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
지금은 여기저기 부드러운 남자 투성이지만, 예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베이비 부머들이 청춘이었던 시절에는 ‘가부장적인 사회’라,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선입견과 편견이 팽배했습니다.
오죽하면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운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을까요?
‘첫 번째 태어날 때 울고, 두 번째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세 번째 나라가 망했을 때’
심지어 어린 남자아이가 넘어져서 아팠다고 울 때도 달래주기는커녕,
“떼끼, 사내 녀석이 이런 걸로 울면 못써!”
이렇게 혼을 내곤 했었죠.
그러니 성인 남성은 모름지기 남들 앞에서 절대로 울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하면 1970년대 유행했던 ‘아마도 빗물이겠지’라는 유행가는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 사나이가 그까짓 껏
사랑 때문에
울기는 왜- 울-어
두 눈에 맺혀있는
이 눈물은
아마도 빗물이겠지
남자의 두 눈에 맺힌 눈물은 절대로 눈물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는 거지요. 왜냐? 남자이기 때문에, 그만큼 예전에는 남자가 울면 ‘남자답지 못한 남자’로 받아들여지던 사회였는데요. 그러다 남성들의 이런 ‘감정 가리기’가 한 광고 카피로 변화의 물살을 타게 되지요.
그 광고 카피가 바로 ‘나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예요’라는 거였는데요. 정작 어떤 상품에 대한 광고였는지, 광고한 상품은 기억에 남지 않았어도, 오로지 이 광고 카피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툭하면 이런저런 상황에서 매력적인 남자라는 것을 홍보하는 용도로 계속 재활용되고 있지요.
그러니까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는 뜻은 겉으로는 까칠하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속은 부드러운 남자라는 건데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유형인 ‘츤데레(ツンデレ)’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츤데레’는 애니메이션과 미소녀 게임 등에서 주로 묘사되는 인물의 성격 유형 중 하나를 일컫는 일본의 인터넷 유행어입니다. 원래 여성 캐릭터에 많이 쓰이다가 2010년대 들어서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사용되면서, 남성 캐릭터에 더 많이 쓰이고 있는데요. 쉽게 말해서, 겉으로는 퉁명스럽게 대하지만, 은근히 따뜻하게 챙겨주는 유형을 말합니다. 요즘 웹소설 로맨스 장르의 남자 주인공들은 대개 이런 유형으로 그려지고 있지요. 일종의 가상 연애 이상형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를 자처하는 시니어 분들 가운데는 유감스럽게도 알고나도 별로 부드럽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젊어서 부드럽지 않던 남자가 나이 들어 어느 날 갑자기 부드러운 남자가 되긴 실상 어려운 일이니까요. 사람 성정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잖아요. 오죽하면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는 얘기도 있을까요.
그리고 부드러운 남자와 심성이 약한 남자를 오해하는 면도 있습니다. 특히 선거 때만 되면 후보의 부드러운 면을 강조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연출해서 홍보하는 데 많이 사용하는데요. 눈물을 참지 않고 흘린다고 해서 그걸 부드러운 남자의 상징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나이 들어 갱년기를 맞으면 남성은 상대적으로 여성 호르몬이 많아지게 되지요. 그러면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도 눈물이 핑 돌 때가 많아지게 된다고 하는데요. 다만 그런 상황에서 예전에는 눈물을 빗물이라고 우길 정도로 눈물을 애써 삼켰다면, 지금은 남자가 눈물을 흘려도 흉이 되지 않는 시대가 돼서, 마음 편히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특히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그야말로 잘리지 않고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자신의 약점이나 상처들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단단한 껍질로 자신을 감싸고 지내던 분들은, 그 껍질을 벗어야 부드러운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텐데요. 문제는 그렇게 산 세월이 길수록, 그 껍질이 단단하게 굳어져서, 벗고 싶어도 벗지 못하게 된다는 거지요. 게다가 그 껍질을 벗으려면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계기가 쉽게 주어지지 않거든요.
그러니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가 되려면, 그런 껍질을 한 겹 한 겹 벗는 노력부터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를 옥죄던 껍질을 벗고 부드러운 남자가 되면, 무엇보다 나 자신이 가벼운 마음으로 제2의 인생을 즐길 수 있겠지요.
그리고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 보다 ‘알고 나니 참 부드러운 사람’, ‘알고 나니 참 베풀 줄 아는 사람’, ‘알고 보니 마음이 참 따뜻한 사람’으로 주변에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KBS 3라디오 출발 멋진 인생 방송작가 권은정