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11.01 10:12

와인은 오감의 술이다. 매혹적인 검은 자줏빛을 띤 색깔. 잘 익은 과일과 향기로운 꽃, 살며시 스파이시한 향. 가볍게 잔을 부딪힐 때 들려오는 경쾌한 소리. 손가락에 느껴지는 매끈한 감촉.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좋은 과실의 달콤함과 상큼함. 와인처럼 이렇게 인간의 모든 감각을 한 번에 자극하고 만족감을 주는 술은 쉽게 찾기 힘들다.

그래서 와인은 와인 잔(wine glass)에 마셔야 한다. 투명한 와인 잔을 통해 매력적인 와인의 빛깔이 보여야 하고, 살짝 굴곡진 잔에 잘 모아진 향이 코 안으로 한 번에 강하게 들어와야 한다. 가볍게 잔을 부딪힐 때는 둔탁한 소리가 아닌 가볍게 빛나는 소리가 나야 기분이 좋다. 매끈한 잔을 잡고 살짝만 돌려도 와인이 춤을 춰 더욱 생기가 돌아야 한다. 잔을 따라 입 안으로 들어온 와인은 혀에서부터 좋은 감촉을 주고 온 입 안을 흐르며 충분한 맛의 향연을 펼쳐야 한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와인잔 종류/ 사진출처=리델(Riedel)

이렇게 오감을 충족시킬 수 있는 와인 잔은 굳이 비쌀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리 와인 잔1, 얇은 손잡이(stem)가 바닥(base 혹은 foot)과 와인을 담는 부분(bowl)을 연결한 잔이면 된다. 아니, 손잡이가 없이 유리 물잔처럼 생긴 와인 잔(stemless)도 괜찮다. 그런 모양에서도 충분한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는 잔은 많다. 물론 유명한 브랜드에서 나오는, 유리 장인이 직접 입으로 불어 만든 고급 와인 잔도 의미는 있다. 사실 유명한 잔은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하고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와인 잔에도 종류가 있고 와인의 종류에 따라서 더욱 알맞은 잔이 있다는 것이다. 어려운 종류는 아니다. 큰 잔, 작은 잔, 길쭉한 잔, 넓적한 잔, 그런 종류들이다.

와인 잔은 왜 다양한 모양으로 만든 것일까? 와인 잔을 사고 싶은데 어떤 크기의 잔을 사야 할까? 과연 잔에 따라 와인의 맛이 달라지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꼭 알아야 하는 8가지 종류의 와인 잔에 대해서 소개한다.

화이트용 와인 잔의 종류. (왼쪽부터) 작고 긴 모양의 잔 W1), 보다 크고 넓적한 잔(W2)/ 사진출처=리델(Riedel)

(1)화이트 와인 잔

어떤 잔을 선택할까? 여기에 공통적이고 기본적인 법칙이 있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향을 지닌 와인은 무조건 큰 잔에 마시자'. 와인 잔의 볼이 넓을수록 더욱 많은 향을 담을 수 있다. 잔이 크면 와인을 따른 뒤에도 빈 공간이 넉넉하니 향이 담기는 부분 또한 더 크다. 오랫동안 와인이 변화하는 모습을 느끼기에도 좋다.

하지만 과실이나 꽃 위주의 향을 지닌 와인은 보다 작은 크기의 잔이 적합하다. 작은 잔에 와인을 따르면 빈 공간이 더 적고 향을 맡을 때 코와 더 가까워진다. 이러면 상쾌한 과일과 꽃 향들이 더욱 잘 느껴지고 화이트 와인의 미덕인 산도를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쉽게 접하는 크리스피하고 상큼한 화이트 와인들, 예를 들어 오크 숙성을 하지 않은 샤르도네 또는 소비뇽 블랑이나 리슬링 품종으로 만든 와인들은 길고 작은 크기(W1)의 화이트 와인 잔에 마셔야 더욱 제대로 된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잔은 로제 와인을 마시기에도 좋다. 하지만 보다 복합적인 향을 지닌 화이트 와인, 예를 들어 오크 숙성한 샤르도네나, 올빈 화이트 와인은 커다란 크기(W2)의 넓은 화이트 와인 잔에 마셔야 와인의 모든 향들을 잘 느낄 수 있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내추럴 화이트 와인이나 오렌지 와인 등도 복합적인 향이 가장 큰 매력이므로 커다란 잔을 이용하기를 추천한다.

- W1잔을 위한 와인: 모스카토, 소비뇽 블랑, 피노 그리지오, 슈냉 블랑, 리슬링, 로제 등
- W2잔을 위한 와인: 오크 숙성 샤르도네, 론 화이트, 내추럴 화이트 등


레드 와인용 잔의 종류. (왼쪽부터) 길고 커다란 와인 잔(R1), 중간에 가장 뚱뚱한 와인 잔(R2), 볼이 넓으면서 입구가 좁은 와인 잔(R3)/ 사진출처=리델(Riedel)

(2) 레드 와인 잔

레드 와인 잔도 원리는 동일하다. 향이 아름다운 레드 와인은 무조건 큰 잔에 마셔야 한다. 예를 들어 피노 누아 같은 품종은 매력적인 향이 일품이다. 특히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생산되는 피노 누아 와인은 황홀하면서도 복합적인 베리와 장미 향 등이 매력 포인트이기 때문에 이러한 와인은 무조건 큰 잔에 마셔야 한다. 위 그림에서 중간에 있는 잔(R2)처럼 볼 부분이 넓은 모양의 잔이 가장 적합하다. 그래서 이러한 모양의 잔을 아예 ‘버건디(burgundy) 잔2’ 이라 하기도 한다. 물론 피노 누아만을 위한 잔은 아니며 네비올로나 꽃 향기가 좋은 가메이 품종에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보르도 와인, 혹은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은 보다 강한 타닌과 높은 알코올을 포함하면서도 매력적인 검은 과일 향이 특징이다. 이런 와인은 볼의 크기가 크면서도 너무 뚱뚱하지 않은 모양의 잔이 좋다. 위 그림의 첫 번째 잔(R1) 모양이며 ‘보르도(bordeaux)’ 잔이라고도 부른다.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와인 잔의 모양인데, 특히 이런 진한 품종을 선호하는 국내 소비자들이 많기 때문에 와인 잔 증정 행사 등에서도 가장 널리 사용된다. 잔이 너무 뚱뚱하지 않아서 높은 알코올은 덜 느껴질 수 있지만 림(rim, 와인 잔 가장 윗부분)이 제법 넓어 진한 타닌이 보다 부드럽게 느껴지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시라처럼 스파이시한 특징이 있거나 미디엄 바디의 와인은 볼이 넓으면서 입구가 좁은 와인 잔(R3)을 이용하면 좋다. 입구가 좁아 한 번에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와인이 혀에 닿기 때문에 스파이시한 느낌을 순화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모양의 잔은 일반적인 화이트 와인 잔(W1)과 레드 와인 잔(R1)의 중간 정도 크기다.

- R1잔을 위한 와인: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보르도 블렌드 등
- R2잔을 위한 와인: 피노 누아, 네비올로, 가메이 등
- R3잔을 위한 와인: 시라, 산지오베제, 발폴리첼라, 템프라니요, 쁘띠 시라 등

(왼쪽부터) 얇고 긴 모양의 스파클링 잔(S1), 약간 볼의 크기가 있는 스파클링 잔(S2), 디저트 와인용 잔(D)/ 사진출처=리델(Riedel)

그 외의 잔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스파클링 와인, 혹은 샴페인을 마실 때는 얇고 긴 모양의 잔(S1)을 이용하자. 일단 잔이 얇고 길면 거품이 올라오는 모양을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잔이 작으면 작을수록 향을 담을 수 있는 공간 또한 작아서 향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슬픈 단점도 있다. 그래서 같은 스파클링 와인 잔이라도 가장 얇은 플루트 잔부터 윗부분이 살짝 통통한 튤립 잔 등 약간의 모양 차이가 있다. 숙성된 샴페인이나 고급 샴페인처럼 향부터 존재감을 보여주는 스파클링 와인은 볼 크기가 약간 큰 스파클링 잔(S2) 또는 화이트 잔(W2)이 좋다. 이러한 샴페인은 기포를 포기하더라도 황홀한 향을 제대로 느끼는 것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디저트 와인을 위한 잔이 있다. 일반적으로 디저트 와인은 식사를 마무리하면서 한 잔 가량 마시는 와인으로 맛이 달콤하고 알코올 도수가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디저트 와인 잔은 가장 크기가 작은 잔(D)이다. 물론 셰리, 귀부 와인, 포트 등 디저트 와인의 종류에 따라 모양에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인 와인 잔에 비해서는 항상 작다.

- S1, S2잔을 위한 와인: 스파클링과 샴페인
- D잔을 위한 와인: 포트, 셰리, 마데이라, 귀부 와인 등

그런데 이거 너무 종류가 많은 건 아닌지, 어떤 것부터 사야 할지 질문할 수 있다.

다음은 와린이 시절부터 점차 와인 애호가가 되면서 구입하는 잔의 대략적인 순서다. 물론 특별히 좋아하는 스타일의 와인이 있다면 당연히 그 와인에 맞는 잔을 먼저 살 수도 있다.

- 고기와 함께 먹기 좋은 진한 레드 와인으로 와인을 시작하는 경우에는 일단 보르도 와인 잔(R1)을 먼저 구입해보자.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집에 있어야 하는 와인 잔이다.

- 음식에 따라서는 가벼운 화이트 와인이 어울릴 때가 많다. 레드 와인을 좋아하더라도 가끔씩 화이트 와인을 시도해본다면 또 다른 와인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작은 화이트 와인 잔(W1)이 필요하다. 혹은 달콤한 모스카토 품종으로 와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경우에도 작은 화이트 와인 잔(W1)이 가장 적절하다.

- 자, 이제 여기서부터 취향이 나뉘기 시작한다.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의 매력을 알기 시작했다면 와인 라이프가 제법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보다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버건디 잔(R2)을 구입해보자. 숙성된 화이트 와인을 위한 큰 화이트 잔(W2)을 원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런 와인 또한 버건디 잔(R2)으로 즐기기에 무리가 없다. 뚱뚱한 잔이 있다면 향이 풍부한 와인들의 매력을 더욱 제대로 즐길 수 있다.

- 더운 여름 날, 혹은 와인 모임의 첫 와인으로 시원한 스파클링이나 샴페인이 생각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스파클링 잔(S1)이 필요하다. 뽀글뽀글 올라오는 기포를 구경하기에는 이만한 잔이 없다. 하지만 숙성된 까바나 샴페인을 자주 즐긴다면 스파클링 잔(S1)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스파클링 잔(S2) 또는 (W2)를 구비하는 것도 좋다. (S2)은 스파클링 외에도 화이트 와인이나 미디엄 바디의 레드를 마시기에도 유용하다.

- 이 정도가 되면 이제 집에 와인 잔들(그리고 와인들)이 제법 많이 모였을 것이다. 이제 조금 다른 시도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까지 진한 와인들을 주로 일반적인 보르도 와인 잔(R1)에 마셨다면 시라 같은 스파이시한 와인은 좀 더 작은 크기의 레드 와인 잔(R3)에 시도해보자. 산지오베제나 말벡을 마시기에도 좋은 잔이다. 로제 와인 또한 작은 화이트 와인 잔(W1)에 마셔도 괜찮지만, 앞서 언급한 작은 크기의 레드 와인 잔(R3)에 마시면 또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 이 정도 내공이 쌓인 그대, 잠들기 전 포트나 셰리 한 잔을 홀짝이는 기쁨을 모를 수 없다. 디저트 와인 잔(D)까지 갖춘다면 이제 거의 모든 종류의 와인 잔을 섭렵한 것이다. 그리고 이쯤 되면 일반적인 잔과 좋은 잔의 차이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고, 선호하는 와인 잔 브랜드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잡설

사실 와인 잔의 종류는 위에서 언급한 8종류보다 훨씬 많다. 심지어 몇몇 와인 잔 브랜드에서는 포도 품종별로 와인 잔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같은 종류에 속하는 와인 잔이라도 세부적인 모양이 제법 다른 경우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디테일이 아닌 전체적인 모양, 그리고 와인을 담는 볼의 크기이다. 참고로 와인 잔에 그림이 그려져 있거나 유리 세공이 된 와인 잔은 무시하자. 물 잔 혹은 장식용으로 쓰는 것이 좋겠다.

와인 잔 공부에 빠진 시절, 여러 브랜드에서 나온 다양한 가격대의 와인 잔들을 개인적으로 ‘하나씩’ 구입해 비교하면서 마시곤 했다. 이렇게 마시면 미세한 모양과 브랜드별 차이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신중하게 비교하더라도 디테일은 살짝 도울 뿐, 와인 잔의 크기와 모양이 훨씬 우선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가격대가 높아질수록 스템과 와인 잔의 두께, 특히 입에 닿는 림의 두께가 더 얇아지는데 이러한 요소도 와인의 향과 맛에 제법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일단 위에서 소개한 8종류 와인 잔의 차이를 느껴본 뒤, 더욱 관심이 생긴다면 다양한 가격대의 와인 잔에 관심을 기울여보자.

그리고 앞서 와인 잔들을 ‘하나씩’ 구입했다고 했는데 이는 결코 잘한 선택이 아니었다. 곧 후회하게 되었다. 당시는 와인이 함께 마시는 술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와인 잔은 적어도 2개 세트로, 혹은 마음에 드는 잔은 여러 개를 구입하자.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같은 와인을 마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같은 모양의 잔에 담긴 같은 빛깔의 액체를 보며, 그리고 건배할 때 같은 소리를 들으며, 같은 향과 맛을 느끼며 마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렇게 와인은 당신과 옆에 있는 사람의 오감은 물론 마음까지 부드럽게 적시며 녹일 것이다.

[1] 엄밀히 말하면 유리잔은 아니고 여러 가지 광물이 포함된 크리스털 잔이다. 일반 유리잔보다 내구성이 높아 무척 얇게 가공할 수 있고 빛을 굴절시켜서 반짝이기도 한다.
[2] 버건디(burgundy)는 프랑스어 부르고뉴(Bourgogne)의 영어식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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