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살 때 이건 반드시 그가 좋아할 거라고 확신하며 물건을 고릅니다. 확신의 근거는 ‘이런 선물을 받을 때 나라면 정말 좋을 거야’라는 내 기준입니다. 막상 선물 받은 사람이 기대만큼의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내가 가졌던 확신이 깨지게 되죠. 결국 의도와는 달리 상대방이 좋아하는 게 아닌, 내가 좋아하는 걸 선물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나이 드신 부모님들이 제일 좋아하는 선물은 뭐니 뭐니 해도 돈 선물입니다. 자식들은 고심 끝에 부모님이 정말 좋아하실 물건을 골라 선물합니다. 그러나 정작 부모 입장에서는 소용이 없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선물일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현금을 선호하게 되는 거죠. 부모 자식이라는 일촌 간에도 선물 취향조차 알기가 쉽지 않으니 ‘나라면’이라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챈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북미의 체로키 인디언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나라면’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그의 신발을 신고 1마일(약 1.6km)을 걸어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역지사지가 어렵고 ‘나라면’이라는 가정은 신중해야 함을 일러줍니다.
‘나라면 이렇게 하겠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내린 상대방의 성격 판단으로 다른 사람의 행동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성격 판단에는 항상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또한 누군가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는 성격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환경과 당시의 상황 그리고 사회적 시스템 등 복잡한 관계에서 주고받는 영향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고 상대적인 개개인의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에 쉽사리 ‘나라면’이라고 말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2004년 이라크의 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서 끔찍한 학대 사건이 폭로되었습니다. 미군 병사들이 수감자들에게 가한 학대 사진이 공개되자 온 세계 지구인들은 경악했죠. 벌거벗긴 포로들을 짐짝처럼 쌓아 놓고 그들을 희롱하며 위협하는 미군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포로들을 그저 전리품으로 취급하며 희희낙락하는 미군들에게서 어떤 인간성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 미군 학대자들이 평시에는 그저 선량한, 개중에는 신앙심 깊은 일반 시민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선량한 시민이 극악한 학대자로 돌변하는지 일상에서 보였던 그들의 성격만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사람의 행동을 단순히 성격만 가지고 해석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극한의 상황과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는 누구든 ‘평범한 악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아부그라이브 학대 가담자들의 행동은 전쟁이라는 비인간적인 상황과 부조리한 군사조직 체계를 전제할 때라야 사실 인정이 가능합니다. 그들이 얼마 전까지 이라크 현지인들을 돕는 평화의 전령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나라면’이라는 가정은 때론 상당히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영주씨는 방과 후 아이 돌봄을 하며 손주뻘 되는 아이들에게 종종 예상치 못했던 것을 새롭게 배웁니다. 초등 1학년 아이가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친구 얘기를 합니다. ‘너라면 어떻게 했겠어?’ 영주씨가 묻습니다. 아이는 단박에 ‘몰라요, 내가 걔가 아닌데 어떻게 알아요?’하고 말합니다.
아이의 당돌한 대답에 영주씨는 잠시 한 대 맞은 듯 띵해집니다. 아이 말대로 내가 그가 아닌데 ‘나라면’이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처한 사정이 어떤지, 그가 겪고 있는 심정이 어떤지 잘 모르면서 ‘나라면 이렇게 하겠다’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영주씨는 그동안 ‘나라면 이렇게 하겠다’라는 어설픈 조언으로 속 아픈 사람들을 더 속 터지게 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봅니다.
귀갓길에 흥얼대던 ”이 몸이 새라면”이라는 노래가 영주씨에게 오늘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영주씨는 어린 시절 새처럼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고 싶었습니다. 새는 언제나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어 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제야 새가 날기를 멈추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생각이 듭니다. 먹이를 찾아 떠나는 힘겨운 비행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을지, 새로 만난 친구새와 함께 그대로 정착하고 싶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으니 영순씨는 새의 마음이 어떨지 앞으로도 모를 겁니다.
사람의 마음을 모르기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람에게는 마음이 어떤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 짐작으로 내 기준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나라면’은 억측을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내가 아니고, 나처럼 될 수 없는 상대방에게 ‘나라면’이라는 가정은 자칫 ‘나처럼 해 봐라, 이렇게’로 도움이 되기보다 심리적 부담만 더 줄 수 있습니다.
차 봉 숙 (동작치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