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06.06 16:05 | 수정 : 2022.06.06 16:13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나 또한 언제나 그러하니, 가끔이나마, 나는 행복한가 묻고, 답을 해본다. 그 답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세상 모든 것 중, 반은 좋다. 내 모든 시간의 반은 좋다는 뜻. 그래, 나는 반만 행복하다. ‘그렇다’라고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하늘도 땅도 웃는다. 참 공평하다며.

이런 웃음소리가 입가에서 사라지지 않을 땐, 마음이 곧 하늘. 여기에 컴퓨터라는 말을 넣어본다. 그래도 괜찮다. 반만 행복하다고 생각할 땐, 컴퓨터든 뭐든 괜찮다. 물론, 여기서 반은, 내 마음이 억지 우긴 결과라 할지라도.

문제는 향후 디지털 시대에서도 나는 계속, 내 마음이 우기는 대로, 그 절반의 행복이라도 가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과연, 나는 내 몸과 마음이 분리될지도 모르는 저 상상의 디지털 시대에도 내 절반의 행복을 바라볼 수 있겠느냐는 거다. 과연 디지털 시대 행복은 존재하기나 할까?

짧아진 세상의 특이점

보통, 사회의 새로운 국면 전환이 이루어지는 정점을 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인류는 다음 같은 큰 특이점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공룡 틈바구니에서 생겨난 포유류의 특이점이 수억 년 이상 걸쳐 일어났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공룡이 갑자기 사라진 이후, 인간이 두 발로 걷기까지 수 천만년이 걸렸고, 자유롭게 두 발로 다니기까지 불과 수백만 년 전이다. 그리고 불의 문명을 이루기까지 수십만 년을 거치면서 그 끝자락에 특이점이 존재했으리라.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등의 특이점을 거쳐, 마차를 끌고 칼의 문명에 도달하기까지 수만 년 만에 특이점을 지나친다. 이때는 토지가 가장 큰 자산이었다. 그 후, 금이 자산으로 추가되면서 수천 년을 지나면서 산업혁명이란 특이점을 맞이한다. 그리고, 불과 이삼백 년 만에 핵의 특이점을 맞는다. 이렇게 근대를 거치면서 주식이나 채권이 새로운 자산군에 편입된다.

드디어, 집채 같은 컴퓨터를 만들고, 책상과 같은 개인용 컴퓨터 생활 수십 년 만에,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면서, 새로운 자산으로 등장한 암호화폐를 사용하는 새로운 특이점의 길에 들어선 우리는, 바로 컴퓨터 시대 문명의 문을 열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현대에 이르기까지, 억, 천만, 백만, 십만, 만, 천, 백, 십 단위로 그 특이점 기간이 급격히 줄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렇게 인간의 노력이 과학을 급속히 발전시켰고, 그만큼 하루가 다르게, 아니 일분일초가 다르게 우리 생활을 변화시키고 있으니, 지금 세상을 다른 높이에서 다른 각도에서 나부터라도 내 발걸음을 분명 바꾸긴 바꿔야 할 일이다.


이미 시작된 컴퓨터 문명의 특징

이러한 특이점들이 짧아질수록 인구는 증가했다. 바로,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이 인간 욕망을 증폭시켜왔기 때문일 것. 그 욕망이 갑자기 컴퓨터라는 매개체로 집중되고 있는데, 급기야는 인간이 인간을 컴퓨터 속으로 이입시키는 수준에 이른다. 아마도 양자컴퓨터가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는 시점을 컴퓨터 특이점이라 지칭할 수도 있을 것. 바로 ‘신체 컴퓨터’ 시대를 맞이하는 것. 인간의 DNA와 연결을 시도하는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은 컴퓨터라는 말 대신, 뭐라 뭐라 부르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것.

이미 시작된 컴퓨터 문명의 특징의 하나는 인간 정체성의 변화라 하겠다. 컴퓨터에 명령을 내리면, 이 명령을 위임받은 컴퓨터가 인간에게 명령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자칫, 컴퓨터가 우리 인간을 능가하면 어떻게 될까? 답안을 명확하게 내리기 전에, 이러한 우려의 반복이 계속되면 될수록, 인간 정체성은 큰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컴퓨터 인공지능의 또 다른 목소리가 인간보다 더 커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어쨌든, 이렇게 빠른 변화의 개인 생활 자체가 블록체인 속에 실시간으로 기록되는 시기가 점점 다가올 것은 분명하다. 그럴수록,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블록체인 생활화라는 명분은 인간의 24시간 컴퓨터화로 자연스레 이어질 것이다. 이는 우리 신체는 로봇화가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은 아바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의 세월이 지나기 전의 이러한 사회 변화는, 아마도, 세계 다국적 기업 중심으로 세계 질서가 재편될 것이라 보인다. 가면 갈수록, 경제 불균형에 따른 절대 빈곤층이 증가할 것이며, 결국, 절대 자본가, 그들의 세계가 되리라는 상상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자, 이러한 시대에 우리네 행복은 어떻게 변할까? 아마도 1인 생활 시대 증가로 인해, 개인 생활은 더욱 단조로워질 것이 분명하다. 이즈음에는 행복의 정의도 변화를 일으킬 것. 결국, 나만의 행복론이 무성해지고, 행복 같은 행복감으로 숨을 쉬며, 사는 것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싫은, 나는 ‘디지털 인간’이니까 하는, 살아있는 시간의 포기 아닌 포기도 나타날지 모른다.


나의 디지털 시대를 향한 욕심 사례

인간이 존재하는 한 행복 속에 있으면서도, 또 다른 행복이 있을 거라며 나 또한 나만의 행복을 찾고 또 찾으려 돌아다닐 것이다. 어느 시점일지 아무도 모를 ‘컴퓨터 문명 시대’를 지나치더라도,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 행복은 존재할 것. 지금도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이요, 또한 이에 순간마다 대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디지털 시대 이전에도 다양하게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행복을 향한 대답을 찾고 싶은 욕심은 나에게도 있었고, 그 욕심 표현의 한 사례로서, 나는 시 작품으로 써보려는 엉뚱한 시도로 이어졌었다. 그중, 하나가 30년 전에 썼던 <ET의 아들에게>라는 시다. 지금은 필연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시기에 필자는 기꺼이 컴퓨터 계통 연구소를 떠나, 시인으로 데뷔하면서 예술계 직장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가 되었다.

친구여 잘 있었나. 
오늘도 책상에 앉아
나의 컴퓨터에게 약속을 하였다네.
오늘처럼
내일도 나의 유전자를 건네 주리라고.
더 높다란 지능을 보존하기 위해
다른 컴퓨터가 가지고 있을 유전자도
많이 저장해 놓으라는 말도 함께 말일세.
먼 훗날 그다음 날에 우리를 지배하게 될 때는
내 이름도 꼭 기억해 달라는 말을 못 박는 것이라네.
이건 비밀이네만
만일 처가 허락만 해준다면
내 컴퓨터와의 재혼 주례를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다는 걸 믿어주게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랬듯
나도 컴퓨터에게
무엇인가 대신해주길 바란다는 걸 남겨 놓고 싶은 것이라네.
혹시 우리 몇몇이 하나님에게 그랬듯
컴퓨터도 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야
미리 한번 해본다는 걸 그대에게만은 고백하고 싶은 거라네.
문득 새털구름 사이로 그대 손이 보이는 날을 기다리며
아침마다 한번 하늘을 보려는 버릇은
내 컴퓨터보다 먼저 그대를 만져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지.
그것은 친구여
나의 컴퓨터가 언제까지 살아있을는지
또한 나의 마음밭 한가운데 지도를
다른 컴퓨터에게도 전달해 놓았는지
오직 그대만이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에서라네.
소나무가 빽빽한 산을 보고 오겠네.
눈이 커지려는지 아파 오는 걸 어쩌겠나.
잘 있게.
비가 올 듯하니 감기 조심하고.
(졸시, 1993, ET의 아들에게)


<ET의 아들에게>를 위한 변명

영화 <ET>는 첫 직장 KIST에 들어간 1984년도에 제작되었다. 국내에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해에 개봉했다. 당시, 연구소에서는 PC를 대형 컴퓨터에 접속해 서울 올림픽 전산 업무를 완성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한국은 IT강국을 향한 큰 행보를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ET>가 연구소에 근무하던 나에게 가져다 영향은 매우 컸다. 당시 이 영화를 몇 번은 보았던 것 같다. 영화 시나리오의 상상은 둘째 치고라도, 이론으로만 접했던 컴퓨터 그래픽이나 애니메이션 처리 기술이 영화에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밤잠을 설쳐가며 영화 장면들을 떠올리며 공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이 주 업무였기에 매일 12시간 넘게 컴퓨터와 씨름을 하며 지냈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문서는 모두 컴퓨터 문자로 보관했다. 물론 일기도 컴퓨터 기억장치에 보관했다. 가끔, 중요한 문서가 삭제되는 안타까운 일도 생겼다. 그러니, 여러 기억장치에 따로 보관할 수밖에. 이처럼 컴퓨터 사용의 시행착오를 줄이려는 노력은 연구소 동료들과 이런저런 토론이 밤새 이어지곤 했는데, 그때 벌였던 상상 속의 디지털 시대 이야기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디지털 시대의 상상 자리엔 어쩌면 ET도 알게 모르게 참여했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 컴퓨터가 로봇이라든지, 그 로봇이 사람처럼 행동한다든지, 또 로봇이 사람보다 똑똑해져서 사람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든지, 아니 아예 사람이 로봇이 되어 옷을 입고 있다든지, 또 인간의 아바타가 되다가 로봇의 아바타가 된다든지, 또한 어떤 인간 영혼이 제 몸을 팽개치고 다른 인간으로 들락거린다든지, 그러다가, 어쩌면 ET처럼 될 수도 있다든지 하는 등등의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컴퓨터를 향한 상상의 꼬리는 인간이 절대적 힘을 가질 수도 있으리라며, 그 꼬리를 하늘 높이 세우곤 한다. 인간이 바벨탑을 세우려 했다는 전설 것처럼, 나 또한 가끔 절대자와 맘먹고 싶은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러니, 나의 컴퓨터가 내 명령을 거부할지 모른다는 걱정은 우리 인간 모두가 만든 걱정거리가 아닐까.

요즘에도 필자는 내 컴퓨터에 내 모든 생각의 흔적을 담고 있다. 첨단 인공지능 뉴스를 접할 때마다, 그 인공지능이 내 것을 활용해 나를 언제 어떻게 조정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내가 보관한 내 것을 영구히 숨길 지도 모른다. 하여, 나의 아바타 인공지능에게 내 흔적을 다른 컴퓨터에 영원히 전달해 달라고 하지만, 그는 나의 부탁을 코웃음 치며 외면할 수도 있겠다는, 참, 별 쓸데없는 걱정도 해보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ET는 로봇이 진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진화한 것이라는 쪽의 믿음이 더 크다. 당시, 영화를 만들어 이렇게 시를 남기게 해 준 영화감독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꿈도 꾸었던 것 같다. 아마 그도 ET는 컴퓨터가 아니라 인간 쪽 편이라 생각했으리라. 내가 가끔 소나무 보러 산에 오르듯, 영화감독도 답답할 때면 숲 속 깊숙이 들어가 산책하리라. 눈을 크게 뜨며 말이다. 혹시, ET를 볼 수 있을 듯하여.

시 <ET의 아들에게>는 1992년 말 겨울에 썼다. 가끔, ‘ET의 아들’도 비가 오는 날, 숲 속의 창가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 시를 읽고 있으리라는 즐거운 상상도 해본다. 그래, 그도 감기가 든다. 내가 목감기를 매년 거르지 않고 걸리는 것처럼, 감기는 가끔 들어도 된다. 며칠이면 나으니까. 그래도, 감기는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마스크를 써도, 어느 날 갑자기, 인공지능 컴퓨터가 만든, 요즘의 COVID-19 바이러스 같은 낯 모를 인공지능 바이러스가 인터넷망을 타고, ‘나도 감기다’라며, 그의 몸에 아니 내 몸에 갑자기 들어올지 모르니.


디지털 시대의 행복을 향한 사례, 코인 모으기

아직도 잘 모르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맛보고 싶었던, 지난 30여 년의 디지털 생활 모습을 되짚어 보면, 그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컴퓨터 문명이 펼쳐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앞다투어, 이제 많은 사람이 저만의 행복을 향해, 어떠한 모습으로든 이 디지털 시대의 행복을 먼저 느끼려 시도할 것이다. 분명, 자신만의 사례를 만들려 할 것이고, 그 어떤 사례가 새로운 행복의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오늘부터 무엇을 어떻게 하면 더 좋을까?

물론 정답은 없지만, 모두 생각하고 있는 사례가 다르겠지만, 한 개 사례를 더 강조하고 싶다. 바로 코인 모으기다. 새 컴퓨터 문명의 불을 지핀 것이 블록체인 이론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이론이, 화폐를 무한대 수준으로 발행한 전 세계 국가들의 혼돈 인플레이션 시대 그 양적 완화를 매듭짓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지금 컴퓨터 문명의 변화를 주도하는 곳은 컴퓨터를 먼저 만든 나라요 그 기업들이다. 이들이, 행복이든 사랑이든, 세상 유형무형의 어떤 가치든 새로운 이름의 토큰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먼저 토큰을 만들어 그 토큰으로 세상 자산을 독식하려 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러한 토큰 발행과 그 가격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변화를 지켜보면서, 오래된 관습처럼, 그 변화를 눈 뜨고 남의 집 불구경하듯, 그저 바라보고 있어야 할 것인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절대 자본가를 부러워하며, 그들이 흘리는 뉴스에 홀려, 그들이 공중에 날리는 그 토큰 몇 개 잡으려 졸졸 따라다녀야 할까?

분명, 아닐 것이다. 그들과 이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컴퓨터 문명을 함께 사는 마당에, 기왕이면 그들보다 먼저 세상 가치를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곧, 지금 동시대 변화를 직시하기에, 이 시대를 다음 시대로 함께 이끌어가야 하는 사람들의 책임이요 의무일 것이다. 전 세계에 화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토큰을 모아야 하는 당연함에 누구든 발 벗고 나서야 할 것.

맞다. 이 세상에 태어난 만큼, 새 컴퓨터 문명과 맞선만큼, 누구라 할 것 없이, 내 몫의 디지털 자본은 내가 지켜야 할 것이다. 주어진 내 몫만큼, 내 토큰은 내가 모아야 한다. 이것이 내 가족과 이웃을 보호하고, 또 내 가치를 높이는 일이다. 국가 간, 이미 토큰 모으기 전쟁은 불이 붙었다. 이 전쟁에서 지지는 말아야 한다. 토큰은 지금 막 펼쳐지는 이 블록체인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큰 자원이 될 테니까.

토큰 가치와 수량 높이기는 국가 차원에서도 시도되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우선하는 개인 간 토큰 모으기 운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시기와 기회를 놓치면, 그만큼 알면서도 내 행복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니, 우리 행복은 토큰 모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시기임을 서로서로 얼굴 마주 볼 때마다 다짐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디지털 시대 초입에서 나만의 행복을 만들어 가는 사례의 하나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든, 새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공
                                                   
분명 어느 시대든, 누가 가지 않았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주인공이었다. 지금 열리고 있는 컴퓨터 문명이 더 열릴수록, 무엇인가 새로운 길을 가자며,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들에 의해 그 시대의 길은 활짝 펼쳐질 것이다. 지금, 우리네 행복이란,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당신은 당신의 컴퓨터를 들고 어떤 행복의 길을 향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렇게 이루어지는 서로의 만남을 통해, 그 행복의 꽃은 더 활짝 피어나야 하리라는 믿음이다.

서로 얼굴을 보고, 말을 나누어야, 서로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분명 진리다. 설령, 진리도 변한다고 하지만, 이것만은 불변이다. 그것은, 어디서든, 우리는 모두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맞다, 서로는 서로의 주인공이 되어, 즐겁게 던지는 질문과 행복한 대답을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 이렇게,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세상, 참 멋진 일이 아닐까?

가끔, ‘디지털 시대 행복은 무엇일까?’ 하는, 그때마다 지금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함께 그 대답을 찾아보는, 그런 기회를 만들고 또 만든다면, 더 즐거워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구와 함께, 이 새로운 길을 가야 할 것인가? 이 컴퓨터 문명이 인연의 고리를 새로 만들어 준, 새로운 변화를 마음껏 즐기려는 사람, 행복 전달자의 길을 먼저 가려는 사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컴퓨터 없이도 가려는 사람, 이미 그 길에 들어서서 손을 맞잡고 있는 사람이 주인공이라고 나는 다시 확신하고 싶다.

그렇다, 인간과 컴퓨터가 합해지는, 이 문명의 특이점, 양자컴퓨터의 디지털 트윈 세상, 그 정점을 향해 걷고 있는 이 시간을, 이 글을 읽는 우리는, 참 영광스럽게도 함께 느끼고 있다. 맞다. 이 ‘지금’을 서로 만져보고 있는 오늘은, 참 기분 좋은 날이다. 나는 오늘, 이 멋진 디지털 시대 느끼기에 동참해, ‘행복’이라는 향기를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어 무척 즐겁다.

그래서, 이 시간에 조금이나마 고개를 함께 끄덕이는 한 분 한 분께 감사하다는 제 마음을 드리고 싶다. 이 디지털 시대로 향한 시계의 시간을 함께 바라보아준 덕분에, 나는 지금 내 디지털 시대 행복을 조금이나마 쳐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혹시, 이 글을 접한 분들도, 나 또한 다시 읽어보는, 지금의 내 마음과 같다면, 그렇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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