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라벨을 보면, 포도가 수확된 연도를 표시한 숫자를 볼 수 있다. 와인 세계에서는 이를 빈티지(Vintage)라고 부른다. 흔히 오래된 와인 애호가들은 농사가 잘 된 해는 ‘위대한’, 평균적이면 ‘클래식한’, 힘든 해는 ‘망했다’는 의미로 ‘망빈’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빈티지에는 조금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와인 입문자가 알면 좋은 빈티지 이야기와 좋은 빈티지 호주 와인도 만나보자.
훌륭한 빈티지를 위한 중요한 기준
이제 막 와인 세계에 입문한 사람은 빈티지에 관한 이야기가 다소 까다롭게 느껴지지만 사실 빈티지 자체는 간단하다. 빈티지란, 포도를 수확한 해를 말한다. 그렇다면, 매년 포도를 수확하는데, 이걸 도대체 왜 따지는 걸까? 그 이유는 포도 품종마다 이상적인 재배 조건이 다르고 해마다 날씨와 기후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특정 포도 품종을 가장 완벽하게 익혀서 수확하려면 그에 딱 맞는 날씨와 기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시라는 건조하고 맑은 날씨가 필요하지만, 소비뇽 블랑은 시원하고 습기가 살짝 있는 기후에서 더 좋은 맛을 낸다. 따라서, 와인과 관련된 모든 사람은 그 해가 특정 포도 품종에 이상적인 날씨와 기후를 지녀 고품질 포도를 얻었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보르도에서 활동한 유명 양조학자이자 컨설턴트인 드니 뒤보르디외(Denis Dubourdieu)는 훌륭한 빈티지라고 판단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포도나무가 일찍 꽃 피우고, 포도나무가 적절하게 자라도록 수분 스트레스를 겪으며, 잎과 줄기 같은 다른 부분보다 성장이 포도알에 집중되어, 완벽하게 익은 포도알을 얻은 해를 훌륭한 빈티지라고 판단한다.
자연이 포도를 익히면 이제부터는 와인 양조가의 몫이 된다. 와인 양조가는 훌륭한 빈티지엔 잘 익은 포도로 완벽한 와인을 빚고, 나쁜 빈티지엔 그동안 쌓은 노하우를 총동원해 평균에 근접하는 와인을 빚을 수 있도록 영혼을 갈아 넣기도 한다. 따라서, 정말 좋은 빈티지에 노련한 솜씨를 지닌 와인 양조가가 와인을 빚었다는 건 환상적인 와인이 되었다는 걸, 나쁜 빈티지엔 더더욱 와인 양조가 실력이 와인에 그대로 드러나는 걸 볼 수 있다.
새롭게 소개되는 좋은 빈티지 호주 와인들
보통 호주나 미국 같은 신대륙은 유럽에 비해 일정한 날씨와 기후를 지녀 빈티지 차이가 적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럽과 다른 요소들이 빈티지에 영향을 많이 주며, 고급 와인을 선택할수록 신대륙 와인 빈티지를 살피는 일은 중요하다. 이제 막 소개되기 시작하는 좋은 빈티지 호주 와인들은 다음과 같다.
하우스 오브 아라스 이제이 카 레이트 디스골지드 2006
House of Arras E.J Carr Late Disgorged 2006
디캔터 97점, 리얼 리뷰 97점, 제임스 서클링 96점
하우스 오브 아라스는 2020년 샴페인 포함 전 세계 스파클링 와인 평가에서 이제이 카 레이트 디스골지드 와인 2004년산 와인으로 디캔터 최고 스파클링 와인 상을 받았다. 당연히 2004년 와인은 모두 팔려 나갔고, 2005년산 와인부터 한국에 수입되기 시작해 지금 2006년산 빈티지 와인이 전 세계에 출시된다. 아라스의 수석 와인 메이커 에드 카는 비(非) 샴페인 생산자 중 유일하게 평생 공로상을 받은 인물로 매우 오래 효모 찌꺼기와 접촉한 뒤 병입한 와인에 본인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그가 이끄는 하우스 오브 아라스는 지금까지 96개 트로피와 242개 이상 금상을 받았다.
보통 스파클링 와인은 기본급의 경우 12개월 효모 찌꺼기와 숙성한 뒤 출시한다. 하지만, 대부분 12개월보다 훨씬 긴 시간 숙성하고, 특히 빈티지를 표시하는 스파클링 와인은 최소 36개월만 숙성하면 되지만, 더더욱 오래 효모 찌꺼기와 함께 숙성한다. 그 이유는 숙성하는 동안 효모 찌꺼기가 저절로 분해되면서 와인에 복합적인 풍미, 바디, 질감을 좋게 만들며, 동시에 신선함을 주기 때문이다.
에드 카는 레이트 디스골지드 와인을 와이너리 설립 3년 후인 1998년부터 출시했고 2006년산은 9번째 작품이다. 샤르도네 67%, 피노 누아 33%가 블렌딩 됐고, 무려 14년간 효모 찌꺼기와 숙성했고, 도자주는 2.6g/L다. 영롱한 금색에 살짝 연둣빛이 스친다. 섬세하고 지속적인 기포와 거품을 지녔다. 바닷냄새, 자몽, 버터 쿠키, 밀랍 등 복합적인 향을 지닌다. 맛을 보면, 레몬커드, 요구르트, 버터 쿠키, 살짝 수풀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전체적으로 몹시 정교하고 태즈메이니아 스파클링 와인이 주는 독특한 바닷냄새를 잘 담고 있다.
하우스 오브 아라스 그랑 빈티지 2013
House of Arras Grand Vintage 2013
디캔터 93점, 제임스 서클링 96점, 리얼 리뷰 95점
아라스는 호주에서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스파클링 와인 브랜드다. 수석 와인 메이커인 에드 카(Ed Carr)는 1988년 호주 최고의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태즈메이니아 테루아를 심층 분석하여 1995년부터 아라스라는 이름의 스파클링 와인을 세상에 선보이고 있다. 아라스(Arras)는 풍부한 태피스트리(Rich Tapestry)라는 의미로 스파클링 와인을 빚는 정교한 과정을 비유하고 있다.
보통 스파클링 와인은 여러 빈티지 와인을 섞어서 만든다. 하지만, 포도 농사가 잘 된 해엔 그해에 수확한 포도로만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어 빈티지를 표시해 출시한다. 완벽하게 익은 포도를 얻는 일은 그리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어서 드물게 만들기 때문에 그랑 빈티지 2013은 아라스의 15번째 빈티지 스파클링 와인이다. 보통 이런 경우 더 오래 효모 찌꺼기와 숙성해 포도가 지닌 모든 잠재된 매력을 와인에 옮겨 담는다.
아라스 그랑 빈티지 2013년은 샤르도네 62%, 피노 누아 38%가 블렌딩 됐다. 완벽한 포도를 손으로 수확한 뒤 부드럽게 압착해 첫 즙만 쓰며, 10%는 중고 오크 통에서 발효하고 이후 100% 젖산 발효를 시행했다. 도자주는 2.7g/L다. 영롱한 금색을 띠며, 섬세하고 지속적인 기포를 보인다. 나는 듯한 열대과실, 흰 꽃, 레몬, 리치, 잘 마른 굴 껍데기 향을 느낄 수 있다. 맛을 보면, 갓 구운 빵, 사워도우, 야생 버섯, 레몬커드 풍미를 느낄 수 있으며 흠잡을 곳 없이 입안 곳곳을 자랑한다. 무려 7년 동안 효모 찌꺼기와 숙성해 깊이와 복합성이 대단하다. 와인 평론가인 후온 후크(Huon Hooke)는 아라스 그랑 빈티지가 지닌 태즈메이니아의 서늘한 기후 표현력, 7년 동안의 숙성에서 얻은 탁월한 신선함, 효모, 스파이스 메링게 풍미와 앞으로 아름답게 발전할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토마스 하디 카베르네 소비뇽 2017
Thomas Hardy Cabernet Sauvignon 2017
디캔터 92점, 앤드류 카이야드 MW 98점, 제임스 서클링 95점, 제임스 할리데이 96점, 와인 프론트 93점, 잰시스 로빈슨 MW 16.5+/20
하디스는 1853년 토마스 하디가 남호주에 설립한 와이너리다. 하디스는 호주 제1 와인 브랜드이자, 영국에서 인지도 1위 호주 와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하디스가 전 세계에서 받은 각종 상은 9천 개가 넘는다. 설립자인 토마스 하디는 불확실의 시대 확실하게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와인을 만들고자 했다. 포도 농사가 해마다 들쭉날쭉하니 생각을 바꿔 호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같은 품종 중 제일 농사가 잘 된 포도만 골라 맛있는 와인을 빚었다. 이런 블렌딩은 토마스 하디 이전엔 존재하지 않았기에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그는 남호주 와인 산업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
토마스 하디 카베르네 소비뇽은 설립자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랐다. 포도는 쿠나와라와 마가렛 리버에서 얻었다. 2017년은 가뭄이 늘 문제가 되는 호주에서 겨울과 봄 적정한 강우량을 지녀 포도는 거의 완벽하게 성장했다. 잎 관리를 철저하게 하며 평소보다 2주 정도 늦게 수확해 색과 향이 뛰어난 와인을 만들 수 있었다.
하디스의 최고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최고 빈티지에만 만든다. 와인 메이커인 나이젤 스네이드 MW(Nigel Sneyd MW)에 따르면, 2017년에는 쿠나와라 포도를 조금 더 많이 사용했다. 쿠나와라 카베르네 소비뇽은 와인에 잘 익은 카시스 풍미에 구조와 힘을, 마가렛 리버는 붉은 과실 향을 향수처럼 풍기며 가늘고 섬세한 구조를 준다. 와인 양조 과정은 인간의 간섭을 크게 줄여 진행했고, 껍질과 오래 접촉해 집중된 타닌을 얻고, 오크는 중고 오크를 써서 뒤로 물러난 듯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최소 20년 이상 숙성 가능하다고 한다.
그랜트 버지 홀리 트리니티 바로사 GSM 2019
Grant Burge Holy Trinity Barossa GSM 2019
디캔터 92점, 앤드류 카이야드 MW 95점, 제임스 서클링 93점, 리얼 리뷰 93점, 국제 와인 품평회 91점(은상)
그랜트 버지는 1988년 바로사 밸리 심장부에 설립된 와이너리다. 하지만, 버지 가문은 이전부터 바로사에 터전을 잡고 농사를 지어왔기에 그 누구보다 바로사 밸리 구석구석 테루아와 적합한 품종을 잘 알고 있다. 바로사 밸리라고 하면 쉬라즈 품종을 떠올리지만, 프랑스에서 필록세라가 퍼지기 전 옮겨 심은 그르나슈 포도도 유명하다. 그랜트 버지는 특히 그르나슈를 이해하고 와인을 빚는데 탁월한 전문가다. 그런 그랜트 버지에서 그르나슈, 시라, 무르베드르 품종이 섞인 와인을 만들었는데 이를 홀리 트리니티라고 부른다.
홀리 트리니티는 바로사 와인 애호가를 위한 원 픽(One Pick)와인이다. 수석 와인 메이커인 크레이그 스탠스보루에 따르면, 홀리 트리니티는 매년 출시할 때마다 복합성, 깊이, 정교함, 마시기 쉬운 접근성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실제 이 와인을 맛보면, 한식 및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 스파이스와 과실 풍미, 섬세한 감칠맛을 지니고 있어 재구매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 선보이는 2019년은 최근 농사 중 가장 건조한 해였다. 호주에서는 겨울에 내리는 비가 중요한데 평균보다 적은 비가 내렸고, 이는 봄, 여름까지 쭉 이어졌다. 따라서, 포도알 크기가 작아 매우 집중된 풍미를 지닌 와인이 완성됐다. 와인은 보랏빛이 감도는 진한 루비색을 띤다. 향수처럼 전해지는 꽃, 레몬 머틀 차, 금방 썬 생강 향을 낸다. 우아하고 복합적이며 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는데, 스윗 스파이스, 피자두, 화이트 초콜릿, 넛맥 풍미가 좋다. 타닌은 부드럽게 입안을 감싼다. 기름기, 감칠맛, 짭짤함이 좋은 오리 콩피, 퐁당 쇼콜라와의 페어링이 추천된다.
그랜트 버지 필셀 바로사 올드바인 쉬라즈 2019
Grant Burge Filsell Barossa Old Vine Shiraz 2019
디캔터 90점, 리얼 리뷰 95점, 앤드류 카이야드 MW 94점, 국제 와인 품평회 93점, 제임스 서클링 91점, 와인 프론트 90점
그랜트 버지가 소유하고 있는 필셀 포도밭에는 1920년에 심은 쉬라즈가 여전히 포도를 생산하고 있다. 필셀 포도밭 고목 열매로 필셀 바로사 올드바인 쉬라즈도 만들고, 일부는 아이콘 와인인 미샥에도 쓴다. 필셀은 바로사 최상급 포도밭 중 하나로 믿기 힘들 정도로 농축된 풍미와 강도를 지니는 와인이 생산된다.
필셀 올드바인 쉬라즈는 포도 농사에 따라 와인 양조를 조금씩 바꾸어 진행한다. 2019년산 와인은 스테인리스 스틸 발효조와 열린 콘크리트 발효조에서 알코올 발효를 진행한다. 이후 부드럽게 바스켓 프레스와 공기압착기로 즙을 얻어 프랑스 및 미국산 혹스헤드(225~300L)와 펀천(450~500L)에서 숙성한다.
와인은 잉크처럼 진한 보라색을 띤다. 다크 초콜릿, 모카, 자두, 캐러멜, 스윗 스파이스, 카카오 닙 향을 지닌다. 맛을 보면, 감초, 블랙 스파이스, 주니퍼 풍미가 나며,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타닌을 느낄 수 있다. 진한 만큼 긴 여운이 인상적인 와인이다. 2019년 산은 2026년~2036년을 시음 절정기로 본다. 필레미뇽이나 비프 웰링턴에 페어링할 수 있다.
우리가 와인을 살 때, 참고하는 부분은 참 다양하고 사람마다 챙겨보는 부분도 다르다. 하지만, 공통으로 살피는 게 있다면, 빈티지가 아닐까? 본 글에 소개된 빈티지에 기념할 만한 일이 있었다면, 그 순간을 와인과 함께 마음에 담아 보길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