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11.15 09:39 | 수정 : 2021.11.15 09:42

가끔, 나이를 느낄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고개며 허리를 뒤로 옆으로 젖히고 움직인다. 혼자 있을 때, 더 움직거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움직일 때 들리는 두둑 소리. 자주 들리는 소리는 불편할수록 크게 들렸다. 대부분 한 동작을 오래 할수록, ‘꽤나 같은 걸 많이 해왔구나’ 하고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루 더 지날 때마다 더 크게 들리는 듯하다.

나는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는 모양이다. 아니 당연히 내야 하는가 보다. 어쩌면, 누구라도 움직이는 소리를 내고, 그것을 듣고, ‘내 소리다’며,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는 것 같다. 나 여기 있네. 내가 있네. 나만이 내는 소리네. 나를 보아주게. 내 움직임이 곧 내 소리요, 마음이니 들어주게. 그럴 것 같다, 나를 좋게, 기분 좋게 만들도록 움직이는 일,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뭐, 살아있다는 즐거움 아닌가.

문제는 내 소리를 계속 내는 데 지쳤을 때다. 내 소리에 지쳐 움직이지 못할 때다. 스스로 무엇인가는 되풀이해야 하는데, 제 발목 잡고 싫증을 내는 것이 큰 문제다. 같은 일을 또 하고, 또 하는 것. 삶이란 이러한 뻔한 것의 또한 되풀인 것을, 그 되풀이를 알며 괜히 싫어지게 될 때다. 이럴 땐, 내 세상인지 네 세상 것인지 잘 구분이 안 된다. 가히 내 한계, 내 울타리를 느낄 때라 할 수 있을 것. 내 울타리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사진제공=김봉길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누구나 만들고 또 허물어트리는 자신만의 울타리. 그렇게 시간이 흐를 때마다 만들어지는 울타리다. 그 한계 안에 갇혀, 무엇이라도 끝까지 헐어 내지 못한 채, 어루만지고 있는 것. 나는 나를 만질 때마다, 그때마다 허물고 싶은가. 그 허물어지는 소리를 내고 들으려 하는가. 그래서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소리 내기를 실패할 때마다, 나는 내 울타리를 나도 모르게 높이 쌓고, 그 안에서 웃고 울고 했던 모양.

그랬다. 물론, 내 울타리를 만들지 않는 일이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땐, 울타리를 느끼거나 또 보이더라도, 자연의 한 모습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견디기 힘들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계속 다른 즐거움, 다르게 만지려는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며 말이다. 딴엔, 고개를 다르게 움직여 다른 소리 내며, 그 소리로 내 울타리를 두드리기도 한다. 허, 참 욕심도 많다. 또 그 울타리 부서지는 소리가 어떻게 나는지도 다르게 확인하고 싶어하다니.

최근,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내 소리가 더 답답하지 않은 시간 그 어느 즈음, 그 소리들을 손 위에 두고 이리저리 보기도 한다. 이유야, 움직일 때마다 그 소리는 끊임없이 들어야 하고, 그 소리를 들으며 ‘이내 인생길’을 가야 하는 터일 거다. 그 소리가 그저 구름 아래 지나는 바람이라며, 이도 내게 주어진 것이라며 들어야 할 것. 그러니, 소리 날 때마다, 보고, 만지고, 놓아버리고, 그렇게 멀어지는 소리를 바라보아야 하리라는 거다. 오늘도 평범하게 지나가는 하루이길 바라고 바라며.

이제 몸은 가만히 있을 때도 소리를 내기도 한다. 어서 움직여 달라고. 계속 살아있어야 한다는 참 엉뚱함 때문이다. 이즈음이면, 정녕 나는 원치 않은데도, 세상은 참 잘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나도 이 세상의 하나로 움직여져야 한다는 세상 진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내 울타리가 아직 튼튼하게 있기를 바라며, 멍청하게도 확인해 보는 또 그 지금이다.

허, 그것참! 맞는 이것과 틀리는 저것을 가르는 울타리는 있기나 한 것일까? 지금까지 더러는 울타리라면 조금 허물고, 또 억지로 울타리라며 쌓는 일이 이내 일상사들 아닌가. 그래 맞다. 울타리란 나로 인해 생기는 것이니, 그냥 사는 일이 울타리 만드는 것이니, 자연의 하나라며 내버려 둘 일이다. 나도 자연의 부속물이라며 내버려 두듯이. 내 울타리, 그래, 보고 싶은 그 울타리, 바로 내 모습일 터니. 몸에서 무슨 소리가 더 나든 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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