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01.10 11:17

94년 대학 졸업을 하고 그해 6월 취업했다. 그동안 취업하기 위해 여러 군데 입사 지원서를 제출했다. 승률은 거의 반타작이었다. 어떤 회사엔 합격을, 어떤 회사엔 불합격이었다. 왜 합격했고 불합격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준은 잘 모르겠다. 아무튼 합격한 회사에 그해 6월 입사를 했다. 간절히 원했던 회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전자업계에선 지명도가 있는 회사였다.

입사 후 본격적인 업무에 앞서 신입사원 연수를 받았다. 그룹 규모의 회사라 그룹 산하 여러 회사 신입사원을 모아 한꺼번에 한 그룹 연수가 3개월여 진행했고, 연수를 마치고 본래 지원했던 회사에서 또 1개월 연수받았다. 몇 개월간의 연수를 마치고 마침내 회사에 처음 출근했다.

TV 드라마에서 종종 대기업에 근무하는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봤다. 깔끔한 복장을 하고 번쩍번쩍한 고층건물에 있는 깨끗한 사무실 책상에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모습이 몹시도 근사해 보였다. 그래서 가끔 대학 졸업 후 언젠가는 저런 회사에 한 번 다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그런 회사에 취직했다.

누군가 얘기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이런 말이 틀렸으면 했는데, 아뿔싸! 그 말이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났다. 3개월 업무 배우는 과정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실무를 하면서 이게 리얼한 회사 생활의 현실이라는 것을 피부로 확 느끼게 되었다.

어느 한 부서의 실수로 발생한 문제는 거의 없다. 갑작스러운 고객의 요청 사항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다 보니 여러 문제점이 노출된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점을 가장 먼저 발견한 직원이 함께 회의를 소집한다. 문제를 제기한 부서의 책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그 문제를 제기한 직원이 문제 해결을 위한 중심에 서게 된다. 문제 해결을 위해 참석한 타 부서 담당자는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회의실 자리만 메꾸고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견을 개진하면 그 일이 자신에게 돌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여기에서 소위 말하는 ‘사일로 현상’이 나타난다. 즉, 그건 너의 일이고 나와는 상관없다면서 서로 벽을 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신입으로 입사해서 1년 정도 회사를 경험한 직원이 회사를 그만둘까 하는 첫 번째 고민에 봉착하게 된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두 번째 고민이 다가온다. 그것은 상사와의 갈등이다. 업무를 어느 정도 파악이 되면서 본인 의지로 어떤 일을 수행하면서다. 몇 주간 밤늦은 시간까지 정성을 들여 만든 보고서를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만들어서 상사에게 제출했는데 상사는 여지없이 칼질한다. 이 부분은 빼고 저 부분은 수정하고 나머지는 보완하라고 하고 보고서를 반려한다. 며칠 동안 고민해서 만든 보고서를 거의 걸레를 만들어 놓고 다시 작성하라고 지시한다. 이 대목에서 또다시 퇴사에 대해 깊게 고민한다. 그러나 이 시기엔 장가도 가고 아기도 생기고 해서 가장의 무게를 느끼기에 참을 인자 세 개를 가슴에 새기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이제 세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첫 번째, 두 번째 위기를 무사히 참고 견뎌내면서 어느 정도 본인 업무에 나름 전문가 얘길 들을 수 있는 수준이 되다 보니 이 회사보다 더 보수가 좋고 근무 환경이 좋은 회사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 시기에 사업을 했던 또래 친구들이 큰 부를 이룬 것을 보고 상대적 열등감도 온다. 그래서 좀 더 큰 꿈을 꾸면서 이직 혹은 사업의 기회를 모색한다. 그러나 역시 현실은 만만치 않은 법.

이직한 친구들, 사업을 한 친구들 여럿 만나다 보면 이직이나 사업도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세 차례 번민의 과정을 참고 견디면서 어느새 한 회사. 한 직장에서 10,000일을 맞이한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이 입사 후 딱 10,000일 되는 날이다.

필자가 과연 한 회사에 이렇게 오래 다니면서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언뜻 생각하기에 잃은 것은 나의 주관적 판단의 결여, 건강. 그 반면에 얻은 것은 가정의 약간의 경제적 안정이라는 것이다. 한 꺼풀 더 들여다보면 나다운 삶을 살지 못했다는 생각이 가장 깊게 와닿는다. 물론 이런 생각으로 한 직장에 10,000일을 다닌 것이 후회스러웠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필자가 이 회사에 다니지 않았으면 과연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도 있기 때문이다.

새해 첫날에 되돌아본 10,000일의 회사 생활에 대한 솔직한 심정은 후배들에게 한 직장에 이렇게 오래 다니느니 차라리 보다 다이나믹한 직장 생활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모든 판단의 기준은 본인 몫이지만 한 직장을 29년째 다녀본 늘 부장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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