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9층목탑(九層木塔)을 세운 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 제27대 선덕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우리 민족사 최초의 여왕이다.
제26대 진평왕이 아들이 없어 성골(聖骨) 남자의 대가 끊어지자 장녀(차녀로 기록된 곳도 있음) 덕만(德曼)을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재위 내내 강성한 고구려와 백제의 공세에 시달리며 전쟁을 치루어야했고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니 여자가 다스려 그렇다는 조롱을 받는 등 쉽지 않은 외교적 상황을 이겨내야 했으며 국내적으로도 여자 군주를 인정하지 않는 진골 세력의 반란을 막아내고 민심을 수습해야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나
첨성대와 분황사를 세우고 황룡사에는 9층목탑을 건립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 여왕이 다스리는 신라의 위용을 갖추려 노력하였으며 김춘추, 김유신 같은 뛰어난 인재들을 양성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특히 황룡사에 9층목탑을 세우면 아홉나라가 신라를 섬기게 된다는 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건축을 추진케 하니 93년간 이어진 황룡사 건축을 드디어 마무리 한것이나 당시 외우내환 상황에서 이처럼 대규모 국책사업을 추진하여 민심이 동요하고 반대세력에게 반란의 명분을 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이 3가지 일을 미리 알았다'는 얘기가 있는데 첫째 당 태종 이세민이 보낸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없어 향기 없는 꽃이라는 것과 백제군이 여근곡(女根谷)에 숨어 있는 것을 맞춘 일, 그리고 자기가 죽을 일시를 알고 묻힐 자리를 정했다는 것이다.
선덕여왕이 총명했다는 이야기인데 사실 그녀가 재위하는 기간중에는 신라, 백제와는 전쟁이 격화되었고 당나라와 외교는 힘들었으며 여성 군주에 대한 반감 등이 겹쳐 비담과 염종의 반란등 내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실제 그녀는 반란 와중에 병사(病死)하였다.
사서(史書)에는 그녀를 여왕이라 하지않고 선덕왕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제37대 선덕왕(宣德王)과 구별하기 위해서 편의상 선덕여왕이라고 한다. (신라에 선덕, 진덕, 진성 3명의 여왕이 있었지만 사서에 특별히 여왕이라고 기록하진 않았다.)
황룡사 9층목탑(九層木塔) 수난사(受難史)
1400년 전에 세워진 황룡사 9층목탑은 기록으로만도 5차례 벼락을 맞았으며, 3번 이상 지진으로 흘들렸고 이와같은 재난때문에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쳐 6~7회의 중수(重修)기록이 있다.
그만큼 황룡사 9층목탑은 관리도 힘들고 우여곡절도 많았는데 871년(혹은 872, 873년) 경문왕 때에 탑이 기울어지자 허물고 다시 짓게 되었는바 이때 최초 건립 과정과 중수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금동 찰주본기(刹柱本記)와 사리장엄구들을 목탑의 사리공에 넣고 봉인하였으며 이 소중한 유물들은 몽고의 침략으로 황룡사 전체가 불타버릴때에도 심초석 안에 온전하게 남아있었으나 1964년 어느날 밤에 그만 도굴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즉, 그때만해도 황룡사 터는 민가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 있었고 주민들이 밭을 일구는 경작지였는데 1960년대 들어서 황룡사 터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고 그에따라 1964년에 재정비에 나서게 되어 먼저 9층목탑지 심초석위에 자리하던 민가 한채를 헐어 심초석이 드러나게 하였는데
이 심초석에 먼저 달려든것은 도굴꾼들이었으니 1964년 12월 26일 야음을 틈타 3톤짜리 잭을 이용하여 덮개돌을 들어올리고 심초석 사리공 안에 있던 사리장엄구 일체를 너무나 쉽게 훔쳐가버렸다.
그 범인들은 2년뒤인 1966년 9월 3일, 불국사로 들어가 석가탑 사리장엄구를 훔치기로 하고 같은 방법으로 잭을 이용하여 1층 옥개석을 들어올렸으나 잭이 약해서 실패하자 다음날 더 큰 잭을 가져왔지만 사리공을 찾지 못하였으며, 다음날 다시 들어가 3층 옥개석을 들어올렸지만 역시 사리공을 찾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그러나 도굴 흔적으로 석가탑은 기울어졌으며 이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도굴꾼들이 찾지못한) 2층 몸돌에서 사리공이 발견되고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 특히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 발견되는 전화위복(?)이 있었다.
석가탑 사리공의 위치를 못찾아 도굴에 실패한 것이니 탑마다 사리공의 위치를 일정하게 하지 않고 불규칙하게 정한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하게 된다.
불국사 석가탑 도굴미수 사건은 파장이 크게 번져나가 결국 범인 2명과 중간판매상을 잡았으며 이들이 황룡사지 9층목탑터 심초석 사리장엄구도 도굴한 범인임이 밝혀져 2년전 도난 당했던 소중한 유물들을 되찾게 되었지만 그게 온전한 전부인지? 일부 훼손되거나 미회수 된건 아닌지? 다른 것과 섞인건 아닌지? 등등이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1960년대만해도 문화재 관리실태는 부실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전문 도굴꾼들이 성행하여 주요사찰이나 폐사지는 물론 왕릉이나 사대부 묘소도 마구 파헤치는 일이 빈번하였으며 도굴품의 암거래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져 이들은 겨우 15만원에 황룡사 9층목탑 사리공 유물들을 팔아넘겼다고한다.
그렇게 세상을 한바탕 뒤흔든 도굴사건으로 텅 빈 심초석이나마 뒤늦게 공식 발굴조사를 하기에 이르니 30톤 가량의 심초석을 들어올릴 크레인을 구하지 못해 애태우다가 1974년 당시 포항제철에서 100톤 크레인을 빌려와 겨우 들어올리게 되었다.
도굴된후 2년만에 되찾아 압수한 유물들은 찰주본기(刹柱本記)를 비롯하여 (1) 금동외함/내함, 은제팔각사리탑과 소원판, 금동팔각사리탑, 청동뚜껑 (2) 금합과 은합, 청동소원통, 방형소함, 은제원합, 원화반형구와 (3) 중화(仲和) 3년 금동원통... 등으로
전문가들에 의하면 (1)은 9층목탑이 확실하나 (3)은 김유신 관련사찰 석탑으로 보이며 (2)는 황룡사 이외의 것이 섞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며 기록에 유리병을 넣었다고 되어있는데 유리병이나 조각은 발견되지 않았다. 유물의 교란(섞임)과 훼손이 추정되는 안타까운 일이다.
9층목탑 금동찰주본기 (金銅刹柱本記) (보물 제1870호)
심초석 사리공에 들어있다가 도굴된후 다시 찾은 유물들중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은 황룡사 찰주본기(刹柱本記) (보물 제1870호)인데 찰주(刹柱)란 중심기둥을 가리키는것이니 9층목탑을 중수할 때 중심기둥을 세우면서 쓴 기록이다.
9층목탑을 처음 세울 때 넣은 것이 아니라 871년(혹은 872, 873년)에 목탑을 중수할 때에 넣은 것인데 자장의 건의로 목탑을 처음 세운 경위와 문성왕때 기울어져 경문왕때 탑을 허물고 다시 세운 이야기, 경문왕이 신하들과 가서 기둥을 들고 심초 사리공 안을 들여다 본 과정, 이전의 사리를 그대로 두고 거기에 사리 1백매와 법사리 2종, 찰주본기를 넣었다고 적고 있다.
1966년 도굴범이 검거된 후 도난유물을 압수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하였으며 처음에는 녹이 두껍게 덮여 몇 글자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나, 1972년 복원작업을 통해 거의 판독하게 되었는바 찰주본기 금동사각판 4장중 금강역사상을 새긴 (문짝 역할하는) 1장외 나머지 3면의 안팎으로 6면에 모두 925자의 기록이 새겨져 있다.
명문(銘文)은 뾰족한 칼로 글자의 윤곽을 그린 쌍구체(雙鉤體)이며 당시 신라에서 유행했던 왕희지체와 구양순체가 섞여있다고 하며, 본기(本記)는 박거물이 찬하고 당대명필 요극일이 썼으며 승려인 총혜와 조박사, 연전 등 3인이 전각한 것이다.
찰주본기(刹柱本記)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 후대의 역사서(歷史書)가 아닌 중수 당시에 제작된 유물을 통해 생생히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후대 역사서 기록들과 상호 비교 검토가 가능하여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한 면에 새겨진 금강역사상 2구는 871년이라는 제작시기를 알 수 있어 불교미술과 금강역사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황룡사 9층목탑 복원(?)
1970년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여러가지 상황으로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한듯하며 이후에도 다양한 계획이 공표되고 추진되었으나 중앙정부의 지원부족, 사업의 장기간 소요 등으로 역시 미흡한 추진 실정을 보이다가
지난 2013년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사업"으로 황룡사지 등 8개 핵심유적 복원 및 정비사업을 추진키로 하면서 사업추진단도 발족시키고 2019년에는 관련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등 진척을 보인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특히 황룡사지에 대하여는 어떤 사업을 어떻게 할것인지 알지 못한다.
아마 그 사업의 일환으로 경주시립 박물관 성격의 '황룡사 역사문화관'을 폐사지 옆에 지어 운영하고 있는듯한데 수십배 많은 자료가 있는 국립경주박물관은 무료인데 비하여 이곳은 3000원의 입장료를 받고있어 옳지 못하다는 여론이며
특히나 황룡사 9층목탑이나 금당 등을 복원할 것인지가 궁금한데 익산 미륵사지의 동탑 복원에 대한 혹평과 서탑 현상복원에 대한 긍정적 반응을 참고한다면 확실한 기록이나 근거없는 황룡사의 복원사업은 부정적이다. 아마도 관련 학계나 전문가들 역시 비슷한 의견일 것으로 보인다.
지금 경주를 방문하면 보문단지내 세계엑스포문화공원에 경주 타워 건물이 여백으로 9층목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나름대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보여주고 있는것 정도는 나빠 보이지 않으며
근처에는 독실한 불교신자가 회장인 동국제강에서 세운 황룡원(黃龍院)이 9층목탑을 현대식으로 재현(?)하여 높게 서 있는데 이곳에는 모형 석굴암도 조성한 '대원정사'라는 사찰을 운영중이며 불교관련 명상이나 치유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는 듯하다.
과거 9층목탑을 올라가 본 문인들의 글이 몇 점 남아있고 삼국유사(사기) 등에 서술된 것은 있으나 목탑을 그린 그림이나 상세한 모양과 구조을 알 수 있는 근거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근거로 9층목탑을 추정하고 유추해서 저렇게 복원하고 모형이나 유사한 건물을 짓고 운영하는 것일까? 그밖에도 다양한 도면이나 디지털 화면으로, VR(가상 현실) 등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경주 남산 탑골 부처바위라는 마애불 옆에는 9층탑의 모양이 새겨진 그림이 있고, 또한 경주의 탑에서 9층 소탑(小塔)이 나와 참고가 된다고 한다.
기우 (杞憂)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시멘트로 9층목탑을 지으라고해서 하마트면 최악의 문화재복원이 실현될뻔 했으나 10.26 사태로 유야무야 된적이 있다고 한다. 관심을 가져주고 예산을 지원해주는건 몰라도 문화재 복원이나 학술조사, 발굴조사 등을 권력자가 왈가왈부해서는 왜곡된 결과가 나올수 있어 두렵다.
지금도 경주 지역에 관련된 복원사업들이 여전히 추진되고 재촉되고 있는 듯하여 한편으로 걱정이다. 자칫 상상하는 모습을 짓거나 놀이동산 수준이 되지는 않을까 무섭고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로마의 유적을 보면 도심 한가운데 있지만 현대와 공존하면서 있는 그대로를 발굴하고 조사하고 관광객에게 공개한다. 콜로세움을 온전하게 다시 짓는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가까운 일본도 대규모 유적은 50년, 100년을 두고 조사하고 발굴하고 보존하는 정책을 편다고 한다.
지금 우리의 나라형편이나 건축기술로 보면 9층탑아니라 90층탑도 지을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황룡사 9층목탑을 복원하는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이자 문화이기때문에 뚝딱- 지을수 없다는 것이다. 이 걱정이 기우(杞憂)이기 바라며
그동안 34편으로 이어온 폐사지 답사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 끝 ]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