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 대한 이미지 기억은 단순 암기와 달리 실체와 똑같지 않습니다. 졸업한 지 수십 년 만에 찾은 초등학교는 지금껏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학교 진입로, 타마구 냄새나던 아스팔트 신작로는 여느 골목길과 다름없고, 지각한 벌로 쓰레기 줍던 망망대해 같던 운동장은 너무도 아담한 규모입니다.
사건에 대한 기억은 사람마다 조금씩 심지어는 엄청나게 다를 수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동시에 경험했다 하더라도 사건에 대한 선택적인 주의, 주관적인 느낌과 해석이 다르고 뇌라는 각자의 고유한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다 다르게 굴절되어 기억으로 저장, 인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니얼 레비틴은 기억은 ‘재생’이 아니라 ‘고쳐쓰기’를 하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종종 ‘그게 아니면 내 성을 갈겠다’, ‘내 손에 장을 지진다’며 기억력 내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이런 기억의 속성을 고려한다면 내가 기억하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장담, 단정하는 것은 유보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사람에 대한 기억은 어떨까요? 물론 한 사람에 대한 기억도 그를 아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우리가 누구를 기억한다고 할 때, 각 개인은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이 아니라 어느 부분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샴쌍둥이 조차도 서로를 완벽하게 기억할 수는 없겠죠.
복순씨는 군대에서 억울하게 아들을 잃었습니다. 아들과 사별한 지 몇 년 후에 어느 자선단체에서 아들의 생일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재능기부자들이 시를 창작, 낭독하고 손수 만든 생일 케이크가 배달되었습니다. 안락하게 꾸민 장소에는 아들의 유품이 전시되었고요. 아들이 어릴 때 쓴 동시들, 일기, 사진, 옷가지 등을 통해 생전에 아들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도 복순씨 아들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마음에, 몸에 담고 있었습니다.
참석한 가족과 친지, 아들의 친구와 선후배들이 아들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공통되는 점도 있지만 모두 다른 기억들입니다. 복순씨는 그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아들과는 또 다른 아들의 모습으로 새롭게 세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구보다도 내 아들은 내가 가장 잘 안다’는 어미들의 신념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아들은 내 아이만이 아닌 누군가의 둘도 없는 친구였고, 재롱둥이 조카였고, 다정다감한 연인이었습니다. 모카신을 신은 가끔은 엉뚱한 후배였고, 슬그머니 자기 아르바이트비를 주머니에 찔러주던 선배였습니다.
아들을 잃은 내 아픔만 생각하느라 돌아보지 못했던 다른 이들의 아픔에 복순씨의 마음이 많이 아려옵니다. 서로의 기억을 나누면서 슬픔이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분명 예전과는 달라진 슬픔의 질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망각할 수 없는 모든 이들의 기억의 연대가 주는, 고통 너머의 무언가로 인해 생일잔치 공간은 가슴 뭉클한 일렁임으로 가득 찼습니다.
기억이 사람마다 다르고 불확실하며 부분적인 것이긴 하지만, 서로의 기억을 공유한다면 그 한계가 줄어들고 좀 더 온전한 것으로 통합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가까운 이들과의 사별이 늘어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사별의 상실로 고통스러워할 때 ‘다 잊어버려, 세월이 약이야’ 같은 말이 별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은 나에게 소중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이 노력한다고 지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릭 캔델은 기억을 잃으면 과거를 재생하는 능력을 잃게 되고, 그 결과로 자신과의 연결은 물론이고 타인과의 연결을 잃게 된다고 했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 그와의 관계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전처럼 똑같은 관계를 이어갈 수는 없겠죠. 그래서 애도의 한 과제가 ‘고인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입니다. 죽은 사람과 생전하고는 다른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사별자가 기억하는 것을 충분히 말할 수 있게 잘 들어주고 기억을 함께 나누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복순씨는 가슴에 묻어 두었던 아들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펼쳐냅니다. 기분 좋고 흡족한 기억들도 있지만 후회와 자책이, 원망과 애달픔이 묻어있는 기억들도 있습니다. 아들의 지인들로부터 나온 기억의 조각들과 함께 복순씨는 기억의 조각 이불을 만듭니다. 기억의 조각 이불은 복순씨의 ‘안전 담요(security blanket)’가 될 것입니다. 아들의 살갗이 너무도 그립고 가닿고 싶은 간절함으로 내젓던 무수한 헛손질들, 그 헉헉함을 포근히 덮어 줄 ‘안전 담요’. 아들이 복순씨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차 봉 숙 (무용동작치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