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아파트 근처 공원으로 나갔습니다. 봄이 온다지만 생강나무 나뭇가지에 노란 왕관들이 수없이 매달렸지만 3월의 날씨는 아직 봄은 아닙니다. 겨울과 봄 사이. 어중간한 위치에서 오늘은 봄이었다가 내일은 또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날씨 탓인지 모두들 패딩 하나는 걸친 모습입니다. 평일이라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마른풀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이 아직은 맵고 쓸쓸했습니다.
어디선가 트럼펫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어디지?’ 두리번거리던 눈은 호수 옆 작은 정자 아래서 멈추었습니다, 하루가 저무는 저녁, 노을빛을 받고 서 있는 초로의 남자의 모습이 아른아른 눈부셨습니다. 남자가 정자 아래 노을 속에 서서 트럼펫을 불고 있었습니다. 강렬한 황금빛 노을빛에 숨어든 그 남자의 얼굴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노을빛 탓에, 어렴풋이 검정 바지에 검푸른 빛 패딩을 입은 모습으로 보아 초로는 넘은 것으로 느껴집니다.
간단한 패딩 차림으로 공원 산책 나왔던 사람들은 때아닌 트럼펫 소리에 가던 걸음을 멈추거나 늦추었습니다. 공원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던 꼬맹이도 트럼펫 소리에 끌렸는지 멈칫거리며 소리 나는 쪽을 바라봅니다. 마법에 이끌리듯 나도 트럼펫 소리를 찾아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곤 감탄했습니다. 호숫가 노을 속에 서서 황금빛 나팔 하나로 한순간 세상을 제압해 버린 모습에 반해 버렸습니다. 지금, 이 시간, 그 남자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게 느껴졌습니다.
아니 평범한 동요 하나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음악에는 젬병인 나도, 어느 사이엔가, 그가 만들어 내는 리듬에 맞춰 노랠 부르고 있었습니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이 트럼펫 부는 남자의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그 남자가 서 있는 정자에 특등석을 차지한 사람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왠지, 쭈빗거려지는 나는 건너편 호숫가에 멀찍이 떨어져 자리 잡고 앉았습니다. 바람 부는 언덕에 자리 잡은 돌의자에 앉았습니다. 찬기가 조금씩 스멀거리고 올라 오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합니다. 음악회에 가면 제일 뒷자리, 연주자의 모습이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자리에 앉은 셈입니다.
그럼 어떤가요! 어차피 애수가 깃든 선율은 가까이보다는 먼 곳일 때가 더 애잔하고 아름다운 법인데. 들을수록 금관악기 특유의 애수가 깃든 선율이 해질녁엔 제격입니다. 트럼펫 연주는 어느덧 조용필의 ‘허공’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끝으로 가곡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은상 시로 만든 가곡 ‘가고파’가 울려 퍼지더니 박문호 시인님의 시 ‘님이 오시는지’의 선율이 춤을 춥니다. 그러다가 ‘예스더데이’가 흘러나오고 ‘오, 대니 보이’가 귀를 쫑긋거리게 합니다. 아무리 내가 음악에 대해 문외한이라도 이건 프로가 아니다 싶습니다. 귀에 익은 멜로디가 나를 붙들어 앉혀 놓았지만 그의 음악적 취향이 너무 자유 분망합니다. 그럼 어떻습니까? 나는 오늘 어스름 지는 저녁 수변 음악회 관객으로 행복한 것을.
정자 아래, 위에서 초저녁 운치에 한껏 젖어 들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 떠났습니다. 주인을 따라 산책을 나섰던 강아지도 트럼펫 부는 남자를 바라보며 한껏 꼬리를 흔들다 주인들을 따라 떠났습니다. 떠난 사람들 자리엔 트럼펫 소리에 이끌려 온 다른 사람으로 다시 메꾸어졌습니다. 나도 일어서야겠습니다. 내가 앉은 돌의자의 차가운 한기가 오들오들 떨게 합니다. 오래 앉아 버티기엔 아직 바람이 너무 찹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호수에 사는 오리들이 일렁이는 물살을 따라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저 오리들도 트럼펫 연주를 감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집으로 향하는 등 뒤로 그 남자가 부는 트럼펫 소리가 애잔하게 따라옵니다. 트럼펫 소리는 밤이 깊을수록 더 섬세해지는 법입니다. 끊어질 듯하다가 다시 살아나고 끊어질 듯하다가 다시 살아나 이어져 갔습니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끊어질 듯 이어지며 흘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