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충남 대천으로 익숙하던 곳
1995년 도농통합에 따라 대천시와 보령군이 통합되어 보령시가 되었으며
보령시 동쪽 미산면 성주리 성주산 아래 비교적 평지에 자리잡은 성주사 터
성인(聖人)이 주석하였다하여 성주사(聖住寺)라 부르던 사찰이 있던 곳인데 그 성인으로 추앙받던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 즉 최치원의 4산비명(四山碑銘)중 하나가 있는 곳이며 라말여초(羅末麗初, 신라말 고려초) 구산선문(九山禪門)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이 개산한 곳이기도 한 곳이다.
▩ 보령 성주사터(聖住寺址) (사적 제307호)
성주사는 본래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절로 그때 이름은 오합사(烏合寺)라고 했다. 오합사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오함사烏含寺로 되어있다.)와 삼국유사에서도 언급되었고 또 발굴조사 때 나온 기왓조각에 오합사 글자가 있어 확실하다.
이 오합사가 백제 멸망 후에 어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위세가 약해지고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통일신라말 유력한 지방호족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고승을 모셔와 절집을 크게 중창하는 과정을 밟았다면 이곳 보령지역의 호족 김양과 낭혜화상 무염국사였을 것이며
무염국사를 성인(聖人)으로 보고 성인이 주석한 절이니 성주사(聖住寺)라 이름 붙인 것으로 보이는데 한때 문도(門徒) 2천명에 쌀 씻은 뜨물이 십리를 흘러갔다는 대찰(大刹)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모조리 불타버려 폐사(廢寺) 된듯하다.
9산선문, 즉 산속에 자리잡은 절집이라 부르지만 비슷한 시기 다른 절집들과는 달리 비교적 평지 너른 지형에 자리잡은 성주사 터는 지난 2009년까지 7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주요 건물지와 담장, 석조시설등 유구와 다수의 소조불, 기와 파편 등이 발굴되었다.
현재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와 5층석탑(보물 제19호), 3층석탑 3기(보물 제20호, 47호, 2021호), 석등(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석불입상(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73호) 등이 남아 있다.
거북 등에는 이중의 육각무늬를 옅게 새겼고 비신은 이 지방 특산물인 높이 2.63m의 남포 오석인데 앞면에만 또박또박 글을 새겼으며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이수(머릿돌)는 제목을 써넣는 제액(題額)부분이 평평하게 남겨져 있고 그 주위로 구름과 용이 뒤엉켜 있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한다.
5천여 자의 비문은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탑비와 한 쌍이어야하는 승탑은 발견되지 않고 주변에 일부 깨어진 석재들이 그 잔해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하는데 못내 아쉬운 점이다.
낭혜화상(郎慧和尙) 무염(無染) (801~888년)
신라 후기의 승려. 속성은 김씨(金氏),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이고, 법명이 무염(無染)이며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 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하였으며 그 뒤 부석사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821년(헌덕 13)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는데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도 선 수행에 몰두하였으며,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여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845년(문성왕 7년), 25년 만에 귀국하여 보령 성주사(聖住寺)를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주석하다가 888년 89세로 입적하였다.
열반한 지 2년 뒤에 부도와 비를 세웠으니 진성여왕 4년인 890년이다. 진성여왕은 당대의 명문장가인 최치원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며 시호를 大郎慧(대낭혜), 사리탑을 白月葆光塔(백월보광탑)이라 하사하였다.
성주사지 오층석탑 (五層石塔) (보물 제19호)
2중기단에 5층을 올린 구조인데 특이한 것은 기단 윗부분에 몸돌을 받치는 굄돌이 추가된 것으로 이는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석탑의 특징으로 보인다.
기단부에는 모서리 기둥(우주)과 가운데 기둥(탱주)을 새겼으며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만 새겼다. 지붕돌은 4단의 층급받침을 두었으며 평평한 추녀는 끝부분을 살짝 치켜올려 경쾌하다. 상륜부는 없고 노반만 남아 있다.
앞에 서 있는 석등(충남 유형문화재 제33호)은 4각 지대석과 받침돌 위에 둥근 연꽃잎을 새긴 하대와 상대를 대칭으로 하고 8각 중대석을 높이 세워 8각 화사석을 올린 후 옥개석을 얹었는데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다.
원래 이 탑 3기는 왼쪽 2기만 보물로 지정이 되었고 오른쪽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어 그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하였는데 일제강점기인 1917년 담당 실무자의 실수로 누락된듯하다는 어처구니 없는 답변과 함께 지난 2019년에 뒤늦게 보물 제2021호로 지정되었다.
3기의 석탑은 서로 닮은 꼴로 한 사람 솜씨로 조성된것으로 보이는데 2중기단에 3층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탑 양식을 갖추고 있으나 기단 상부에 1층 몸돌을 받치는 굄돌을 별도로 만들어 넣은 것은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이르는 석탑의 양식이다.
1층 몸돌 전, 후면에는 네모꼴 문비(門扉) 모양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문고리를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였다. 특히 가운데 삼층석탑에는 문비 안 여백에 둥근 돌기(못머리?) 모양을 줄맞춰 새긴 것이 특이하다.
지붕돌은 4단씩의 층급받침이 있으며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약간 치켜올라갔다. 꼭대기에는 상륜부 장식이 남아 있은데, 왼쪽 탑에는 네모난 받침돌(노반)만 놓여 있고 가운데는 노반이 조금 부실하고 오른쪽은 노반이 없다.
성주사지 석불입상(石佛立像)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73호)
보령 성주사 터는 폐사지 답사만으로도 가볼만한 곳이지만 이 땅에 들어온 선종(禪宗) 불교가 자리잡았던 구산선문중의 하나, 성주산문이었다는 것이 커다란 의미가 있는 곳이며,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 탑비가 최치원의 4산비명중 하나라는 것만으로도 반드시 찾아가 보아야 할 명분을 주고도 남는 곳이다.
부여 무량사(無量寺)
또한 성주사 터에서 부여 무량사가 멀지 않다. 무량사가 부여군에 있지만 끄트머리에 위치하다보니 보령시에서 더 가깝기 때문이다.
강릉 굴산사지에서 언급되었던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성주사의 무염국사도 머물렀다는 곳인데 조선시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생육신 김시습이 세상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다 죽은 곳으로도 유명하고 무량사 근처에 김시습의 사리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