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6.24 15:53

오래된 습관은 어쩌면 그 사람의 정체성인지도 모른다. 물론,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내겐 쪽지나 수첩에 연필 혹은 볼펜으로 순간 스치는 느낌을 그때마다 남기려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컴퓨터 앞에 앉아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들어 온 것이기에, 숙명이라 느껴지니, 이를 어쩔 것인가!

행운 세대였을까? 현대 문명의 급변화를 맛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도 일컫을 수 있는 컴퓨터의 출현을 지금까지 관통해 살고 있다니 어찌 행운이 아닐까? 이 시기를 몸으로 부딪던 컴퓨터 국책연구소와의 인연은 어쩌면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행운이 컴퓨터로 글 쓰는 습관으로 남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첫 직장을 10여 년 만에 나온 1995년도 후반은 우리나라에 인터넷이 막 보급되려던 시기였다.

직장과 직업을 바꾸게 된 동기는 글 쓰는 일에 전념해 보겠다는 개인적 꿈의 도전이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순간, 그 느낌 옮기기에 자신감이 붙은, 어설픈 밑거름이 내 딴엔 모양새가 갖추어진, 몇 권의 책으로 매듭지어지리란, 그 자신감의 결과였다. 그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그 과정이나 결과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당연지사, 내 능력이 여기까지니까.

1996년, 노트북이 손에 쥐어지면서, 집 안팎을 가지지 않고 거의 6년 가까이 사용했다. 습관의 수단이 연필에서 노트북 자판으로 바뀐 것. 이때, 장소와 상관없이, 앉는 자세만 나오면 눈에 띄는 모두가 글감 소재가 되었다. 그중 가장 편했던 곳이 전철 안이었다. 노트북이 망가지기 전까지 많은 순간 느낌 옮기기 훈련을 했다. 물론 내용이 연결되지 않고, 시간 흐름을 쫓아가는 연상작용의 결과물이었다.

배터리 수명이 끝날 즈음, 노트북을 분실했다. 그 안에 있는 원고야 머리에 있고, 또 습관을 위한 과정이었으니, 아깝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 다시 습관은 다시 메모지와 수첩과 노트 등으로 이어졌다. 물론 계속 이어지는 느낌들을 컴퓨터 자판으로 두드리는 거나, 펜으로 종이에 쓰는 속도는 크게 차이가 없었다. 펜으로 정착된 수첩과 노트에 참 많은 잡동사니 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때 쓴 책 한 권 분량 가까운 노트도 분실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다. 모두 전철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20년 가까이 기존 메모와 수첩의 단상이나 잡글을 탈고해 인터넷에 공개했다. 국내에서 개인 홈페이지인 블로그가 생기며 시작된 것. 최근 들어, 핸드폰에 메모와 글자를 입력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변화에는 적응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사진 이미지에 기존 느낌과 순간마다 이어진 느낌들을 연결해 매듭짓는데 공을 들이려 했다. 나아가, 목소리로 낭독해 올리는데 관심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순간 느낌을 글로 옮기는 새 수단으로는 아닌 듯하다. 지나친 기대와 욕심인 듯, 역시 이 수단이 걸림돌인 듯.

21세기 들면서, 가끔 글쓰기란 즐거움이 TV나 컴퓨터의 역학 작용에 의해 줄어들 것이란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 우려가 나에겐 괜한 착각에 의한 변명이 된 꼴이었다. 이제 다시 수첩과 연필을 하나로 지니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메모 기능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한 것. 설상가상, 글 쓰는 습관이 전철 안에서도 길들여졌다 생각하니, 참 우스꽝스러운 일. 어떠한 경우든, 내 울타리를 내가 만들고, 그 안에 갇혀 웃고 울고 떠든 것. 

물론 최종 표현되는 수단이야 시가 되든, 소설, 산문, 시나리오, 칼럼 등 어느 것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내 스스로 새로워지려던 행동의 결과만이 유효하다. 아니, 굳이 글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 순간마다 느낌을 남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으리란 믿음이 드니까. 스스로 꼭 잡고 있는 것에서 훨훨 놓는 즐거움. 그럴지도 모른다. 남은 날들에게 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동안 뭐든지 많은 것을 느끼려 했다. 이제 작은 것을 소중하게 느끼는 노력에 더 눈을 떠야 한다. 그래서 내 생각이 더 작아지고, 작아진 내 모습이 편하게 느껴질 때, 쓰는 것과 새로움을 향유하려는 습관에서 자유로워질 것 아닌가. 지금 느낌을 남기든 잊든, 그냥 내게서 나온 시간 따라 흘러가는 대로 훨훨 놔두는 습관을 손에 올리고 쓰다듬어야 할 것. 그게 내 시간이고, 나니까. 하하, 가끔, 이런 지금이 즐겁다.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