을 강하고 크게 쥐려는 본능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더 먼저 쥔 사람들은 더 강한 힘을 유지하려 한다는 것,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우리 99% 이상 사람들에겐 그 불안함이 적지 않다. 몇몇이 모여 ‘더욱 커지는 부익부 빈익빈’의 논리를 정당화하려 한다는 것, 억울하지만 이를 더 이상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 감히 넘보지도 못할 문구일 테니. 항상 돈 게임은 돈 많은 사람이 이기니까.

혹여, 거대 자본가 그 몇몇이 의도하는 RESET 의미는 ‘노아의 방주’ 같은 것을 만들려는 것의 신호탄은 아닐까? 어쩌면, 지구 전체를 ‘노아’가 아닌 ‘은하계의 방주’로 만들려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명분을 가지고, 몇몇이 땅이든 땅속이든 하늘이든 비밀스러운 몇몇 곳에 거대 첨단 거주 시설을 만드는지 모를 일이다. 스마트시티란 말이 벌써 일반화되고 있으니, 그 모습은 쉽게 상상된다. 부디, 우리 가족이나 아는 이들도 거기 들어갔으면 하니, 비겁하지만 아니 고맙게라도, 그들이 내놓는 시시각각 정보 익히기를 밥 먹듯 숨 쉬듯 즐겨야 할 것 같다.

물론, 내가 속한 국가마다 거대 첨단 거주 시설을 만들어 자국민을 보호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그 움직임이 기업보다 느리다. 기업은 결국 몇몇 자본가에 의해 움직이니, 나를 맡길 곳은 그 몇몇이 만들어 놓은 곳을 더 신뢰할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국민에서 몇몇이 만드는 지구라는 기업의 고객으로 편입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국가가 만든 법보다 기업이 만든 약정이 더 빠르고 우선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오늘이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냥 그 몇몇 곁에 서서 사진이라도 찍기라도 해야 할 것. 그 몇몇이 말하는 것을 빨리 알아들어, 선착순 그들의 스마트시티에 들어가려면 얼마나 고개 숙여야 할 것, 어디서 줄 서면 될지 알아서 척척 행동해야 할 일이다. RESET 대열에 참여하는 신고식부터 빨리 치러야 할 듯. 이것이 새로운 생존법이 만들어지는 첫 단추일지 누가 알겠는가. 유발 하라리가 주창한 ‘인지 혁명’의 연장선인 농업혁명, 상업혁명, 정보혁명에 이은 작금의 화폐 혁명, 모든 혁명 시작 초기마다 된 ‘인간의 생존법’ 말이다. 어쩌면, 그 모두 ‘인간 혁명’일 수도 있으리라.

‘인간 혁명’, 참 쓸모없는 우스운 말이다. 그런데, 그것참, 하필이면, 나는 매초가 다르게 변하는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다니! 기적 같은 일이 너무 빠르게 생기고 사라지는 이 세상이라니! 하,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내 몫은? 돌아오는 내 순서? 참, 이 또한 우스운 질문이다. 세상을 외면하려는 의도일 뿐. 갑자기 요행을 바라다니 우습다, 이것이야말로 내 욕심 아닌가. 그래, 나의 시간이 모두 지나면, 반드시 쓸데없는 욕심이 되어버리는 내 탐욕(貪慾).

어쩌면, 욕심은 생존의 다름 이름인 듯하다. 내 욕심이 모여져 세상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몇 번이고 이렇듯 글자로 남기면서, 나는 더 욕심을 부리다니. 그냥 지나는 매초 변한 세상을 느끼면 되는데 말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숨 깊게 멈추고, 몇 번 숨 더 깊게 내쉬며, 나와 세상 중 누가 더 새로운지, 그 욕심이 많은지, 혹시 내가 조금은 더 새로울지 확인해 본다. 이때, 다가오는 모든 시간은 내 것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런데, 결과는? 그저 밋밋함이다. 하, 이도 욕심, 어떠한 표현도 욕심이다.

자, 그렇다면, 내 욕심부터 먼저 스스로 RESET, 그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살아온 만큼 오래 세상에 길들어진 내가 나보고 처음으로 가라고? 몇 날 몇 달이고, 그야말로 먹먹해진 머리를 움켜쥐고 뱅글뱅글 돌며 RESET을 외치고 또 외치며 그 처음으로 되돌아가라고? 갑자기 몸을 그대로 두고, ‘처음, 새롭게’ 등 몇 개 단어를 내 마음에 꼭 붙들어 매단 채 몸속을 0.001초 사이사이마다 천 번 만 번 돌고 돌아 처음으로 가보라고? 

쿵쾅, 갑자기 우스꽝스럽게도, 세상이 번쩍번쩍하고, 새하얗게 조용해지더니, ‘처음, 새롭게’라는 그 단어들이 하늘 같은 유리 벽을 타고 다니며, 세상천지 온갖 그림을 멋대로 그려대는 것이었다. 더 우습게도, 그 그림을 보고 뭐라고 외칠 때마다, 신기하게도, ‘축구장보다 큰 별똥 같은 세상’이 ‘언제나 먼지 같은 내 머리’에 '쿵쾅, 쿵쾅' 하고 부딪히는 것이었다. 그랬다. 무슨 혁명이든, 디지털 화폐든, RESET이든, 그 몇몇이든, 그러한 모습이란 그냥 지구에 일어나는 자연현상의 하나일 뿐, 나 또한 마찬가지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혹도 피도 나지 않은 머리를 만지며, 세상 다름이나 새로움은 도토리 키재기라며, 괜한 하늘을 힐끗 쳐다보며, 허, 저기 저 하늘과 함께 눈을 껌뻑거릴 즈음, 그때마다 참 우습게도, 하필이면 웃음이 나는 것이었다. 몇 번 더 눈 껌뻑거리며, 이렇게 무엇이든 처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을 톡톡 만지다 보니, 참으로 묘하게도, 입가에서 ‘맑은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하, 그래,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두 오래전부터, 내가 소리치고 내가 들었던 소리가 아니었던가.

0.001초 같은 찰나, 아무것도 몰랐던 ‘그 처음’을 ‘그 행복’을 다시 맛보려는 찰나, 그래도 이렇게나마 새롭게 느껴보려는 세상은 분명 맑고 맑았다. 한 번은 내 속을 들여다보고, 한 번은 가족을 느껴보고, 또 한 번은 내 몸을 느껴보려면 말이다. 내가 살아있으니 이 세상이 있구나 하는 즐거움! 꼭 한번 일어나더라도,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니, 그 몇몇이 외치는 RESET에 더 미련을 갖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그래, 나도 사람이니까.

그랬다. 사람으로 살아가기의 필요충분조건으로서, 지금 만지고, 없애고, 만들 것 등등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돈이 많든 아니든, 이 몇 개만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 이 멋진 세상에 ‘함께 살아야 한다.’라는 사실만으로도, 진정 ‘내가 사람임’을 자각하는 순간마다, 한 번은 더 맑게 웃을 수 있는 이유일 터다. 진정한 RESET이란, 세상을 처음 만지며 받아들이려 했던, 이제 막 일어나 두 발로 일어서려 했던, 참 어린 시절을 간직하려는 그 나를 느끼는 일, 그 내가 ‘지금이란 내 시간’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가끔 그 나를 향해 다짐하고 싱글거리지 않았던가.

항상 싱글거리던 소년 시절, 멋지다며 꿈꾸었던 그 순간들을 떠올린다. 이즈음에선, 세상 모두 내 것인 양, ‘나 스스로 내고 들었던’ 왈가왈부 소리나, 디지털 화폐가 스마트폰에서 떼구루루 구르는 소리나, 지금 그 몇몇이 떠드는 ‘RESET!’ 소리나 고만고만해진 듯하다. 나는 어떤 순간이든 나만의 최고 특이점에 서 있어야 할 것. 또 잊고 지내겠지만, 오늘만큼은 ‘저절로 울리는 내 소리’에 따라 그대로 움직였으면 좋겠다. 단 한 번이라도! 몇몇이나 나나 어느 사람이든 함께 바라보는 하늘과 땅이란 영원히 같아 보여야 하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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