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03.11 11:25

“그러니까 둘 중의 하나. 혼자가 좋을까, 둘이 서가 좋을까. 함께가 아닌 혼자 바에 가고, 혼자 극장에 가는 것. 혼자 여행을 하고 혼자의 시간을 독차지하는 것. 그 선택은 무엇으로 떠밀려서 하는 행동이 아니며 고통스러운 잠행도 아니다.”(이병률의 『혼자가 혼자에게』 中) 내가 좋아하는 이병률씨의 책 속에서 찾은 내가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나는 아직 이병률씨가 말하는 이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혼자 식당에 가는 것? 못 합니다. 혼자 극장에 간다? 아직 못하고 삽니다. 혼자 여행을 하는 것? 어쩌다 일 년에 한두 번은 하지만 아직 어떤 재미도 붙이지 못했습니다. 아직 무언가 혼자 하는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혼자 이런 것들을 하려면 쭈뼛거려집니다. 지나가는 모두가 날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 무렵 아파트 옆에 있는 공원을 산책했습니다. 보통은 둘레길을 걷지만, 오늘은 저녁 무렵이라 걷다가 해가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내가 걷는 둘레길에도 멧돼지가 출몰했다는 안내 문자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탓도 있습니다. 보통 때 가지 않던 공원길을 산책했습니다. 벚나무 가지에도 꽃눈이 슬쩍 부풀어 올랐습니다. 목련꽃 꽃눈은 아직 겨울입니다만 솜털 보송보송 달고 터질 듯 부풀어 올랐습니다. 곧 꽃이라도 피울 모양입니다.

1시간 넘게 기분 좋게 공원 길을 걸었습니다. 어느덧, 짧은 겨울 해는 야트막한 서쪽 산으로 넘어가려 합니다. 한 풀 기세가 꺾였던 바람이 다시 찬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슬슬 집으로 갈 시간입니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이태리 음식을 파는 식당을 지났습니다. 사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잔디밭 언덕길에서 연을 날리고 있습니다. 슬며시 웃음이 났습니다. 존경스러웠습니다. 나라면 못 할 일인데 대단하다 싶어섭니다. 잠깐 서서 높이 날아오른 독수리 연을 구경하다 공원 서문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공원 서문 쪽 편의점에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습니다. ‘할 일도 없는데, 한 번 들어가 볼까?’ ‘요즘 싸고 좋은 것들이 많다는데 공원 안 편의점에도 그런 것들이 있을까?’ 뒤이어 ‘허기를 달래기엔 편의점이 좋다는데 나 지금 배도 고픈데.....’ 하는 생각이 따라왔습니다. 문을 미는데 열리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이 편의점은 무인 편의점입니다. 처음이라 ‘어쩌지?’하며 망설이며 두리번거립니다. 사람도 없는데 주변이 시끄럽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신용카드를 넣고 신원 확인을 하라고 방송 안내가 흘러나옵니다.

사진제공=조규옥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머뭇거렸습니다. 머뭇거리는 동안 안내 방송은 신용카드를 넣으라고 자꾸 재촉합니다.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옵니다. ‘하라는 대로 해야 하나?’ ‘물건도 안 샀는데 카드부터 넣으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합니다. 불안감에 휩싸여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여대생인 듯한 사람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불안감이 사라지고 용기가 생겼습니다. 신용카드를 기계에 집어넣고 잠시 기다리자 안내 방송이 또 흘러나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를 반복합니다.

그 사이 뒤에 섰던 아가씨도 신원 확인을 끝냈고 우린 함께 편의점에 들어섰습니다.  편의점 안이 횅합니다.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매대에 빈자리가 많습니다. 공원 안의 편의점이라 그런지 과자류와 음료수가 많습니다. 술은 아예 팔지도 않는다는 안내 메모지도 붙어 있습니다. 아마도 공원 내 편의점이라 그렇겠지요. 편의점을 한 바퀴 돌아보니 삼각김밥과 샌드위치가 나란히 놓여있습니다. 다른 매대와 마찬가지로 샌드위치 대여섯 개, 삼각김밥 대여섯 개가 보일 뿐입니다. 오후라 이미 다 팔려나간 모양입니다.

어디에선가 읽은 내용인데 밖에서 한 끼를 해결하려면 샌드위치를 먹거나 비빔밥을 먹는 게 건강에 좋다고 했지만, 샌드위치를 먹을 생각은 없습니다. 여름이라면 모를까 한겨울에 찬 샌드위치를 먹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왕이면 따뜻한 것이 먹고 싶습니다. ‘삼각김밥으로 오늘 저녁을 해결해 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마침 집에 콩나물국도 있으니 괜찮을 듯싶습니다.

삼각김밥을 찬찬히 훑어봅니다. 참치마요네즈 삼각김밥이 눈에 들어옵니다. 고개가 절로 절레절레 도리질을 칩니다. 참치가 들어간 김치찌개나. 참치가 들어간 김치전은 좋아해도 이건 아닙니다. 참치와 마요네즈에 버무린 김밥은 비위에 맞지 않습니다. 그 옆에도 그 옆에도 참치마요네즈 김밥이 주르륵 놓여있습니다. 나만 싫어하지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전주비빔밥을 찾고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언젠가 삼각 김밥 중 전주비빔밥을 먹어본 적이 있는데 맛있었습니다. 조금은 매콤하고 간도 알맞았습니다. 아무리 두리번거리면 찾아도 전주비빔밥은커녕 그냥 비빔밥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돌아서 갈까?’ 하는데 참치마요네즈 삼각김밥 가운데에 김치 제육 삼각김밥이 ‘까꿍! 나, 여깄어’ 하면서 손을 흔듭니다. 반가웠습니다. 김치제육 삼각김밥이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삼각김밥이 김치제육밥도 나오다니 세상 참 좋다.’라는 생각을 하며 얼굴에 미소가 번집니다.

집에 밥이 없었습니다. 하기도 싫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40년이 넘도록, 때가 되면 밥을 해왔습니다. 식사를 준비하면서 자식들 입에 밥이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서 행복하기도 했지만 이젠 나이가 들어 밥 짓는 것을 졸업하고 싶습니다. 아이들도 다 둥지를 떠난 마당에 이젠 나를 위해 살고 싶습니다. 물론 압니다. 죽지 않으려면 밥을 먹어야 하고, 건강하게 살다 가려면 제대로 영양소를 맞춰가면 식사 준비를 해서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나이들 수록 ‘잘 먹고 잘살기’라는 말이 있다지만 오늘은 모든 게 귀찮기만 합니다.

귀찮을 때 한 번쯤, 반기를 들고 싶은 겁니다. ‘잘 먹고 잘살기’는 한쪽으로 밀어 놓고 오늘 저녁 한 끼를, 남이 해 준 밥을 먹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공원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가기 싫었습니다. 집에 들어가 식사 준비를 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려 왔습니다. 요리를 좋아하는 나 지만 오늘은 싫습니다. 그 싫은 마음이 김치제육 삼각김밥을 냉큼 집어 들게 했습니다. 맛이 좋을지 나쁠지는 나중 문제입니다.

편의점 밖으로 나오니 서쪽에 길게 드리운 저녁놀이 곱습니다. 아까 보던 저녁노을보다 훨씬 더 고운 빛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마음은 하늘을 날 듯 가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