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8.10 10:32 | 수정 : 2021.08.10 10:40

(10회) 솔직한 자기 주장

누군가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당하거나 공격받았다고 생각할 때, 대면한 자리에서 되받아치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강한 존재일 때, 특히 갑을 관계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감히 대응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공격성에 대한 인식의 문제도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공격성이 필요하고 적절하게 표출되어야 하는데, 공격성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간주합니다. 부당하게 받은 공격에 대해 정당하게 맞서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반격하는 자체를 꺼리게 되죠. 이런 이유로 면전에서는 침묵하지만, 문제는 부당한 대우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를 어떻게든, 언제든 되돌려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꿈틀댄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의적 태만, 일을 지연시키기 등 우회적인 방법으로 상대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것을 ‘수동 공격’이라고 합니다.

수동 공격성이 부당하게 당한 약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약점이나 실수에 대한 비판과 지적이 너무나 공정한 것이어서 아무런 반격의 명분이 없지만, 수치심에 압도당하게 되면 상대방을 기습공격하고 싶은 반감이 생깁니다. 이 경우 반감을 표현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교묘한 방법으로 상대방에게 타격을 가합니다.

‘수동 공격’은 응어리진 기분을 일시적으로 가라앉힐 수는 있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소심한 일회적 공격에 그치지 않고 점점 강도가 세지기도 하죠. 자신이 드러나지 않고 은밀히 공격을 가해야 하기 때문에 방화나 살인 같은 예기치 못한 큰 사건으로 비화되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내재해 있는 분노와 공격성이 애매하게 표현되기 때문에 소통에 혼란을 주고 성격장애로 발전되기도 합니다. 더욱이 ‘수동 공격’은 상대방의 부당한 공격을 제어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뒤통수를 맞은 듯한 뭔지 모를 불쾌한 심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상대방의 공격성을 더 키워 줄 수 있죠. 결과적으로 ‘수동공격’을 가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 모두가 피폐해지게 됩니다.

사진제공=차봉숙

유치원이 끝나고 손주를 데리고 오는데 연신 씩씩대던 아이가 갑자기 다시 유치원으로 뛰어갑니다. 아이는 아무도 없는 교실에 들어가 영숙씨가 말릴 틈도 없이 다른 아이가 만들어 놓은 레고 공작물을 부숴 버립니다. 사연인즉 레고 공작물의 주인인 아이가 오늘도 영숙씨 손주의 간식을 빼앗아 먹었다는 거예요. 싸우려 들면 상대가 덩치 큰 아이라 얻어맞을 것 같고, 선생님께도 혼날 것 같아 아무 말도 못 했다며 아이가 엉엉 울기 시작합니다. 손주를 보며 경숙씨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나이 차이가 열 살이나 되는 오빠는 영숙씨에게 정말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자기가 할 일인데도 어린 영숙씨에게 뭐든 명령하듯 지시했죠. ‘영숙아, 물 떠와.’ 영숙씨는 말은 못 하고 입만 비쭉댑니다. 속으로만 ‘아니, 자기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불평하면서요. 그 모습을 본 오빠는 ‘너 표정이 그게 뭐야?’ 하며 얼굴이 험악해집니다. ‘응, 알았어.’ 상냥한 척 대답했지만 영숙씨의 마음속에서는 불덩이가 이글거립니다. 수돗물을 컵에 담은 후 오빠 몰래 컵 속에 자신의 더러운 손가락을 넣어 휘젓다가 갖다줍니다. 들킬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만 성이 좀 풀리는 것 같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영숙씨는 지난날 직장 상사에게도 시부모님이나 남편에게도 직접적으로 자기주장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직접 반대하지는 못하고 못 들은 척하고 있다가 언제 그랬냐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직접적인 충돌과 대립을 회피하려고 고분고분 넘어간 듯했지만, 마음은 꼬불꼬불 꼬일 대로 꼬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레고 공작물을 부수는 손주의 모습에 오빠의 물컵에 손가락을 휘젓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영숙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성격도 대물림되나? 를 생각하니 이제부터라도 솔직하게 자기주장을 해야겠다는 용기가 생깁니다.

“엄마, 조금 있다 애 맡겨도 괜찮지?” “아니. 선약이 있어. 애 맡길 일 있으면 미리 말해줘.”

“여보, 내가 다 결정했는데 불만 없지?” “결정하기 전에 내 동의를 얻지 않아서 불만이에요. 나랑 관련된 건 미리 상의해 주세요.”

“여사님, 저쪽도 치우세요.” “저긴 내 구역이 아닌데요. 담당자가 누군지 먼저 알아보세요.”

면전에서 솔직하게 할 말 다 하니 뒷말할 필요도, 화가 쌓일 일도, 토라질 일도 생기지 않아요.
뒤늦게 은근슬쩍 공격할 궁리를 안 하니 영숙씨 마음이 평온합니다.

차 봉 숙 (무용동작치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