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씨가 반복해서 꾸는 꿈을 얘기합니다.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이는데 언제나 겨울 빙판 위에 눈사람처럼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경수씨에게 아버지는 엄격하고 냉정하신 분이셨습니다. 따듯한 말이나 칭찬을 들어 본 적이 없었지요. 경수씨는 공부를 잘해서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성적이 많이 올라 상위권에 들게 되자 자랑스럽게 아버지께 성적표를 보여드렸어요. 아버지의 칭찬을 기대했지만, 아버지는 칭찬은커녕 1등도 못하냐고 화를 내셨어요. 경수씨는 1등을 목표로 더 열심히 공부해서 드디어 1등의 성적표를 들고 아버지께 달려갔지요. 성적표를 보신 아버지는 이번에는 모든 과목이 다 100점이 아니라고 못마땅해하시는 거예요. 이후로 경수씨는 공부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고 해요.
과거에 많은 부모님들은 경수씨의 아버지처럼 부정성의 효과, 곧 상보다는 벌의 효력이 더 크다고 믿었습니다. 자식에게 관대하게 대해주고 칭찬해 주면 기고만장해지고 나태해져 더 열심히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잘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반응해 주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 잘 타일러주는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강조해야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더 잘 될 거라고 확신한 겁니다.
못하는 것, 잘 안되는 부정적인 것에만 초점을 두게 되니 칭찬과 격려보다는 비난과 꾸지람이 앞서게 되죠. 격려가 필요한 때에 채찍만 주어지면 잘하려는 동기가 생기기도 전에 꿈틀대던 사기마저 단번에 꺾이게 된다는 건 염두에 두지 못하고요. 생활기록부에 교사가 학생에 대해 평가할 때 단점을 먼저 쓰고 뒤에 더 많은 장점을 함께 기술하는 것도 이런 점을 고려한 것일 겁니다.
물론 부정성의 효과를 인지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때론 부정성에 기반한 비관적인 관점이 근거 없는 낙관론보다 더 이로울 수 있습니다. 부정성의 힘을 잘 활용하면 즉각적인 동기를 유발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한 비관론이 그 대책을 마련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니까요. 문제는 부정성에 편향되고 지배당하게 되는 겁니다.
부정성은 긍정성보다 우리에게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그에 대한 기억도 훨씬 오래갑니다. 잊지 않고 잘 기억해서 차후에 생길 부정적인 일에 잘 대응하려는 생존전략 때문이죠. 그런데 부정성에 지나치게 편향되고 지배당하게 되면 모든 긍정성은 무효가 되기 십상입니다. 불안이 증가하고 삶이 만족스럽지 않게 됩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키 유전자 하나에 집착하게 되면 부모가 베풀어준 모든 것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명석한 두뇌. 수려한 외모에 대한 감사는 사라지고, 부모에 대한 불만과 원망만 가득 차게 되는 거죠.
유명 연예인들이 악플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는데요, 사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수많은 선플(좋은 댓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악플이 너무도 강력해서 선플이 주는 긍정성이 다 잠식당해 버립니다. 악을 선으로 상쇄시켜야 하는데 그럴 힘이 없어진 거죠.
이런 부정성의 가혹한 지배력에 무너지지 않으려면 먼저 부정성에 내재된 괴력을 잘 인지하고 대담하게 그에 접근해야 합니다. 악플에 압도되기 전에 비평적인 관점으로 악플에 대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평가를 하는 거지요. 그런데 막상 당사자 혼자의 힘으로는 이 작업이 버거울 때가 많습니다. 평소에 긍정의 힘을 잘 장착해 두고 주변 사람들의 지지와 지원을 요청하세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평상시에 주고받던 칭찬이나 긍정적인 피드백, 선의의 도움들이 단 한 번의 비난이나 비판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잘해 주려 애쓰기 전에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삼가는 배려가 관계를 유지하는데 더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수씨는 요즘 신세대의 아빠처럼 아이와 잘 놀아주고 육아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아버지와는 많이 다르지요. 그런데도 종종 아이의 장점보다 단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얼마 전 아이가 유아원에서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집으로 가지고 왔을 때 경수씨의 마음은 매우 복잡하고 불안해졌습니다. 유아원 선생님은 아이들이 소유의 개념이 형성되지 않아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했지만 걱정이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데…’ 말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를 어떻게 훈육해야 할지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커졌습니다. ‘아. 이게 노파심이라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자 너그러움이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겼을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래, 아버지도 그때 내가 잘못될까 두려우셨던 거구나…’
아이와 함께 장난감을 유아원에 되돌려주고 오면서 경수씨는 오늘 밤 꿈에는 아버지가 따사한 봄볕 아래 편히 누워 계시는 모습으로 오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차 봉 숙 (무용동작치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