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 답사의 마지막은 경주 황룡사 터를 찾아 마무리한다.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 시내 한복판에 위치했던 황룡사는 신라 제24대 진흥왕 14년(533년)에 시작하여 제27대 선덕여왕 14년(645년)에 9층목탑을 세웠으니 무려 4대 임금, 93년에 걸쳐 지어진 신라 최대(最大) 제일(第一)의 사찰이다.
국가사찰의 격(格)을 갖춘 황룡사는 역대 임금들이 이 절에 와서 고승의 설법과 강의를 받았을뿐 아니라 신라삼보(新羅三寶) 가운데 금당에 모셨던 삼존불 중 주존불인 장육존상(丈六尊像)과 80m 높이의 9층목탑을 보유한 사찰이었으며
나머지 하나인 진평왕이 받았다는 천사옥대(天賜玉帶)도 나중에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물으니 황룡사 노승(老僧)이 알고 있었으나 찾지 못했다고 하니 황룡사에 보관한것은 아닌가 싶다. 이처럼 국가보물을 모두 소장했던 황룡사의 주지는 신라 최고 승관인 국통(國統)으로서 모든 승려와 승단을 통솔했으니 신라에서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다.
고려조에 들어와서도 황룡사는 호국사찰로서 높은 숭앙과 보호를 받아왔다. 현종 때인 1012년에는 경주에 남아 있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재목으로 구층탑을 수리하기도 하였고, 그 뒤 1105년에는 예종이 상서(尙書) 김한충(金漢忠)을 보내어 수리한 황룡사의 낙성식에 참석하도록 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황룡사는 1238년(고종 25) 몽고의 침입 때 모두 불타 버리고, 오늘날까지 다시 복원되지 못하고 민가와 경작지로 변하여 흔적만 남아 있었으며 1960년대에 재정비에 착수,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장기간 발굴조사를 통하여 사찰의 구조와 변천이 밝혀지고 각종 출토유물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황룡사 터 (皇龍寺 址) (사적 제6호)
황룡사(皇龍寺)를 짓기 시작한 진흥왕(眞興王)
불교를 인정하고 국교로 삼은 신라 제23대 법흥왕(法興王, 불교를 흥하게 한다는 뜻)은 스스로 승려가 되어 흥륜사에 들어가며 (후사가 없어) 조카인 진흥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은 7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모후의 섭정을 받았으나 친정을 시작한 이후 정복왕 소리를 들을만큼 신라의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화랑도 창설 등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그는 특히 선왕인 법흥왕 못지않게 불교에 심취해 흥륜사를 짓고 백성들이 출가하는 것도 허가하였으며 549년 양나라에 유학 갔던 승려 각덕(覺德)이 석가모니의 유골을 가지고 귀국하자 모든 신하들을 대동해 흥륜사 앞에서 영접하기도 하였다.
또한 553년(진흥왕 14)에는 월성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566년에 개략적인 완공을 보았으며 569년에는 주변 담장을 쌓아 17년만에 완공하였다. (삼국사기 566년, 삼국유사 569년 완성으로 기록)
신라인들은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에 용궁(龍宮)이 있다고 인식했는데, 진흥왕은 황룡사 건설을 통해 신비로운 용왕의 기운을 받고자 했을지도 모르며 사찰 명칭에 '황'(皇)을 사용해 왕실사찰임을 분명히 밝혔다.
진흥왕도 법흥왕처럼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는 기록도 있다.
100여년에 걸쳐 지은 황룡사(皇龍寺)
진흥왕이 17년만에 황룡사를 완공한 후 573년(혹은 574년)에는 황룡사의 본존불인 장육존상을 만들어 모셨고, 584년(진평왕 6)에는 이 불상을 위한 금당(金堂)을 지었으며
또한 645년(선덕여왕 14)에는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율사의 건의를 받아 9층목탑을 완성하니 진흥왕때 시작한 공사가 진지왕, 진평왕, 선덕왕까지 4대 임금에 걸쳐 93년, 거의 100여년 동안에 지어진 것이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기본적인 건축을 완성한 후 장륙불을 만들었고 그 장륙불을 모실 금당을 건축한 후 9층목탑을 세우는 순서로 진행되어 처음에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 1금당식 배치였으나 오랜 세월을 두고 증, 개축을 거듭하여 금당 좌우로 동, 서금당이 추가되니 드물게 1탑 3금당 체제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9층목탑이 사찰의 중심이 된것으로 보인다.
황룡사 본존불 장육존상(丈六尊像)
장육존상(丈六尊像)은 흔히 장육불(丈六佛)이라고 하며 불상의 키가 1장(丈) 6척(尺), 즉 16척이라는 것이니 1척을 30cm로 환산하면 약 4.8m가 되는 거대한 불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푼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장육(丈六) 1구와 보살상 2구의 삼존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장육불이 575년 눈물을 흘려 발꿈치까지 내려가니 진흥왕의 죽음을 예견한 것이라고 하며 몽골군 침략으로 황룡사가 불타 없어질때 녹아버린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머리 카락인 나발(螺髮, 꼬불꼬불한 머리) 조각이 남아있다.
또한 동금당 터에서는 9.5cm 크기의 흙으로 구워낸 불상의 손가락이 나왔는데 신라불상의 일반적인 비례로 계산하면 약 4m가 넘는 크기였을것으로 보여 동금당에도 대형 소조(塑造)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서금당 불상에 대해서는 실체를 알 수 없는데 창건가람때의 불상을 서금당으로 옮겨 봉안했는데 미륵불이었을거라는 추정이 있으나 확인은 어렵다.
솔거가 그린 벽화
황룡사 금당의 벽화를 유명한 화가 솔거가 그렸는데 그 중 늙은 소나무 그림은 나무 껍질이 갈라진 모양이나, 굽은 가지가 서로 얽혀 뻗어간 모습, 새파란 잎사귀들을 얼마나 생생하게 잘 그렸는지 마치 살아 있는 나무와 흡사하여 온갖 새들이 정말 소나무로 알고 날아와서 앉으려다가 벽에 부딪혀 떨어지곤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세월이 한참 흘러 색깔이 퇴색하여 희미해졌으므로 그림을 잘 그리는 한 스님이 그 위에 다시 색칠하였는데, 그 후로는 법당 문이 열려도 새들이 날아오지 않았다고하며 몽고 침입때 금당이 불타버린 후 솔거 이름만 전해오고 있다.
황룡사 9층목탑(九層木塔)
중국에 유학갔던 자장이 643년(선덕 12) 이제 귀국을 하려고 종남산의 원향선사에게 사직인사를 올리자 황룡사에 9층목탑을 세우면 발해의 여러나라가 모두 그대의 나라에 항복할 것이라고 한 말을 귀국하여 선덕여왕에게 전하고 허락을 받아 목탑 건립을 건립하게 되니
이간(伊干) 김용수와 백제의 장인(匠人) 아비지(阿非知) 등과 함께 건립을 시작하여 이듬해에 탑을 완성하니 9층으로 올린 것은 일본, 중화, 오월, 탁라(탐라, 제주?), 응유(백제), 말갈, 단국, 여적, 예맥(고구려) 등 아홉 나라를 막아낸다는 의미라고 한다.
당시 최고의 건축기술자인 백제의 아비지를 초빙하여 9층목탑을 세웠는데 그는 조국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고 공사에서 손을 떼려고 했으나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어떤 스님이 힘센 장사들을 데리고 나타나 중앙 심주(心柱)를 세우고 사라지자 하늘의 뜻인가 하고 할 수 없이 마무리까지 마쳤다고 한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신라 최고, 최대의 건축물로 우뚝 선 9층목탑은 너무 높아서 기록에만 모두 5차례(698년, 868년, 953년, 1035년, 1095년) 벼락을 맞았으며 718년과 768년, 927년에는 지진으로 건물이 흔들렸고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쳐 6~7차례 중수(重修)가 이루어졌다.
일설에서는 신라측 공사책임자 김용수(또는 김용춘, 진지왕의 아들로 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 문흥왕으로 추증됨)가 자기 아들 김춘추를 왕위에 올리려고 9층목탑을 세우면서 황룡의 기운을 4~5Km 떨어진 아버지 진지왕 묘소로 연결되도록 하였고 그 결과 자기 아들 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태종 무열왕이 되었다는 풍수지리학계의 주장이 있어 흥미롭다.
황룡사 9층 목탑 약사(略史)
- 553년(진흥왕 14) 새 궁궐을 짓다 황룡이 나타나 절로 고쳐 짓다
- 566년(진흥왕 27), 혹은 569년(진흥왕 30) 황룡사 공사 완료
- 643년(선덕왕 12), 혹은 644년 9층목탑 짓기 시작
- 644년(선덕왕 13), 혹은 645년 9층목탑 완성
자장법사가 가져온 사리를 안치
- 871년(경문왕 11), 혹은 872, 873년 9층목탑을 다시 짓다
3번째 벼락, 4번째 중수 (고려 광종, 현종)
4번째 벼락, 5번째 중수 (고려 정종, 문종)
5번째 벼락, 6번째 중수 (고려 헌종)
- 1238년(고종 25), 몽골군대가 황룡사를 불태우다.
*** 황룡사 답사기는 1, 2편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계 속]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