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교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시더라고요.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서 손자 손녀도 못 알아보시지만, 어디를 가시든 누구를 만나든 묻지도 않는데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답니다. 뭐냐면 “우리 아들이 고려대 교수예요. 고려대 교수라고요.”라고 하신답니다. 그 말에는 자식으로 인한 기쁨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한과 설움, 그리고 고통의 역사가 다 들어있다며 울먹이셨지요.
이처럼 살아오면서 풀지 못하고 억누른 감정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치매에 걸려서까지도 자신을 알아달라고 몸부림을 치는데, 왜냐하면 뇌 기능이 많이 손상된 치매 환자라도 감정을 관장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덜 손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례도 있어요. 요양원에 계시는 어느 치매 어르신은 낮에는 괜찮으신데 저녁이 되면 옆 침대에 누워계신 어르신을 사납게 끌어내린답니다. 그 이유는 옆에 누워있는 어르신이 직장에서 남편을 꼬신 여자인데, 남편이 와서 보면 얼마나 좋아하겠냐며 자신이 그 꼴을 어떻게 볼 수 있겠냐고 하신답니다.
이런 걸 보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라는 속담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데, 얼핏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속담 같지만 앞서 소개한 치매 어르신들의 사례에서처럼 억누른 감정의 힘이 얼마나 센지 또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물론 치매 환자가 아닐지라도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좋지 않은데, 왜냐하면 감정의 특성상 감정을 억압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하지요. 몸이 아프다고 병원을 찾아왔고 그래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그동안 마음속에 억눌러 두었던 감정들을 풀어 놓으면 신기하게도 몸이 회복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감정은 ‘내 마음은 이래요.’하고 자신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원래 감정이란 에너지이기 때문에, 마음을 표현해서 감정 에너지를 빼내 주면 그 감정이 어떤 것이든 점점 줄어들고 또 사그라지지만 무조건 억누르거나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치매로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억눌러둔 감정들까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기억해야겠습니다. 요즘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 우리 시니어들이 무척 애를 쓰고 있지요. 이를테면 운동도 열심히 하고 식습관에도 신경을 쓰고 인지 활동에도 관심을 둡니다.
저는 그런 것들과 더불어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는 감정들을 풀어낸다면 설령 치매가 온다 할지라도 그런 억눌린 감정들로 인해 생기는 가슴 아픈 행동들은 많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런 것을 치매 중에서 ‘예쁜 치매’라고 하는 겁니다.
-'신중년 신노년의 마음공부' 저자 강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