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01.14 10:43

아침부터 하늘이 낮게 내려오고 포근했다.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이런 날씨는 딱 눈이 내릴 날씨다. 눈 내릴 거라는 기대감에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 산책을 나섰다. 날씨가 추워지니 둘레길 산책객들도 띄엄띄엄 지나가고 휘늘어진 개나리 나무숲에 숨어 재잘거리던 멧새 떼가 내 발소리에 놀라 후루룩 날아오른다.

‘야! 너희들! 나 본지가 언젠데, 내가 너희한테 해코지 한 일도 없는데, 내 앞에서 쫌! 놀아주면 안 되겠니?’ 멧새 떼 뒤꽁무니에 대고 투덜대는데 눈인지 비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진눈깨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괜히 눈이 올 거라는 지레짐작으로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았으니 빗방울이 거세게 떨어지기 전에 발길을 돌리는 게 상수였다.

커피 한 잔을 타서 앞산이 바라다 보이는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본다. 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에는 검은 우산을 쓴 사람이 묵묵히 산으로 오르고 있다. ‘저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 남자 머리 위로 비인지 눈인지 알 수 없었던 진눈깨비는 사라지고 눈발이 날린다. 남들은 다 돌아간 오솔길을 굳이 걷는 저 남자의 속내가 궁금했다. 궁금함이 꼬리를 물더니 그예 한 남자를 떠 올리고야 말았다.

그해 초겨울, 버스는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생애 마지막 연수를 받기 위해 나는 그 버스에 타고 있었다. 그 무렵, 내 인생 2부가 막을 내리려고 하는 순간 앞이었다. 마지막 연수라는 게, 정년퇴직하고 사회에 나갔을 때 닥쳐올 상황에 대해 받는 교육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생각이 생각을 낳고 있었다. 지나간 직장생활들이 영화 필름처럼 돌아갔다. 그러다 곧 정년퇴직해야 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속이 상했다. ‘아직은 건강한데.... 나 보고 나가라니!’ 중얼대며 한숨을 크게 한 번 내 쉬고 버스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남쪽답게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벌판 풍경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낙엽송들이 분신처럼 매달려있던 단풍잎을 떠나보내고 묵묵히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위, 흐린 하늘이 낮게 내려오고 조금씩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지 하얀 눈이 조금씩 날리고 있었다. 그러다 많지도 적지도 않게 눈이 내리더니 급기야 내 가슴속 깊숙이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그 눈을 따라 걸었다.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수많은 방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긴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방들을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너무 깊숙이 있는 방들이라 있는지도 모르고 스쳐 지나갔을 방들이었다.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하던 날. 하얀 스타킹에 붉은 우단 원피스를 입고 가슴에 하얀 수건을 단 소녀가 엄마를 향해 팔짝팔짝 뛰어가고 있었다. 그 행복함이 도가 지나쳤던 것일까? 그만 운동장으로 나가는 길. 그 당시에는 사월이 입학식이라 새순이 얼굴을 내미는 꽃밭이 주우욱 늘어서 있는, 시멘트 포장길에 넘어져 버렸다. 당연히 울었다. 엄마는 괜찮다고 피 나는 무릎을 호호 불었지만 나는 무릎이 아파서 운 게 아니었다. 무릎 부분에 손바닥만 한 구멍이 뻥 뚫어진 스타킹이 나를 울게 했다. 초등학교 입학 날이라고 생전 처음 입어보는 그 하얀 스타킹이 얼마나 예뻤는데, 그 게 망가진 게 더 서러웠던 탓이다. 그렇게 이방 저방을 둘러보다 그만 우뚝 서버렸다.

맨 마지막 방. 묵직한 자물쇠가 죽은 듯 매달려있는 방. 너무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아 짙푸른 이끼마저도 누렇게 변해 버렸다. 그 누런 이끼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문이 무겁게 닫혀 있었다. 긴 세월 사느라 잊어버렸던, 화석처럼 변한 문 앞에도 하염없이 눈이 내렸다. 간간이 바람이 불어 내린 눈을 쓸어가 버렸다. 천천히,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방문을 여는 번호를 꾹꾹 눌렀다. 그 남자가 사는 남쪽으로 가고 있어서, 눈이 내리고 있어서, 바람이 불고 있어서..... 온갖 핑계들이 잊고 있었던 전화번호를 손가락은 기억해 내고 있었다.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있고 애잔하다. 살아온 긴 세월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미움이나 슬픔 같은 것들도 긴 세월 동안 나도 모르게 다 삭아 떠내려가고 아름다웠던 시절만 남겨 놓았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아스라한 수평선으로 사라진 시간들을 불러내 추억하곤 한다. 아침 햇살처럼 빛났으나, 설익고 풋풋했기에 보낼 수밖에 없었던 행복하고도 애잔한 이야기들을 가슴속 깊이 묻어놓고 삶이 팍팍하거나 외로울 때 한 번씩 꺼내 보곤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예전엔 강릉 기차역에서 경포로 들어가는 철길이 있었다. 그때 그 시절에는 철길을 따라 코스모스를 심었다. 가을이면 어린아이 키만큼 자란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 코스모스가 활짝 핀 산등성이 사이로, 바다로 향해 난 철길이 그 남자와 나의 주된 데이트 코스였다. 지금은 그 철길이 사라지고 없지만, 내 가슴속 맨 마지막 방에는 철길이 있고 활짝 핀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바다가 있고 해당화가 붉게 피는 모래 언덕이 있다. 어린 연인들의 설익고 풋풋한 사랑이 있었다. 손을 잡고 싶어도 가슴 두근거려 손도 잡지 못하는 어린 연인들은, 철로 위를 수평으로 서서 걸으며 어쩌다가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밤이 깊어, 연수원 주차장 희미한 가로등 밑으로, 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와 멈추었다. 이미 화석처럼 굳어버려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그가 나를 찾아온 순간이었다, 내리는 눈 때문이었을까, 아님, 간간이 불어주는 바람 때문이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차에서 내리는 그 남자를 보는 순간, 가슴은 뛰고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예의 그 쑥스러움을 여전히 간직한 채, 천천히 다가오는 그 남자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늘 그 얼굴에서 보던 선한 웃음이 아직도 그 남자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 남자의 얼굴에서도 두근거림과 설렘의 향기가 짙게 배어나고 있었다.

참 이상도 했다. 40여 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만났는데 어색함도 잠시, 그 시절처럼 자연스럽게 깔깔깔 대며 웃었다. 첫사랑 앞에 서면 다 그렇게 되는 걸까? 어쩌면 그렇게 자연스러운지 마치 어제 만난 사람 같은, 그 자연스러움은 뭐란 말인가? 시간이 흘러도 그 오묘했던 시간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산다. 다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조차 알 수 없게 맑은 샘물로 고여 있다가, 어느 날 방문이 열리면 시작도 끝도 없이 흐르는 강물이 되는 모양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첫사랑은 그런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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