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02.07 11:05

햇살이 따사롭습니다.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며 얼굴을 때리고 지나갑니다. 순식간에 따사로움은 사라지고 춥습니다. 호텔 안에서 보이던 창밖 풍경은 따사롭고 포근해 보였습니다. 바다 풍경도 파도 하나 보이지 않고 잔잔했습니다. 당연히 얇은 코트를 입고 호텔을 나섰습니다. 허나 제주의 바람은 세차게 매웠습니다. 독기를 아직도 서슬 푸르게 품고 세차게 불고 있었습니다. 서둘러 다시 호텔로 돌아가 두꺼운 코트로 갈아입고 길을 나섰습니다.

꽃을 좋아하는 나는 당연히 동백꽃을 찾아 나섰습니다. ‘동백(冬柏)’꽃이라는 꽃은 이름처럼 겨울에 찾아와 이듬해 봄이 올 때까지 피는 꽃입니다. 다른 꽃들이 매서운 바람과 추위에 사라져 갈 때, 동백꽃은 고고한 자태로 꽃을 피웁니다. 겨울 내내 제주는 동백꽃 세상입니다. 도로의 가로수도 동백꽃으로 넘쳐납니다. 황량한 들판에도 동백꽃 한두 나무쯤은 꼭 있습니다. 하다 못해 무너져 내리는 폐가에도 지난 계절에 덩굴 식물이 동백나무를 타고 올라 칭칭 감고 떠났어도 동백꽃은 피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왔을 때 제주는, 동백나무 아래 수놓은 동백꽃이 레드카펫처럼 깔려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길을 나선 것이지요.

서둘러 11월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동백꽃을 찾아 나섰습니다. 동백꽃이 고고한 자태를 마음껏 뽐낸다는 ‘카멜리아 힐’로 갔습니다. 시기적으론 늦었습니다. 11월부터 피는 동백이 지금은 1월 말, 벌써 석 달이 흘렀으니 온전한 동백꽃을 보긴 틀렸습니다. 알지만, 미련이 켜켜이 쌓인 터라 ‘카멜리아 힐’로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위해서, 늦었지만, 나처럼 찾아오는 늦게 온 사람들을 위해서 조금은 피어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카멜리아 힐’에 들렸습니다.

역시 계절의 바뀜은 어김없이 이곳에도 찾아들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고 들른 ‘카멜리아 힐’에는 동백나무마다 띄엄띄엄 동백꽃이 몇 송이씩 피어 있었습니다.   봄이 멀지 않았으니 당연한 것이겠지요. 흔히 하는 말로‘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습니다. 뒤늦게 찾아와 기다려 주지 않을까 했던 마음이 욕심이었습니다. 그래도 동백나무 꽃구경 오는 때늦은 손님들을 배려해 돌확에 물을 담아 떨어진 동백꽃을 띄워 놓았습니다.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동백꽃을 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습니다. 모든 게 시기라는 게 있는데 제가 늦은 걸 어쩌겠어요.

조선호텔에서 바라 본 서귀포 앞바다/ 사진제공=조규옥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돌아오는 차 속에서, 봄이면 늘 피어나던 내 고향 동백꽃이 떠 올랐습니다. 강원도 하면 어디든 그렇듯 내 고향 강릉도 산골 도시입니다. 시내에서 조금만 나가면 산이 있고 계곡이 즐비합니다. 어렸을 때, 자연히 계곡이나 산비탈을 타고 놀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향기로운 냄새가 나면 그 냄새를 찾아 끝내는 그 나무 밑에서 눈을 감고 그 향기로운 냄새에 취했었지요. 코를 벌름거리며 친구들과 나란히 서서 그렇게 봄을 맞았습니다. 그 노란색 꽃의 알싸한 냄새가 얼마나 좋았던지요. 그 동백꽃이 김유정(1908-1937)의 소설 ‘봄봄’ 말미에도 나옵니다.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그만 아찔하였다.’

이렇게 끝맺었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고 받아들였습니다. 나도 동백꽃 향기가 얼마나 짙었는지, 질식할 것 같은 생각도 드는 향기라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소설 속, 순진한 소작농의 아들인 ‘나’와 이성에 일찌감치 눈을 뜬 ‘점순’입니다. 먼저 이성에 눈뜬 점순이의 구애를 이해하지 못 한 ‘나’와 ‘점순’이는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냄새가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버린 순간 순진한 산골 소년과 조숙한 소녀 사이의 성장 소설로는 동백나무 꽃향기가 제격이었던 거지요.

사실 이 소설에 나오는 동백꽃은 요즘 우리가 아는 붉은 동백꽃은 아닙니다. 전혀 다른 꽃이지요. 저도 이 동백꽃 이름 때문에 대학교 다닐 무렵 잠시 혼란을 겪었습니다. 내가 알던 동백꽃이 동백꽃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실 김유정의 소설 ‘봄봄’에 나오는 동백꽃은 생강나무 꽃입니다.

강원도에선 그 꽃을 동백꽃이라 불렀습니다. 생강나무 꽃은 산수유나무 꽃과 비슷하게 생겼지요. 동백꽃 향기나 산수유 꽃향기는 별거 없지만, 생강나무 꽃향기는 아주 진 합니다. 가끔 구별이 힘들 때 꽃향기로 산수유 꽃인지, 아니면 생강나무 꽃인지 비교하곤 합니다.

언젠가 손주를 데리고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생강나무 꽃을 발견하곤 ‘주형아~~~ 냄새 한 번 맡아볼래! 향기로운 냄새가 나!’ 했더니 손자가 생강나무 꽃 냄새를 맡더니 기상천외한 얘기를 합니다. ‘할머니! 그럼 이 나무에서 김치 담글 때 넣는 생강이 나와요?’ 하고 묻는다. 나는 혼자 배를 잡고 웃고 손자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어리둥절하고. 그때 장면이 떠올라 ‘킥킥’ 웃으니, 호텔로 돌아가는 차 옆자리에 앉았던 손자가 묻습니다. ‘할머니! 왜 웃어요?’ 내 얘기를 들은 식구들이 모두 한바탕 웃었습니다.

차를 타고 제주 곳곳을 돌다 보니 제주도 골목길 담장 밑에는 벌써 이름 모를 풀꽃들이 피고 있었습니다. 봄이라는 얘기지요. 내가 사는 서울에는 오늘도 대설 주의보까지 발령되었다지만 오는 봄을 무엇으로 막겠습니까? 제발 오는 봄에는 마스크를 벗고 꽃구경을 제대로 할 수 있기를..... 어수선한 나라가 안정이 되어, 대한민국호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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