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과 사랑에 푹 빠진 사람들에게 사실 공식적인 와인 데이(Wine Day)는 필요 없지만, 국제 와인 데이는 매년 5월 25일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은 10월 14일을 와인 데이로 지정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와인잔을 기울이며, 지루한 일상에 변화를 주며 삶을 추억하고 있다. 마케팅이지만 싫지 않은 그런 날이 아닐까? 가을 낭만의 밤을 위한 와인을 만나보자.
와인에서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사람마다 다를 거 같다. 글을 읽기 전, 단 수 초만이라도 스스로 와인의 어떤 점이 가장 좋은지 생각해보자. 누구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복합적인 향에서, 누군가는 깊은 맛에서, 또 다른 이는 긴 여운에 상념을 실을 수 있기 때문일 수 있다. 필자는 꽉 채워 따르지 않은 와인잔의 빈 곳을 이야기로 채우는 추억, 공감을 제때 잘 표현하지 못했거나 위로하기 힘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서툰 마음 대신 건넬 수 있어 와인을 좋아한다. 때론 한 잔의 와인이 내 심장 위에 따스한 손을 얹으며 ‘고생했고 잘 해왔고 다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거 같아 마음의 영점을 잘 맞추고 다시 성실한 삶을 이어가게 된다. 잘했고 못 했고 잘났고 못났고 맞고 틀리기를 결정하려는 답 없는 이야기에서 벗어나는 그 순간이 필자가 지금까지 와인을 좋아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순간은 마치 마법처럼 2009년 호주 태즈메이니아에 있는 도멘 에이(Domaine A)라는 와이너리에서 아주 오래 숙성된 카베르네 소비뇽을 마실 때 처음 찾아왔다. 와인을 시음하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고, 주위가 고요해지며, 그 눈물과 함께 뜨거운 응어리가 가슴에서 빠져나가는 느낌, 그 후 숨 쉬는 공기도 하늘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일이 생겼다. 그 놀라운 경험은 아프고 쓰려도 잊지 못하는 첫사랑처럼 지금까지 생생하다. 그래서 적어도 필자에게 호주를 유럽에 비교해 신대륙이라 하며 후자를 어리고 미숙하게 보는 시선은 무조건 수용하긴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와인 업계 어르신들은 이 이야기를 ‘신내림’을 한 거라 시며, 와인 업계에서 쭉 활동하라 격려해 주셨다.
이제 3장 남은 2021년 달력을 놓고 싱숭생숭, 햇빛마저 흐릿해져 모든 게 빛바랜 것처럼 보이는 가을,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주고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마음에 색을 입힐 와인 한 잔 어떤지. 때론 무자비하기도 한 가을의 낭만에 맞는 붉은 와인들을 만나보자. 여러분의 와인 여정에도 와인 신이 머물다 가는 순간이 있길 바라본다.
베이 오브 파이어 피노 누아 Bay of Fires Pinot Noir
호주 태즈메이니아는 남극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차가운 해류로 서늘한 기후를 지닌다. 따라서, 이곳은 최고 품질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 이 품종들로 스파클링 와인 생산이 가능하다. 만약, 피노 누아 애호가라면, 태즈메이니아는 고품질 피노 누아 생산지로 꼭 기억했다가 맛보면 좋다. 베이 오브 파이어는 포도밭을 개발하고 와이너리를 세우면서 철저하게 계획되어 짧은 역사에도 최정상 와이너리로 자리 잡았다. 이들이 재배하는 피노 누아는 MV6 클론으로 중국 요리에서 느껴지는 화한 향신료 향이 특징적이다.
베이 오브 파이어 2020년 산은 호주에서 가장 중요한 와인 품평회인 로얄 애들레이드 와인 쇼(Royal Adelaide Wine Show)에서 가장 뛰어난 레드 와인으로 인정받으며 막스 슈버트(Max Schubert, 호주 명품 와인 펜폴즈 그랑쥐 만든 와인 메이커) 에이엠 트로피(AM Trophy)를 받았다. 쉬라즈나 카베르네 소비뇽이 보통 이런 상을 받는데, 피노 누아로 이 상을 받는 건 큰 의미를 지닌다. 현재 한국에서는 2019년 산이 유통 중인데, 기억해 두었다가 2020년 산도 꼭 맛보길 추천한다.
와인은 밝고 영롱한 루비색을 띤다. 매우 복합적인 달콤하게 잘 익은 딸기, 중국 향신료인 스타 아니스(팔각), 계피 등을 느낄 수 있다. 맛을 보면, 굉장히 우아하고 유연하지만, 동시에 힘, 강렬한, 긴 여운을 지녀 큰 만족을 준다. 중간 정도 강도의 타닌에 향에서 느낀 달콤한 딸기 풍미를 느낄 수 있다.
그랜트 버지 리틀 킹 바로사 Grant Burge Little King Barossa
그랜트 버지는 1865년 바로사 밸리에서 시작해 5대에 걸쳐 바로사 터줏대감으로서 포도 품종별 최고 테루아에서 자란 포도로 프리미엄 와인을 만들고 있다. 그랜트 버지는 규모로 보면 바로사 배리 제2의 와인 브랜드이자, 호주 와인 최고 평론가인 제임스 할리데이(James Halliday)가 15년 지속해서 최고 등급인 5 레드 스타를 주고 있다.
그랜트 버지는 여러 제품군을 생산하는데, 리틀 킹 바로사는 그중 비네론 콜렉션(Vigneron Collection)에 속한다. 테루아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 와인으로 맛보는 즐거움이 크다. 리틀 킹 바로사는 프랑스 남부 론 밸리 영향을 받은 블렌딩으로 그르나슈(Grenache), 시라(Syrah), 무르베드르(Mourvèdre)순으로 블렌딩 됐다. 그랜트 버지는 오랜 수령 그르나슈를 갖고 있으며, 그르나슈를 다루는 솜씨가 탁월한 와이너리로 평가받는다. 호주 바로사 밸리 그르나슈는 모래 토양에서 자라 필록세라 피해를 겪지 않았고, 깊이 뿌리를 내린 덕분에 기후 변화에도 안정적인 맛을 내는 장점을 지닌다. 그르나슈는 자칫 산도가 떨어져 쉽게 산화되어 향과 맛이 변할 수 있지만, 그랜트 버지는 바로 이 부분을 잘 다루며 산도와 타닌이 높은 쉬라즈와 무르베드르를 써서 간이 잘 맞는 와인을 완성한다.
와인은 어두운 루비색을 띤다. 검은 체리, 라즈베리, 자두, 클로브, 스윗 스파이스 등 복합적인 향을 느낄 수 있다. 잔을 흔들면, 꿀, 누가, 감초, 오렌지 필 등 시시각각 변하는 향을 느낄 수 있다. 맛을 보면, 신선하고 생기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중간 바디에 즙이 풍부하고 검은 과실과 흙 내음이 가득하다. 훌륭한 타닌과 구조를 지녀 그냥 와인만 마셔도 좋고, 음식에 곁들이기에 참 좋은 와인이다.
카트눅 프로디지 쉬라즈 Katnook Prodigy Shiraz
카트눅은 1867년 남호주 쿠나와라(Coonawarra) 중심부에 설립된 와이너리다. 카트눅은 호주 명품 와인 분류인 랭턴 분류(Langton's Classification)에 2종 와인이 이름을 올렸고, 호주에서 가장 명예로운 지미 왓슨 트로피(Jimmy Watson Trophy)를 2번이나 수상했고, 제임스 할리데이(James Halliday)가 최고 등급 5 레드 스타를 주는 와이너리다.
카트눅 프로디지(Prodigy)는 카베르네 소비뇽 명산지로 꼽히는 호주 쿠나와라에서 농사가 잘 된 해에만 생산하는 한정판 쉬라즈다. 테라로사는 투과성이 좋고, 배수와 공기 순환이 잘 되는 데다 다량의 철분을 함유하고 있어 포도나무가 자연스레 균형을 잡으며 자랄 수 있다. 게다가 서늘한 해양성기후에 강렬한 햇빛을 지녀 진한 색, 다양한 과실 향, 무엇보다 미세한 타닌을 지닌 맛있는 와인이 생산된다.
와인은 진한 자주색을 띤다. 자두, 라즈베리, 스파이스, 바닐라 향을 느낄 수 있으며, 맛을 보면, 풍성한 자두, 붉은 열매, 완벽하게 녹은 오크 풍미를 즐길 수 있다. 탁월한 구조와 타닌, 긴 여운이 몹시 매력적인 와인이다. 20년 이상 장기 숙성 가능한 명품 와인이다. 고기를 굽는 날에 곁들이면 좋다. 이 와인은 국제 와인 품평회(International Wine Competition, IWC) 2020에서 90범으로 은상, 제임스 할리데이 와인 컴패니언 2021년에서 95점을 받았다.
하디스 HRB 쉬라즈 Hardys HRB Shiraz
하디스는 1853년 토마스 하디(Thomas Hardy)가 남호주에 설립한 와이너리로 호주를 대표하는 와이너리 중 하나다. 여러 제품군을 생산하는데 그중 HRB는 헤리티지 리저브 빈(Heritage Reserve Bin)의 줄임말로 1940~1980년대 인기를 누린 하디 리저브 빈(Hardys Reserve Bin)에 영감을 받아 2006년 쉬라즈와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으로 출시한 와인이다.
하디스는 설립 초기 포도 품종의 지역 간 블렌딩 와인으로 크게 성공했다. 과거 하디스 리저브 빈은 해마다 품종별로 가장 좋은 포도밭 포도를 남겨 빚은 하디스 최초 최고급 와인을 의미한다. 이를 계승해 만든 HRB는 오랜 세월 호주에서 품종별 제일 맛있는 지역을 골라 와인을 빚었던 하디스의 노하우가 빛을 내는 와인이라 볼 수 있다.
하디스 HRB 쉬라즈는 맥라렌 베일(McLaren Vale), 피레니스(Pyrenees), 클레어 밸리(Clare Valley)에서 자란 포도를 블렌딩했다. 와인은 중간 루비색을 띤다. 클레어 밸리와 피레니스에서 자란 쉬라즈는 뚜렷한 민트와 유칼립투스, 맥라렌 베일에서는 초콜릿과 블랙베리 향을 낸다. 그 외 잘 익은 자두, 포푸리, 바이올렛 향을 느낄 수 있다. 맛을 보면, 민트, 붉은 열매, 후추 풍미가 잘 녹아 있다. 감칠맛이 좋아 음식과 즐기기 좋다.
이 가을 와인에 더욱더 푹 빠져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라며. 모두의 안녕을 위해. Che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