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10.05 15:15

(18회) 나는 이런 걸 원해요

진수씨는 얼마 전 평생 일했던 직장에서 은퇴했습니다. 일 밖에 모르고 성실히 살아온 덕에 노후걱정없이 잘 살 것 같았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뭔가 말을 하려면 목이 막히고 울컥해지는 일이 잦아지는 겁니다. 진수씨는 워낙 말수가 적고 너무 과묵한 사람입니다. 일만 하는 직장에서는 장점이 되기도 했지만 함께 사는 아내의 속은 꿰맨 자리가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늘상 아내에게 말 좀 하라는 다그침을 받고 살았는데, 이제는 이런 현상 때문에 더 말을 안 하게 된다고 하네요.

얼마 전 손주 아이가 백화점에서 장난감을 사달라고 할 때도 생뚱맞게 목이 막히고 울컥했답니다. 비싸도 다 사줄 만한 자신의 재력에 대해 뿌듯해하고 흔쾌히 사주려는 데 느닷없이 나타난 목 막힘과 울컥함을 진수씨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죠.

이런 감각에 얽힌 무언가를 찾아 진수씨는 어린 시절로 갔습니다. 시내에 있는 큰 문방구입니다.

빨강색 트럭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기차를 고른 동생이 먼저 엄마한테 뛰어갑니다. “우리 착한 맏이가 또 양보하네” 엄마의 말에 어린 진수씨는 슬그머니 트럭을 내려 놓습니다. 진수씨네는 당시에 꽤 잘 사는 집이라 떼를 쓰면 원하는 것을 가졌을지도 모르지만 진수씨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았습니다. 늘 양보하는 착한 아이, 아무 말없이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과묵한 맏형이 되어야 하니까요. ‘엄마, 나도 이 트럭 갖고 싶어요, 왜 맨날 나만 양보해야 되는데?’ 학창 시절 내내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진수씨의 이 같은 욕구와 억울한 감정들은 한 번도 표현되지 못했습니다. 목구멍에 쌓인 채로 갇혀 버리고 말았죠.

사진제공=차봉숙
정신과의사 베셀 반 데어 콜크는 ‘몸은 기록한다’고 했습니다. 사건사고를, 막힌 욕구와 감정을 몸이 기억하고 기록했다가 진수씨의 경우처럼 몸의 감각으로 신호를 주게 됩니다. 더 이상 쌓아둘 데가 없어 울컥 올라오니 마음의 체증을 풀어주라는 경고를 보내는 거죠.

“어떤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을 뛰어넘은 것이다.”

히포크라테스의 말입니다. 여기서 어떤 것이 욕구라고 한다면 ‘나는 이것을 하고 싶다, 나는 이것을 원한다’ 고 말 표현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말 표현만으로도 마음의 응어리가 해소되어 찌꺼기로 영영 남지 않을 수 있죠. 욕구의 해결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 곧 욕구의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욕구를 다 해결하고 살기는 힘듭니다. 더욱이 내 욕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받거나 희생된다면 안 될 일이죠. 나의 욕구와 다른 사람의 욕구가 상충될 때는 타협과 조절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도 나의 욕구가 정확히 표현되어야 합니다.

욕구 표현이 잘 되지 못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진수씨처럼 칭찬의 올가미를 걷어내지 못하고 욕구 표현을 철수하기도 합니다. 자기 욕구보다 속상해하는 부모의 눈치를 먼저 살펴야 했던 ‘어른아이’는 커서도 솔직한 욕구 표현이 어렵습니다. 내가 뭘 원한다고 말했을 때 그대로 수용되지 않고 비난받은 경험이 있으면 욕구 표현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예 입을 열지 않거나 에둘러 말하다 보니 뭘 원하고 어떻게 하고 싶은 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죠.

스스로 욕구 표현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타의로 욕구 표현이 저지당하다 보면 자신의 욕구가 뭔지도 모르게 되는데요, 자신의 욕구를 모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개개인의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과도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죠. 사실 의식주와 애착 같은 생존의 기본 욕구부터 사람마다 원하는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러니 욕구는 자기 정체성의 일부이고 자신의 욕구를 모른다는 것은 나를 잘 모른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진수씨는 목구멍에 가득 차 있던 지난 날 자신의 욕구들을 하나씩 꺼냈습니다. 그리고 현재 자신이 뭘 원하는지, 뭐가 필요한지, 뭘 하고 싶은지를 써 봅니다. 평소 원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내고 글로 표현하느라 여러 날이 걸렸습니다. 다 쓴 걸 읽어 보니 훌륭한 자기소개서입니다. 자기소개할 때마다 이름, 나이, 직업이 다였는데 그나마 은퇴 후로는 직업 항목마저 줄어 걱정했던 진수씨라 이런 식의 자기소개서가 썩 마음에 듭니다. 자신의 현재 욕구를 표현하고 나니 앞으로 살아갈 모습이 그려져 마음이 환해집니다.

차 봉 숙 (무동동작치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