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11.19 13:47

(34회) ‘가성비가 갑’인 말투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아들이 운전하고 지방에 갔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혼잣말인 듯 “아들이 운전을 해줘서 오늘 아빠가 편하게 갔다 왔구나.” 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들이 하는 말 “아빠, 그거예요. 아빠가 이렇게 한 마디 해주시니까 아들이 얼마나 힘이 나요. 이런 말은 돈도 안 들고 그야말로 가성비가 갑이잖아요.”라고 했지요. 아들은 생각지 못한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서 좀 흥분한 거 같았습니다.
 
뒷자리에 앉아있던 저는 속으로 “어머나, 저렇게 좋을까?” 하는 마음이 들면서 맞아, 이왕이면 말투까지 신경 써서 “아들, 오늘 운전해 줘서 고맙다. 아빠가 네 덕분에 편하게 갔다 왔고 우리 아들이 운전하는 걸 보니 대견하구나.”라고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말투 즉 우리의 말하는 태도나 스타일은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상대방의 기분을 크게 좌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새까맣게 탄 프라이팬을 보고 배우자에게 ‘아니, 프라이팬을 이렇게 새까맣게 태우면 어떡해요?’라고 하는 것과 “여보, 프라이팬이 새까맣게 탔네요?” 하고 묻는 것은 내용 면에서는 같지만, ‘말하는 태도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말투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왜냐하면, 첫 번째 문장은 프라이팬을 태운 주체를 ‘너’로 간주해버리고 그 이유를 물으니까, 듣는 상대방은 비난을 받는 기분이 들 겁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나’에게 초점을 두어서 상대방을 탓하기보다는 프라이팬이 탄 이유를 궁금해하는 거잖아요. 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말투가 어떤가에 따라 상대방을 탓하거나 비난하는 뉘앙스를 풍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말을 잘하는 입담이 좋은 사람을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지요. 하지만 관계 속에서는 ‘말을 잘하는 입담’보다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잘 말하는 말투’가 더 필요하고 또 중요합니다.

얼마 전에 서울시 코로나19 심리지원단 단장이신 김현수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는데, 코로나 기간에 아이들이 호소한 어려움은 다름 아닌 부모나 어른들로부터 받은 말, 더 정확히 말하면 말투에 의한 상처였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친구를 만나지 못해서 답답해하거나 학급 또래 활동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면 “친구가 밥 먹여 주냐?”, “친구들과 노닥거릴 시간에 책 한자라도 더 봐라.”, “스마트폰 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지?”라는 식의 말을 반복해서 듣는 것이 아이들 처지에서는 큰 상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 대신 “학교에 가지 못하니까 친구도 못 만나고 속상하지?” 아니면 “심심하고 지겨우니까 자꾸 스마트폰을 찾게 되지. 그런데 산책도 하고 할 수 있는 다른 활동도 좀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식으로 말투만 조금 바꿔도 관계는 훨씬 부드러워지지 않을까요?

우리 속담에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있지요. 다홍치마란 짙은 붉은색의 치마를 말하는 것으로 조선 시대에는 이 치마를 왕족들만 입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왕족이 아닌 여자들은 다홍치마를 일생에서 딱 한 번 입을 수 있었는데, 바로 결혼식 날이었다고 해요. 이렇게 특별한 날에만 입는 다홍치마는 고운 빛깔만큼이나 귀했기 때문에, 값이 같은 치마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면 다홍치마를 사겠다는 말이 나온 겁니다.
 
만약에 똑같은 내용의 선물을 하나는 예쁜 포장지로 싸고 다른 하나는 신문지로 둘둘 말았다면, 사람들은 어떤 걸 고를까요? 아마도 십중팔구 예쁜 포장지로 포장한 선물을 고를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관계 속에서 우리는 말의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어떤 말을 할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어떤 태도와 스타일로 말을 건넬까?’ 하는 말투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식당에 가서 식사하고 계산을 할 때도 사람들은 대개 ‘여기요.’라고 하면서 돈이나 카드를 내미는데, 이때도 ‘잘 먹었습니다.’ 혹은 ‘맛있게 먹었습니다.’라는 말을 덧붙이면 어떨까요? 물론 음식값을 받는 사람도 “맛있게 드셨나요?” 혹은 “우리 식당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말을 건넨다면, 양쪽 모두 기분이 좋아질 겁니다.

가성비란 ‘가격 대비 성능’의 줄임말로 ‘가성비가 갑’이라는 말은 결국 가격 대비 만족도가 최고라는 뜻인데, 아무쪼록 가성비가 갑인 말투 즉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말투를 통해 우리의 인간관계가 더욱 만족스러워지면 좋겠습니다.

-'신중년 신노년의 마음공부' 저자 강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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