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이 유감
설이 지나면 마치 정말로 설날 떡국을 먹으면 나이 한 살을 먹는다는 게 사실인 것처럼, ‘꼼짝없이 한 살 더 먹었다’는 얘길 많이 하지요. 해가 바뀌어도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 미루다가, 설이 지나면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 깃든 말인데요. 우리나라에서는 “너 몇 살이냐?”라고 물을 때 답을 세 가지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나이를 세는 방법이 세 가지나 있지요.
우선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만 나이가 있습니다. 만 나이는 태어난 순간 ‘0살’로 시작해서 매 ‘생일’이 지날 때마다 한 살씩 더해지는 나이입니다.
또 태어난 순간 ‘0살’로 시작하는 건 같지만, 매년 ‘해’가 바뀔 때마다 한 살씩 더해지는 ‘연 나이’가 있습니다. ‘연 나이’는 법 집행의 편의를 위해 병역법, 청소년 보호법 등 일부 법이나 규정에 적용되는 나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세는 나이’, 이른바 ‘한국식 나이’가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나이를 먹어 ‘한 살’로 시작해서 매년 ‘해’가 바뀔 때마다 한 살씩 더해지는 나이입니다.
가령 베이비붐 세대 허리 격인 ‘58년 개띠인 분이 10월 5일생이라면, 2022년 올해 만 나이는 63세, 연 나이로는 64세, 우리 나이로는 65세가 되는 거지요. 이러다 보니 생일이 늦은 분들은 괜히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하고, 또 나이 셈법이 통일되지 않은 데서 오는 불편함 등을 이유로 우리 나이를 없애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는데요. 사실 우리의 나이 셈법은 참 심오한 셈법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수정란이 세포분열을 거쳐 번듯한 사람, 태아로 탄생하기까지 소위 열 달 동안의 시간을 소중한 나이 한 살로 의미를 부여한 셈법이거든요. 뱃속 태아의 생명을 소중하게, 그리고 인격적으로 대접한 셈법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나이 들수록 그런 우리 나이 셈법의 심오함은 뒷전으로 처지고, 나이를 말할 때 이왕이면 만 나이로 말하고 싶어 지고, 또 ‘립서비스’일지언정 실제 생물학적 나이보다 훨씬 아래로 봐주면, 마치 정품을 할인가에 구입했을 때처럼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실 돌이켜보면 1990년대경만 해도 삼강오륜의 ‘장유유서’가 사회적 기본 규범으로 통용되던 때라서, 술자리에서 언쟁을 벌이다 기분이 나빠지면 서로 ‘민증 까 봐!’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주민등록증에 기록된 생년월일을 확인해서 누가 형뻘이고 누가 아우뻘인지 확인하자는 절차였는데요. 그렇게 해서 형과 아우의 순서가 정해지면 논쟁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아우가 형의 말을 듣고 머리를 수그리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이만 먹고 성숙하지 못한, 마치 나이가 벼슬인 양 행동하는 ‘속 빈 강정’ 같은 어른들이 등장했고, 거기에 민주와 평등이라는 이념이 확산되면서, ‘장유유서’는 그야말로 ‘개뿔 같은 소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나아가 오히려 청춘이 ‘청춘예찬’을 넘어 ‘찬양’ 받는 시대가 되면서, 박범신의 소설 ‘은교’를 바탕으로 정지우 감독이 만들어 2012년에 개봉한 영화 ‘은교’에는, 노시인 이적요의 이런 대사가 등장합니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이 말은 현대에 들어서 사람들이 무조건 청춘을 좋아하고, 늙음을 형편없게 여기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을 지적한 명대사였지요.
게다가 갈수록 우리나라 국민들의 평균수명과 기대수명이 길어지면서, 외모라든가 건강상태, 사회적인 활동 등이 생물학적 나이와 점점 괴리되는 현상이 빚어지게 됐는데요. 가령 생물학적 나이는 60대인데, 여전히 주름살 없는 외모는 족히 열 살은 넘게 어려 보이고, 건강상태도 4,50대 못지않은 체력을 유지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1990년대만 해도 환갑잔치를 하고, 2000년대만 해도 칠순잔치를 했는데, 백세시대인 요즘은 환갑잔치하는 분들 전혀 없고요, 칠순 때도 잔치보다는 평소 생일처럼 보내고 대신 해외여행 등을 비롯해 의미 있는 일들을 많이 하고 싶어 하시지요.
이렇게 백세시대를 지나 백 20세를 넘보게 되다 보니까, 이젠 우리 사회에서도 10여 년 전 초고령사회인 일본에서 통용되던 ‘곱하기 0.7세대’의 논리가 공감을 받게 됐습니다. 우리 스스로 인식하고 사회적으로 생활하는 나이는, 생물학적 나이에 0.7을 곱한 나이라는 건데요. 예를 들어 올해 64세인 분들은 64 곱하기 0.7 해서 45세의 마음으로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고 산다는 겁니다.
이쯤에서 나는 올해 몇 살인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 나이 셈법으로 한 나이, 만 나이, 연 나이, 그리고 생물학적 나이에 0.7을 곱한 나이. 이중 어느 나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KBS 3 라디오 '출발멋진인생 이지연입니다' 방송작가 권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