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7.09 10:30 | 수정 : 2021.07.09 10:32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는 익산에서 출발하여 남원까지 전북 지역 폐사지 답사를 마치고 전남 지역으로 내려가야 하나 마땅한 답사지가 없어서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는 경남으로 넘어간다.

지리산 서쪽 바래봉 아래의 남원과는 반대쪽인 지리산 동쪽 산청과 함양 사이 황매산(해발 1103.5m) 남쪽 모산재 자락에 있는 합천 영암사지(靈巖寺址)는 지리산과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을 연결하는 중간쯤에 자리한 폐사지로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산 139번지이다.

▩ 합천 영암사 터 (靈巖寺址) (사적 제131호)

<황매산 남쪽 자락의 바위산(巖山) 모산재(767m)를 배경으로 자리한 영암사 터(사적 제131호) 전경. 모산재는 봉(峰)이나 산(山)이라 부르지 않고 `높은 산의 고개`라는 뜻의 재로 부르는 것이 특이한데 '신령스런 바위산`이란 뜻의 영암산으로 부르기도 한다니 절 이름 영암사가 여기서 유래한건 아닌가 싶다.>

영암사(靈巖寺)라는 절 이름만 주민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전해올 뿐 절이 지어진 연대나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그 내력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 일부가 확인되는데

서울대학교도서관에 탁본만 전하는 영암사적연국사자광탑비(靈岩寺寂然國師慈光塔碑)(1023년 건립)의 비문에 의하면, 932년에 태어난 적연국사가 개성 인근의 보법사(普法寺)와 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다가 물러나 1011년 가수현(현 가회면)의 영암사에서 거하다 1014년(고려 현종 5년) 향년 83세로 입적하여 영암사 서봉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비는 현존하지 않지만 현재 영암사지에는 당시 비를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귀부가 남아 있고, 서봉에 장사지냈다고 하는 적연선사의 부도가 대기(大基)마을 뒤쪽, 영암사에서 서쪽으로 약 1.5km 지점 산중턱에 현존하고 있어 관련 사실들을 뒷받침 하고 있다.

이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강원도 양양 사림사(沙林寺)의 홍각선사비(弘覺禪師碑) 비문에 “□年復於靈巖寺修正累月(□년복어영암사수정누월)”이라는 글귀가 있어 홍각선사가 영암사에서 몇 달 동안 수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금오산 자락에 세워진 선봉사 대각국사비에는 천태종 5대 사찰로 원주 거돈사, 진주 지곡사, 해주 신광사, 여주 고달사와 함께 영암사가 기록돼 있고 문헌에 남은 기록은 조선 고종 때(1872) 제작된 삼가현지도에 ‘영암사고지’(靈巖寺古地)란 글자와 탑이 표시된 것이 유일하다.

각종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흔적만 남기고 오간 데 없이 사라진 영암사는 9세기 초중반에 창건돼 1872년 이전에 폐사(통일신라~고려말)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민들이 지켜낸 폐사지(廢寺址)
현재의 영암사지는 1964년 사적 제131호로 지정된 이후 1984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시작한 이래 5차에 걸쳐 진행되어 금당터와 부속건물, 석축 등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되었으며 금당터에 삼층석탑과 쌍사자 석등이 있고 서금당터에 귀부 2점이 남아 있는데

전해오는 말로는 1933년 쌍사자 석등을 몰래 반출하려던 일본인들을 막아내고 석등을 지켜낸 주민들이 해방후 1959년에는 절터에 집 2채를 짓고 상주하며 절 터를 정리하고 방치된 삼층석탑과 쌍사자 석등을 바로 세우고 금당 터를 드러내게 하는 등 영암사지를 지키기 위하여 눈물겨운 노력으로 버텨왔다고 한다. 가회면민들께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1984년 첫 발굴조사 때의 영암사지 모습. 금당터를 발굴하는 장면이며 그 앞으로 보이는 삼층석탑 좌우에 주민들이 폐사지를 지키려고 세운 집 2채가 보인다. 현재는 모두 철거하고 부지 정리한 상태이다. (동아대학교 발굴사진)/ 사진출처=동아대학교>
현재 영암사지에는 이곳의 랜드마크처럼 멋진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과 삼층석탑(보물 제480호)이 있고 서금당터에는 귀부 2점(보물 제489호)이 남아있으며 발굴과정에서 8세기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나오기도 하였다.
<영암사 터 금당지의 삼층석탑(보물 제480호)과 쌍사자 석등(보물 제353호). 앞 마당 한가운데 삼층석탑이 서 있고 뒤쪽으로 길게 석축을 쌓고 높인 곳이 1차 금당터인데 금당 앞으로 연단처럼 돌출시킨 축대위에 쌍사자 석등을 세웠으며 그 좌우로 오르내리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영암사지 삼층석탑 (三層石塔) (보물 제480호)
<영암사지 삼층석탑(보물 제480호). 무너진채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69년에 주민들이 바로 세웠다. 2중 기단에 3층을 올린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층기단과 상층기단 공히 모서리 기둥(우주)과 가운데 기둥(탱주)를 새겼으며 탑신부에는 모서리 기둥(우주)만을 새겼다. 1층 몸돌에 비하여 2·3층은 크게 줄여 비례감과 안정감을 도모하며 전체적인 균형을 잡고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씩이고, 처마 밑이 수평이며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내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갔다. 탑의 머리장식부분은 전부 없어졌으나, 3층 지붕돌의 윗면에 쇠막대(찰주)를 끼우던 구멍이 있다.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 (雙獅子 石燈) (보물 제353호)

<쌍사자 석등은 금당지 앞에 축대를 연단처럼 돌출시킨 부분에 세웠으며 그 좌우로는 통돌을 깎아 만든 무지개(아치형)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게 한 설계가 멋스럽다. 계단에는 난간을 세웠던 흔적들이 발견된다.>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제353호). 영암사지의 랜드마크처럼 널리 알려진 석등이지만 1933년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반출하는 것을 마을 주민들이 막아내었고 면사무소에 보관하다가 1959년에 절터에 집 2채를 짓고 지키기 시작하면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984년 동아대학교 발굴 시작전 모습을 담은 사진에는 석등이 축대아래 석탑과 같은 지면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제자리가 맞는지 궁금하다. (동아대학교 발굴사진)/ 사진출처=동아대학교>

쌍사자 석등은 드물다. 전남 광주 중흥사지 쌍사자 석등(국보 제103호)과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정도가 비슷한 모습인데 이곳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이 조금 더 마멸상태가 심하고 일본으로의 반출을 막아내고 자리를 몇 번 옮기는 과정에서 그랬는지 다리도 부러져(그래서 국보가 안되었다는 설이 있다.) 보수하는등 피해가 심한 듯하여 안타깝다.

석등은 8각을 기본으로 하여 하대, 중대, 상대를 받치고 불을 켜는 화사석(火舍石)을 올린 후에 지붕돌을 얹은 구조인데 중대석이 사자 2마리가 선채로 가슴을 맞대고 머리를 든 채 앞발을 들어올려 상대를 받치고 있는데 갈퀴와 꼬리, 근육 등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팔각의 받침돌은 면마다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는 사자로 보이는 동물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얹힌 연꽃무늬 하대석에 사자 2마리가 올라서 있고 사자가 받치는 상대석도 연꽃무늬로 하대석과 대칭이 되는 앙련 무늬를 새겼다.

8각 화사석은 4면에 창이 있고 주위에 못자국이 있어 창호를 달았던 것으로 보이며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8각으로 얇고 평평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조각(귀꽃)이 솟아있다.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다.


금당 터(金堂址)

<쌍사자 석등 뒤 건물터가 1금당 터인데 몇 단을 쌓아올린 높이에 정사각형 가까운 모습으로 현재는 주춧돌이 제법 가지런히 남아 있고 중심에는 본존불을 모셨던 자리인듯 사각형 받침돌 형태의 석부재들이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 금당은 세 차례에 걸쳐 개축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금당은 사방에 계단을 낸 개방형 구조인데 계단의 소맷돌은 무언가 복잡한 모양이나 훼손이 심해 안타깝다. 정면 계단 소맷돌은 용(龍) 모양으로 추정되며 동, 서계단은 반인반조(半人半鳥)의 모습인 전설의 '가릉빈가'로 보이는데 동쪽 계단이 조금 더 확실해보인다.
<금당 터의 동쪽 계단. 계단 소맷돌의 외곽이 깨어진듯 하지만 중앙에 보이는 조각은 전설의 불사조, 인두조신(人頭鳥身)의 가릉빈가(迦陵頻伽)로 보인다.>
<금당 터, 동쪽 계단의 소맷돌 조각을 표시한 도면. 부드러운 신체 곡선과 춤추는 듯한 두 팔의 환상적인 율동이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데 계단 장식 중 최대의 걸작으로 꼽힌다. (동아대학교 발굴보고서)/ 사진출처=동아대학교>
금당을 둘러 싼 기단에서도 다양한 문양을 찾을 수 있는데 동서남북 각 면의 중앙에는 계단이 있고 그 좌우 기단석에는 커다란 안상이 서너개씩 있으며 그중 좌우로 한 곳에는 사자상을 새겼는데 (다른 안상에는 아무 조각이 없다.) 큼직한 덩치의 사자가 뒤를 돌아보거나 꼬리를 곧추세우고 무언가 주시하는 자세를 보이기도해서 흥미롭다.
<금당터의 남쪽 면 기단에 새긴 사자상. 계단 우측(上)과 좌측(下) 조각이다.>
<금당 터, 남쪽 계단의 좌 우 기단석 사자 조각을 표시한 도면. 커다란 안상 안쪽에 뒤를 돌아보는 모습과 조신하게 기다리는 모습의 사자상을 새겼다. (동아대학교 발굴보고서)/ 사진출처=동아대학교>

금당터 중앙에 있는 불대좌 자리로 보이는 사각 지대석에도 안상을 새기고 8부중상으로 보이는 조각이 식별되나 마멸이 심하여 잘 못보기 십상이다.

서금당 터(西金堂址)와 귀부(龜趺) 2개 (보물 제489호)

<서금당 터 전경. 앞에는 석등의 하대석과 부러진 중대석이 있으며 금당터가 도드라져 보이고 그 좌우로 귀부(龜趺) 2개(보물 제489호)가 놓여져 있다.>

삼층석탑과 쌍사자 석등이 있는 1금당터에서 왼쪽으로 50m쯤 뒤편에 서금당 터라고 부르는 공간이 있는데 한 사찰에 금당터가 2개일수 없으며 금당 좌우에 귀부(龜趺)를 2개씩 세울리 없다며 조사당(祖師堂)이 있던 곳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편의상 그렇게 부른다.

이곳에서 만나는 2기의 귀부(龜趺)가 볼거리인데 둘 다 비신과 이수(지붕)는 없어진채 거북 모양의 받침만 남아 있으며 이중 하나가 서울대학교도서관에 탁본만 전한다는 영암사적연국사자광탑비(靈岩寺寂然國師慈光塔碑)의 비좌(碑座)가 아닐까 싶다.

<서금당 터에 있는 2개의 귀부(龜趺) (보물 제489호). 왼쪽 귀부(①)와 오른쪽 귀부(②)의 원래 모습이었는데 고압 증기세척을 했는지 전체적으로 말끔해진것은 좋으나 비신(碑身)이 꼽혔던 자리라는 것을 알리려는듯 (비신을 복원한것도 아니고) 석재 한토막을 잘라 꼽은 모습(③ ④)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왼쪽(서쪽) 귀부는 오른쪽(동쪽) 귀부에 비하여 마멸의 정도가 조금 더 하며 그래서인지 선각(線刻)이 또렷하지 않아 보이나 그래도 당당한 모습이며, 오른쪽(동쪽) 귀부는 그 디테일에 있어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데 비신을 꼽는 자리인 비좌(碑座)의 측면에는 물고기 두 마리(雙魚)를 도드라지게 새긴것이 눈길을 끈다.
<오른쪽(동쪽) 귀부의 비좌에 새겨진 물고기 2마리. 서로 입을 마주하고 꽃봉오리를 물고 있는듯 하며, 반대쪽에는 서로 꼬리를 물고 물리는 모습이다. 김해 김수로왕릉의 쌍어문(雙魚文)과는 무관한지 궁금하다.(동아대학교 발굴보고서)/ 사진출처=동아대학교>
<오른쪽(동쪽) 귀부의 등판에는 육각의 귀갑문이 또렷하고 구름인지 꽃나무인지 곡선의 조각을 수놓았으며 비좌의 사각받침 긴 면에도(짧은 면에는 물고기 2마리 조각) 멋스러운 무늬를 새겼다.>
<왼쪽(서쪽) 귀부는 디테일한 새김이 별로 없으나 거북의 옆구리 아래에 커다란 안상 무늬를 새기고 그 안에 작은 꽃무늬를 새긴것이 눈에 띤다.>
적연국사(寂然國師) 승탑(僧塔) (경남 유형문화재 제360호)
<서울대학교도서관에 탁본만 전하는 영암사적연국사자광탑비(靈岩寺寂然國師慈光塔碑)에 1014년(고려 현종 5년) 향년 83세로 입적하여 영암사 서봉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 의거 영암사지에서 서쪽으로 멀지않은 대기마을 뒷산에서 찾아낸 적연국사 승탑(경남 유형문화재 제360호)이다.>

현장에 방치되어 흩어져 있던것을 수습하여 세웠는데 4각 지대석과 한 몸인 8각 하대석 각면에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사자를 조각한 것이 눈길을 끌며 그 위로는 운용문을 가득 새긴 덮개돌을 하나 더 얹었다.

8각 중대석에도 각 면마다 돋을새김을 하였으나 마멸되어 무엇인지 식별하기가 쉽지 않으며 상대석은 활짝핀 앙련 무늬를 조각하여 몸돌을 받치고 있다.

옥개석은 추녀 끝이 경쾌하게 들려진 모습이나 훼손이 많아 안타깝고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적연국사 승탑으로 추정되는데 탑비의 기록을 근거로 찾아낸것이 대단하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며 산다
 …(중략)…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정호승 ‘폐사지처럼 산다'


[계 속]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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