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관계 속에서 기억의 문제로 갈등하기도 하고 또 억울해서 화가 날 때도 있지요. 예를 들어 저녁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는 아들에게 전화하면 “엄마! 오늘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늦는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나는 지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않은 걸 똑똑히 기억하는데, 그 사람은 돌려주었다고 할 때도 있습니다. 나아가 친구들과 함께 예전에 놀러 갔던 일을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가 기억을 하긴 하는데 기억하는 내용이 너무 달라서 황당할 때도 있습니다.
기억의 정확성에 대해 실험을 많이 한 심리학자는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인데, 이 학자의 수많은 실험 결과에 의하면 우리의 기억은 사실 그대로라기보다는 얼마든지 조작되고 또 왜곡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 이해를 돕기 위해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실험을 몇 가지 소개해 볼게요. 첫 번째 실험에서는 신호등이 설치된 건널목을 무심코 지나온 사람들에게 조금 전에 본 교통 신호등이 노란색이었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런 말을 통해 신호등이 노란색일 거라고 암시를 한 것이지요. 암시를 준 것처럼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노란색이었다고 대답을 했는데, 실제 신호등 색깔은 빨간색이었답니다.
이런 실험도 있어요. 텅 빈 거리에서 복면을 한 남자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여주고는 “그 남자의 얼굴에 수염이 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대부분의 실험 참여자들은 영화 속의 남자가 복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염이 있었다고 말을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복면을 했는데, 수염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결국, 이들 실험을 통해 우리는 상대방이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또 내가 그 말을 어떻게 이해했느냐에 따라 기억이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기억은 생각보다 정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보고 싶을 때 다시 꺼내보는 것과는 달리, 우리의 기억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만 기억을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자신이 이해한 것을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인간의 기억은 능동적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기억할 때는 종종 편집과 재구성, 그리고 왜곡 현상까지 일어나게 되는데, 기억이 형성되는 시점에서뿐만 아니라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도 정보의 내용 면에서 얼마든지 변화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억’이라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뇌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에 보거나 들은 것이 보태져서 새롭게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억했던 것을 다시 꺼낼 때도 이 과정이 또 한 번 반복되기 때문에 투입된 정보와 나오는 정보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될 수 있지요.
예를 들면 어떤 강사가 학생들에게 두 대의 차가 살짝 부딪치는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주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제가 지난주에 어떤 사진을 보여주었지요?”라고 하니까 학생들이 황당한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차가 서로 부딪쳐서 유리가 깨졌고 사람도 다쳤어요.’ 하는 식으로 실제로 보았던 것과 전혀 다르게 말을 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기억은 능동적’이라고 한 이유인데요, 지난주에 학생들이 본 사진은 차가 살짝 부딪치는 장면이었지만, 이번 주에 그 기억을 꺼낼 때는 ‘차가 부딪치면 유리도 깨질 수 있고 사람이 다칠 수 있지.’하는 뇌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이 덧붙여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한 가지 더 들어볼게요. 누군가가 술집에서 병을 깨뜨려서 다쳤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다들 술병을 깼다고 생각할 겁니다. 왜냐하면, 전달하는 사람이 술집이라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술집이라고 해서 꼭 술병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술집에서 꽃병을 깰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런 식의 답이 나온 이유는 ‘누군가가 술집에서 병을 깨뜨려서 다쳤다’고 했을 때, ‘병’이라는 불충분한 정보에 내가 가진 기존의 지식(술집에 있는 것은 술병이지)을 보태서 ‘술병’이라고 각색을 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주관식 문제를 내면, 학생들은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말한 적도 없는 황당한 답들을 쓰는 것은 바로 기억이 가진 이런 특성들 때문인데요, 이런 연유로 내가 들은 이야기를 남들에게 전달할 때도 본의 아니게 덧붙여지고 그래서 실제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부풀려질 수 있다는 것 또한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신중년 신노년의 마음공부' 저자 강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