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6.18 14:08

미륵사(彌勒寺)는 어떤 절이었나?
1974년 동탑 터가 발견되고 80년대에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십수년 동안 진행되기 전까지 미륵사는 品(품)자 형이나 쌍탑 가람의 시원(始原)형 등으로 논의되었으나 동탑과 중앙 목탑, 그리고 각각의 금당과 회랑 등이 발굴되면서 東院(동원), 中院(중원), 西院(서원)의 3원으로 구성된 3탑 3금당 3회랑의 독특한 가람배치가 확인되었다.

동탑과 서탑의 간격이 91m로 동방 최대규모의 사찰임이 드러났고 3금당은 무왕이 친견했다는 미륵삼존을 모시기 위한 것이며 3번의 설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신앙을 구현하려 한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목탑이 있고 동서로 석탑을 세웠으며 각각의 탑 뒤에 금당이 있고 이를 연결하는 독립적인 3개의 회랑을 재현한 3탑 3금당 3회랑식의 미륵사 복원 모형/ 사진출처=국립익산박물관>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절을 누가, 왜 지었을까?
미륵(彌勒)은 희망불이다. 국왕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 국론을 통일하며 강력한 통치력으로 백성들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보여주어야하는데 600년 즉위한 무왕은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시책으로 호국불교와 삼국통일의 웅지를 품고 익산 땅에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던 한성백제는 21대 개로왕때에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의해 개로왕이 살해당하고 한성백제를 빼앗긴 후 방어에 유리한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여 훗날을 도모하게 되니

24대 동성왕은 신라와의 나제동맹을 혼인동맹으로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비하였으나 말년의 학정에 살해되었고 25대 무령왕때에 국력이 신장되고 정국이 안정되기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26대 성왕은 본격적인 백제중흥을 도모하려 수도를 다시 사비(부여)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는등 본격적인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에서 고구려를 몰아내었으나 다시 신라에게 빼앗기자 결국 동맹을 파기하고 적대관계가 되었으며 왜, 가야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던중 선봉대로 깊숙히 들어간 태자 창(위덕왕)을 도우러 가던 성왕은 관산성(옥천)에서 신라군에게 잡혀 전사(554년)하게 된다.

<충북 옥천 전사현장인 구진벼루에 세워진 백제 26대 성왕 유적비>

성왕의 아들 위덕왕(태자 창)은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괴로움에 시달렸으며 그 뒤를 이은 혜왕과 법왕은 모두 1~2년만에 사망하니 백제의 정국은 다시 불안정한 시기였다. 그때 30대 무왕이 즉위(600년)하여 41년간 통치하면서 백제는 다시한번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는데 이때가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가 된다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라거나 위덕왕의 서자라는 설이 있는데 탄생설화에 과부의 아들이라는 것에 기인한다. 무왕은 즉위후 악화된 민심을 수습해야했고 국론과 사상을 통일하고 희망과 번영을 제시하기 위해 미륵사를 지었을것이라는 추측이다.

<익산의 馬龍池(마룡지), 삼국유사에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璋(장)이고 그 어머니가 과부로 서울 남쪽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연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璋(장)을 낳았다'고 되어있고 연못 동측에서 초석과 백제시대 기와편이 다수 발견되어 서동의 생가터로 알려졌다.>

미륵사를 부여에 짓지않고 익산에 지은것은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으나 백제가 멸망한 탓인지 이에 대한 근거나 기록을 찾기는 힘들며 일부에서는 천도는 아니라도 별도(別都) 개념으로 복수의 수도를 운영하려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튼 백제 중흥의 원대한 포부를 펼치려는 무왕의 노력은 익산에 거대한 호국사찰 미륵사를 지었으니 이는 또한 경쟁상대에 있는 신라의 황룡사를 의식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즉, 먼저 지은 황룡사가 7800평인데 비하여 미륵사는 8500평이라는 점과 3탑 1금당의 황룡사보다 더 크고 확장된 3탑 3금당의 미륵사 구조나 회랑을 복수로 운영하는 복랑(複廊)체제의 황룡사에 비하여 3회랑으로 지은 점은 백제가 신라를 의식했다면 먼저 세운 미륵사탑을 의식하여 백제의 아비지를 초청하여 80m가 넘는 황룡사 9층탑을 올린 신라는 백제를 의식하는 등 서로가 삼국통일을 꿈꾸며 경쟁적으로 추진한 국책사업이 아닌가 싶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삼국유사 무왕조(武王條)
어릴때의 이름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서동(薯童)이라 하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가 아름답기가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라벌로 가서 마를 가지고 동네 아이들을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서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에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라 하였다.
동요가 서울에 퍼져 대궐까지 알려지니 백관이 임금에게 간언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하였는데 장차 떠나려 할 제 왕후가 순금 1두(斗)를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지에 도착하려는데, 도중에 서동이 나와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를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여 따라가며 잠통(潛通)하였다. 그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은 것을 알았다. 그들은 백제로 와서 모후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 꾀하려 하니 서동이 대소(大笑)하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였다. 공주 가로되 “이것은 황금이니 가히 백년의 부를 이룰 것이다.” 하였다.

서동이 가로되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곳에 황금이 흙과 같이 쌓여있다” 하였다. 공주가 듣고 놀라며 가로되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이니 그대가 지금 그 소재를 알거든 그 보물을 가져다 부모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서동이 좋다고 하여 금을 모아 구릉과 같이 쌓아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 가서 금 수송의 방책을 물었다.

법사가 가로되 내가 신력으로써 보낼 터이니 금을 가져오라 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에 갖다 두었다.

진평왕이 그 신의 변통(變通)을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여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무왕이 아리따운 신라의 선화공주를 배필로 맞고 왕위에까지 오르게 된 이야기는 서동요(薯童謠)로도 전하고 있는데, 1편에서 언급한 미륵사 창건설화에서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로 가다가 미륵삼존을 친견하고 왕비의 청으로 미륵사를 지었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 왕비가 바로 선화공주가 아닌가?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는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탑을 세우게 된 자세한 기록이 나오므로써 여지없이 깨어지게 되니 안타까운 일이다.

깨어진 꿈, 무왕과 선화공주 러브스토리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복원
절반은 무너진채로 시멘트를 발라 기괴한 모습으로 80년 넘게 서 있던 미륵사지 석탑이 자칫 붕괴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대대적인 수리, 복원을 추진하게 된다.

동양 최대(最大) 최고(最古)로 알려진 미륵사지 서탑의 복원은 원래의 모습이 그림이나 사진, 기록으로도 상세히 남겨진것이 없어 그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이 9층으로 추측할 뿐이니... 9층탑을 복원하는것이 아니라 무너지기 직전으로 남겨진 6층 일부 모습까지만 되살리기로 하였다.

1999년에 전면 해체후 보수, 정비를 결정하고 2001년부터 본격 시작하여 2017년 1월에 조립을 마쳤는데...통칭하여 20년간 200억 공사로 우리나라 문화재 복원 사상 최장기간이 걸린 대역사로 기록된다. 심지어 착수후 수작업으로 시멘트를 제거하는데만 3년이걸렸다고 하니 탑을 새로 세우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그러던중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으니 2009년 1월 4일, 심주석(가운데 돌기둥)에서 사리장엄을 발견한 일인데 모두 19종 4,900여점, 총 9,000여점이 발견되었는바 특히 명문이 적힌 사리봉안기(舍利奉迎記)가 나와 이 탑이 639년에 건립되었으며 탑을 세운 발원자가 누구인지 알려진 것인데.... 아쉽게도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는 역사적 사실이 아님이 드러난 것이다.

童話(동화)처럼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깨어졌지만 미륵사지 석탑의 상세한 내력이 알려지게 된것이니 서운해하기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2009년 1월4일, 미륵사지 서탑의 심주석에서 나온 사리와 장엄구들. 석탑을 다 들어내고 심주석이 노출된 상태에서 사리공 발견(1), 사리공은 심주석을 자른 단면 중앙에 홈을 파고 조성하였다.(2). 사리공에 열 십(十)자 먹줄 자국은 백제 장인들이 작업할 때의 흔적일것이다. 사리공을 확대한 모습에서 그릇처럼 보이는 것이 사리 그릇(器)이고 그 뒤에 네모진 것이 금제 사리봉영기인데 여기에 상세한 내용이 씌여 있다.(3). 사리기를 들어올리는 모습(4)...그 아래는 희귀 구슬등 많은 종류의 부장품들이다.>
<미륵사지 석탑 심주석에서 나온 사리봉영기(보물 제1991호). 앞면 99자, 뒷면 94자, 총193자를 정이나 끌로 파내는 기법으로 새겼는데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발원자, 석탑(서탑)의 건립연대를 정확히 밝히고 있다.>
<사리 봉영기를 보면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것이며 기해년, 즉 639년에 사리를 받들어 모셔 탑을 세웠다는것이니, 미륵사지석탑은 639년이라는 명확한 건립연도가 식별되었다.>

선화공주 설화를 지워야하다니 아쉬워도 보통 아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를 설명할때 바이블처럼 인용하던 삼국유사도 모두 틀렸다고 해야 할판이다. 서동요(薯童謠)도 모두 지어낸 이야기로 내몰리게 생겼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게다가 미륵사지에서 멀지 않은 익산 쌍릉(사적 제87호)이 대왕묘에 무왕이 소왕묘에 선화공주가 묻혔노라고 믿고 싶고 그렇게 이야기가 풀려져 나갔어야하는데 이것도 혼란스럽게 되었다. 그럼 소왕묘에 묻힌건 누구라는 말인지.

2017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익산 쌍릉을 재발굴 조사하였다. 대왕묘에서 (일제강점기때 발굴되었던) 인골이 건장한 남자의 것으로 보여 무왕의 릉으로 확신하게 되었지만 아쉽게도 소왕묘에는 누가 묻혔는지를 추론할 무엇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다. 다시 반론이 제기된다. 무왕의 부인, 즉 왕비가 사택적덕의 딸 하나였겠냐는 것이다. 그녀가 서탑을 세웠다면 동탑이나 중앙의 목탑이 먼저 세웠졌을지 모르고 그녀가 아닌 누군가 다른 왕비가 세웠을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미륵사는 3금당 3탑 형식으로 사찰이 3개가 있는 것과 같은 3院(원) 구조라고 하지 않는가?

여러 주장을 정리해보면 중원의 목탑을 먼저 왕후였던 선화공주가 세웠을것이며 뒤를 이어 왕비가 된 사택적덕 딸은 서탑을 세웠다는 것이며 익산 쌍릉의 소릉은 대릉보다 먼저 죽은이가 묻혔다는 것이니 사택적덕의 딸이 아니라 먼저 왕후였던 선화공주일 확율이 높다는 것이다.

더구나 무왕의 아들 의자왕이 당시 태자신분일텐데 2인자로 왕권을 이어받을 태자 이야기가 사리봉영기에 한마디도 없을수 있는가? 결국 사택적덕 딸은 의자왕의 생모가 아니라는 것이며 그래서 아무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서탑의 사리봉영기가 발견되어서 그렇지 중앙목탑이나 동탑의 사리봉영기가 나온다면 선화공주나 다른 왕비의 발원(發願)이 기록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해보면 삼국유사도 맞고 서동요(薯童謠)도 맞고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도 맞게된다. 물론 당시 신라와 백제가 적대적 관계로 전쟁중이었는데 어떻게 혼인을 맺을 수 있느냐거나 진평왕에게는 선화라는 딸이 없다는 반론으로 모두가 허구일뿐이다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관련된 기록이나 발굴 결과 등으로 추론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기왕이면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사실에 부합하는 역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다려보기로 한다. 어느 날 어디서 또 다른 기록이 튀어 나올지 모르니 말이다.

문화유산 답사가 재미있는 까닭이다.
문화재 발굴과 복원이 중요한 까닭이다.

<무심하게도 해체후 복원은 계속 진행되어 2015년 12월 3일에 (해체한 탑을 다시 쌓아 올려야하므로) 사리공에서 나온 사리와 여러가지 귀한 물건들을 다시 집어넣고 봉안해야하기에 이르니 문화재청과 불교계 주요인사들이 모여 불사리와 함께 금제사리봉영기, 금동제사리병, 유리구슬 등의 사리장엄구 복제품 1천50점(진품은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과 석탑 수리기록지, 불교계 발원문도 함께 봉안하였다/ 사진출처=news1>

사리(舍利)는 탑(塔) 어디에 있을까?
미륵사지 석탑은 사리와 장엄구 들이 심주석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일반적으로 탑의 어디쯤에 사리를 넣어놓을까?... 정답은 탑마다 각각 다르다....이다.

결국 탑을 일일이 해체해보아야 아는데 아마도 일정한 위치를 정해놓았다면 더 많은 도굴과 해체로 전국의 문화재는 더 많은 수난을 겪었을 것이다.

<사리를 넣은 사리공 위치. 왼쪽부터 불국사 석가탑은 2층 몸돌에,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은 3층 지붕돌에, 익산 미륵사지 석탑(서탑)은 탑을 지지하는 중앙 석주(심주석)에 있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幢竿支柱) (보물 제236호)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제236호)는 동탑과 서탑 앞에 각 1기씩 2기가 서 있다.>

지대석은 새로 마련한듯 하며 기단부는 땅 속에 묻혀있던 것을 드러냈는데 커다란 안상이 돌아가며 조각되어 있고 윗면에는 지주와 간(竿)을 세울수 있도록 받침부분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2개의 지주는 원래 모습 그대로인데 마주보는 면에는 특별한 장식은 없고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2개의 구멍을 몸체에 뚫었으며 맨 위에는 ㄷ자 홈을 파놓았다.
지주 윗면은 모난 각을 죽여 원형으로 만들었으며 바깥쪽 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띠를 돌린 후, 그 중앙에 한 줄의 띠를 새겨두었다.

<1917년 야쓰이 조사단이 촬영한 사진, '폐미륵사동당간지주(廢彌勒寺東幢竿支柱)' 제목으로 고적조사보고에 실려있고 유리건판 사진으로 남아있는데 당간은 없어지고 기단석은 흙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미륵사지 금동향로 (金銅香爐) (보물 제1753호)
<미륵사지 금동향로(보물 제1753호)는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2000년 10월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향로, 일반적인 향로의 다리는 3개이고 장식이 없는 유물이 많은데 비해, 이 향로는 화려한 장식과 함께 4개의 다리가 달려 있어 주목된다.

일부 승탑에 장식된 부조나 암막새 등에서는 확인되지만 실물은 처음인데 동물의 형상을 가진 이른바 수각형(獸脚形) 향로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다수 확인되는바 그중 당나라에서 741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경산사지 출토 향로는 다리가 6개라는 차이만 있고 대체로 공통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특히 출토 경위가 확실하고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다족향로(多足香爐) 유물이 매우 적다는 점에서 희소가치가 높다.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 (舍利莊嚴具) (보물 제1991호)

<2009년 석탑 해제시 심주석(心柱石)의 사리공(舍利孔) 및 기단부에서 출토된 유물, 639년(무왕 40) 절대연대를 기록한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와 금동제 사리외호(金銅製舍利外壺), 금제사리내호(金製舍利內壺)를 비롯해 각종 구슬 및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점을 보물 제1991호로 지정하여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계 속]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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