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02.09 11:39

<중년을 넘어선 그대에게 띄우는 안부편지>

6. 괜찮아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 먼저 건네선 안 되는 말들이 있지요. ‘결혼해야지’, ‘결혼 언제 할 거야?’ ‘아기 낳아야지’, ‘아기는 언제 가질 거야?’ 이런 질문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어서 가족 사이에서도 참 조심스러운 질문입니다. 심지어 ‘요즘 사귀는 남자 있어?’ 혹은 ‘요즘 사귀는 여자 있어?’라는 질문도, ‘요즘 사귀는 사람 있어?’라고 하면 모를까, 그렇게 성별을 갈라서 질문하면 안 된다는 말도 합니다.

이에 비하면 지금 장노년이 된 분들은 사회적으로 ‘결혼 적령기’`라는 개념이 존재하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 분들이다 보니까,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을, 가족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많이 들었습니다.

특히, 1980년대만 해도 ‘노처녀’, ‘노총각’이란 말이 있어서, 소위 몇 살에 결혼하면 ‘금값’, 그 보다 나중에 결혼하면 ‘은값’, 그 보다 더 나중에 결혼하면 ‘똥값’이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금값일 때 결혼하기 위해 선을 봐서 부랴부랴 결혼한 분들도 적지 않은데요. 이런 소싯적 생각만 하고 젊은 사람들한테 그런 금기어들을 남발하다간 식구들 사이에서도 ‘왕따’가 되기 십상입니다.

요즘 가족 형태와 관련해서 ‘정상가족’이라는 말 갖고도 논란이 분분합니다. 현대 가정에는 이혼이나 사별 후 혼자 아이를 키우거나, 아예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 기르기도 하는 등 새로운 가족 형태가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정상 가족’, ‘비정상 가족’이 어디 있냐는 겁니다.

사실 ‘정상’이라는 개념은 그 시대, 그곳에 사는 사람들끼리 정하고 합의한, 상당히 편협한 개념입니다. 그러니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정상’의 모습이 많이 바뀌는 건 당연한 건데요. 예전에는 예전의 것을 따랐다면, 지금은 지금의 것을 따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세상이 바뀌어도 분수가 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야?’라고 호들갑을 떨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하긴 젊었을 때는 ‘괜찮다’는 말이 은근히 성의가 없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뜨뜻미지근하게 괜찮다가 뭐야?’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요. 나이 들면서 ‘괜찮다’는 말은 사람을 참 위로해 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전에는 ‘괜찮다’가 ‘별로 나쁘지 않고 보통 이상이다’, ‘탈이나 문제, 걱정이 되거나 꺼릴 것이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별로 나쁘지 않은 데다 보통 이상이라면, 욕심꾸러기가 아닌 이상 당연히 좋고 감사할 일입니다. 또 탈이나 문제, 걱정이나 꺼릴 것이 없다는 건 나쁘지 않다는 건데요. 나이가 들면 꼭 ‘좋다’가 아니라, ‘나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감사할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나이 들면 조선조 최장수 재상인 황희처럼 사는 게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황희가 태종과 세종의 특별 대우를 받으면서 24년간 재상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건, 소신과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자세 때문이었다는 평을 받는데요. 이런 일화가 전해지지요.

황희가 공무에 잠깐 짬을 내어 집에 있을 때, 여종 둘이 서로 싸우다가 잠시 뒤 한 여종이 와서 다른 여종의 나쁜 점을 일러바쳤습니다. 그러자 황희는 “네 말이 옳다.” 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 그녀와 싸운 또 다른 여자 종이 들어와 앞의 여자 종에 대한 나쁜 점을 말했더니, 황희가 “네 말도 옳다.” 하면서 내보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조카가, “한쪽이 옳으면 한쪽이 그른데, 어찌 다 옳다고 하십니까” 하니 황희가, “네 말 또한 역시 옳다.”라고 말하고, 분별하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고, 모두 다 괜찮다고 여기는 마음은 언뜻 보면 마치 회색처럼 주관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황희가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네 말도 옳다’고 한 것처럼, 나이 들면 많은 일들을 ‘괜찮아’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지금 내 인생의 모습이 보름달이든 초승달이든, 아니면 상현달이든 하현달이든, 그래서 모두 괜찮습니다. 

-KBS 3 라디오 '출발멋진인생 이지연입니다' 방송작가 권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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